8화
블라드 유진의 앞으로 불쑥 뛰어든 인물은 미궁 전략부장 조지훈이었다.
그는 이미 조지의 출현을 알고 있었지만, 위험하게 불길 가까이 뛰어들 줄은 예상치 못했다.
헌터도 아닌 일반인에 불과한 자가 말이다.
유진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조지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자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앞을 막아선 건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너 탄다."
"예? 으, 으악!"
그의 말에 아래로 시선을 내렸던 전략부장은 깜짝 놀라며 황급히 다리를 털었다.
바람이 불어서 화염이 바지에 옮겨붙은 것이다.
정장 바지의 밑단이 시커멓게 탔지만, 조지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얼른 고개를 들었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냐고 묻지 않았는데."
"아하하! 그러셨던가요?"
어색하게 웃는 전략부장을 향해서 블라드 유진은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만약 앞길을 막은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이놈도 썰어 버리고 그냥 지나칠 참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감지한 모양인지, 조지훈은 얼른 표정을 바로 하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타국 헌터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멈춰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보상을 받아 내겠습니다!"
"무슨 보상?"
"그……. 파주의 집이 폭파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피해 보상은 확실히 받아 낼 테니, 싸움이 번지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게 오해로 빚어진 일 아니겠습니까?"
전략부장의 말대로 미국과 러시아의 헌터들은 애당초부터 그를 노리고 공격을 가한 게 아니었다.
파주 집의 폭파는 전시영을 암살하기 위해서였고, 방금은 러시아가 미국 협회 지부를 급습하던 중에 유진이 끼어들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물론 제대로 살피지 않은 저들의 잘못이 가장 컸지만, 고의는 아니지 않은가.
의외로 설득력 있는 조지훈의 말에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까기 인형이 되었지만, 애초부터 전쟁을 원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제대로 된 사죄는 받아야겠군. 책임자들 데리고 와."
"……알겠습니다."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겠다."
"예."
과연 힘없는 한국 협회가 강대국인 냉전 당사자들을 구워삶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조지훈의 용기를 봐서 한 번 정도는 접어 주기로 했다.
물론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시 학살은 재개될 터였다.
"협회에서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미궁 전략부장은 블라드 유진의 집이 폭파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끝까지 의전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순순히 조지훈을 따라서 발걸음을 옮겼다.
"어어? 우리랑 같이 가야지!"
유진이 어디론가 가 버리자, 상황을 관망하던 전시영과 루시아가 헐레벌떡 따라왔다.
―우리가 데려갈까?
"이힝! 푸르르!"
레니가 두 여인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자, 녹턴이 불쾌하다는 듯이 투레질했다.
―그래. 그럼 우리끼리만 가자.
둘은 그가 탄 차를 쫓아서 밤하늘을 유유히 가로질렀다.
두두두두두!
* * *
간밤의 소동은 수십 대의 소방차가 오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
어찌어찌 불길은 잡혔지만, 한국 정부와 헌터 협회는 그야말로 공황에 빠져 버렸다.
어떻게든 미국과 러시아를 설득하여 블라드 유진에게 사죄와 보상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야 했으니까.
이제 막 기지개를 켜고 있는 약소국이 할 수 있는 행동은 결단코 아니었다.
하지만 조지훈은 그 어려운 일을 기어코 해내고야 말았다.
사실 씨알도 안 먹힐 일이었지만, 그의 이름을 팔아서 협박 아닌 협박을 하자 어느 정도 수긍하는 기미가 보였다.
냉전 당사자들도 유진이 얼마나 대단한 실력자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의가 아니었다는 것만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공격 목표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건 명백한 실수입니다.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미국과 러시아 협회 측은 각자 명망 있는 헌터 몇 명을 보내 사과의 말을 전했다.
당연히 이 싸움의 배후에 있던 S급 헌터 조나단 잭슨과 레프 미하일로비치 알렉세이는 오지 않았다.
양국의 협회는 그저 적당히 유명한 수준의 A급 최상위 헌터들만 보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한국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성과였다.
명백하게 잘못을 시인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믿을 수 없는 결과였으니까.
물론 그 대상이 한국이었다면, 결말이 달랐겠지만.
"받아들이지."
블라드 유진은 한동안 말없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의도를 뒤늦게 알아챈 미국의 A급 헌터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보상은 원하는 크기의 저택 건설비를 저희가 대겠습니다. 당연히 내부를 채우는 것도 포함입니다."
"……협회에서 보유 중인 아이템 몇 점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것 한 가지를 고르시지요."
미국이 새로운 집을 약속하자, 러시아는 아이템을 보상으로 내놓았다.
둘 다 나름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라, 유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더 시간 끌 필요 없이 이 일은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최대한 빨리 토지를 선별하고, 착공에 들어가겠습니다."
양국의 사절이 돌아가자, 조지훈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푹 숙이며 입 안의 혀처럼 굴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뭐가?"
"유진 님의 자비 덕분에 냉전이 빨리 종식되었잖습니까?"
미궁 전략부장은 당사자들의 기세가 확 꺾였으니, 이대로 냉전이 끝나리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흠. 과연 그럴까?"
"예?"
"뭐, 착각은 자유지."
조지훈이 되물었으나, 그는 상세한 이야기는 해 주지 않고 돌아서서 커피만 홀짝였다.
전략부장은 더 질문하지 못하고, 그대로 호텔 객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달칵!
"나와."
"예."
스윽!
조지훈이 문을 나선 직후, 유진은 거실의 구석진 곳을 응시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무도 없던 허공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상당히 지친 표정에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DK가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의 상태를 바로 파악한 그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말했다.
"무슨 일이지?"
"습격이 있었습니다."
"상세히."
"예, 알겠……. 윽! 괜찮습니다. 가죽만 살짝 베인 정도입니다."
블라드 유진에게 보고하려던 DK는 돌연 옆구리를 붙잡으며 비틀거렸다.
상처가 얕다지만, 통증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이 상태로 부산에서 파주까지 올라왔으니, 아마 좀 덧나기도 했을 터였다.
츠츠츠츠츠!
녀석에게 다가간 그는 투명하게 변한 손으로 목덜미를 가볍게 짚었다.
그러자 DK의 혈액이 유진의 체내로 들락날락하며 신체를 엄청난 속도로 복구했다.
제주도에서 전시영에게 썼던 회복 전이 능력이었다.
일순간 뱀파이어 로드의 회복력을 얻은 덕에 녀석은 금방 멀쩡한 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다.
"휴! 감사합니다. 마스터."
"이제 보고해 봐."
"예."
DK는 곧장 부산에서 보고 들은 내용과 비산의 암살자 페드로와 전투를 벌인 사실을 보고했다.
"분명 같은 등급임이 틀림없는데, 생각 외로 너무 강했습니다. 일부러 맞붙지 않고 빠져나가는 것에만 집중했다고는 하나, 상처를 입을 줄은……."
"그 부분은 확실히 이상하군."
아무리 전투에 특화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DK도 비인가 헌터 중에서는 최상위 클래스에 해당했다.
그런 녀석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에 그는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하수인 자리를 비워 둬야겠군."
"피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어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강자였습니다. 아무래도 주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더 좋은 일이지."
"……."
유진의 강력함을 상기한 DK는 더 이상 경고하지 못하고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그런 그에게 패배하여 하수인 신세가 되지 않았던가.
정신을 지배당한 상태라 불만은 전혀 없었고, 앞으로 페드로 녀석이 당할 걸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래도 같은 S급 비인가 헌터니 만큼, 경쟁의식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수고했다. 아직 등급이 낮아서 양방향 의사 전달이 안 되는 게 아쉽군."
유진은 아무리 멀리 있어도 하수인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혈성쇄혼술이 더 성장하여 EX급이 되면, 양방향 소통도 가능해질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식으로 보고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휴대 전화를 마련하는 게 어떠신지요."
"음. 나쁘지 않은 방법이로군. 조지 녀석에게 가져오라고 해 봐야겠어."
"대포 폰이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됐어. 굳이 그럴 정도로 급한 건 아니니까."
여러 사람의 기억을 흡수한 덕분에 휴대 전화의 유용함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크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거의 혼자서 활동해 온 데다가, 누군가와 연락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
게다가 익숙하지 않은 문물이라, 살짝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진 헌터 연합체가 한국 암흑가의 거두로 떠오르는 지금, 블라드 유진은 보고받을 일이 많아지고 말았다.
이따금 녹턴을 타고 찾아가면 될 일이긴 하나, 오늘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DK의 의견을 받아들인 그는 곧장 호텔 프론트에 전화를 걸어 조지훈을 찾았다.
이제 막 로비를 나서는 중이었는지, 직원은 곧바로 전화를 연결해 주었다.
유진이 휴대 전화를 요청하자, 조지훈은 굽신거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공손하게 답했다.
―아, 예예! 금방 대령하겠습니다.
"그래."
달칵!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는 문득 DK를 돌아보며 질문 하나를 던졌다.
"휴대 전화는 위치 추적이 된다던데, 그건 어떻게 해결하지? 추적을 떨칠 때마다 놓고 다녀야 하나?"
"아닙니다. 공간 확장 주머니에 넣으면, 바로 해결됩니다."
"거기까지는 추적이 안 되는 모양이지?"
"아예 신호가 잡히지도 않으니까요. 넣었다 꺼낼 때, 마치 순간 이동 하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간단하군."
블라드 유진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들이 자신의 행적을 들여다보고 있는 건 불쾌하기 그지없었으니까.
"흑룡은 잘하고 있던가?"
"마지막으로 파악했을 때는 외국의 비인가 헌터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난하게 이겼을 겁니다."
"문제는 페드로 그자로군."
"예,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든 다시 나타나겠지. 이제 업무에 복귀해. 전화번호는 의념으로 알려 줄 테니, 필요하면 연락하고."
"알겠습니다. 마스터."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린 DK는 호텔을 유유히 나섰다.
로비를 통해 정문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갔음에도 녀석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직도 불타고 있나."
객실의 통유리 앞에 선 그는 미국 헌터 협회 지부가 있던 곳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원래라면 건물의 위치를 가늠하기 힘들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잘 보였다.
5천 리터에 달하는 휘발유가 플라스틱 폭탄과 함께 발화한 사건이었다.
밤새 진화 작업을 한 덕에 불길은 어느 정도 잡혔지만, 아직도 시커먼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블라드 유진은 냉전 종식의 희망에 가득 찬 조지훈을 떠올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쉽지는 않을 텐데. 과연 어떤 식으로 나올지 궁금하군.’
다가오는 미래를 예측하기라도 하듯, 서울의 경관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