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한편, DK는 부산 북구 인근의 상계봉 중턱에서 정체불명의 인물과 대치하는 중이었다.
흑룡과는 별개의 정보 창구를 운용하고 있던 터라, 한국에 들어온 비인가 헌터를 쫓아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오랜만이로군."
"날 아나? 이상하군. 내가 한국에 온 걸 아는 자는 아무도 없을 텐데."
마치 DK가 정체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자, 상대는 미간을 좁히며 답했다.
말끔한 영국식 정장을 제대로 입은 DK와는 달리, 놈의 행색은 살짝 자유분방했다.
검은 넥타이는 반쯤 풀려 아무렇게나 매어져 있었고, 재킷 대신 무릎까지 오는 롱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조금 더운 모양인지, 그자는 이내 코트를 벗어 나뭇가지에 대충 걸어 놓고 지포 라이터를 꺼냈다.
팅! 치이익!
팩에 든 담배를 무심하게 튕겨 올린 남자는 필터를 앞니로 질겅질겅 씹으며 불을 붙였다.
그러자 왠지 실리콘 냄새가 섞인 듯한 쑥 향이 물씬 피어올랐다.
아무래도 저건 일반적인 담배가 아니라, 대마초인 모양이었다.
"후우우!"
DK는 그런 상대를 바라보며 시가 연기를 옆으로 우아하게 불었다.
"모를 리가 없지. 비산의 암살자 페드로라고 하면, 브라질에서 가장 유명한 비인가 헌터 아닌가. 잔혹하기로 말이야."
비산의 암살자(Splash Assassin) 페드로는 암살 대상의 시체를 사방팔방에 흩뿌려 놓기로 유명했다.
이자가 누군가를 죽인 현장은 마치 스플래터 영화의 한 장면과 같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다.
페드로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DK를 바라보았다.
마치 굶주린 승냥이가 먹잇감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호오? 별명까지 꿰고 있다니, 이거 한 방 먹었는데. 내 정체를 알고도 다가온 걸 보면, 평범한 놈은 아닌 모양이군."
"좋을 대로 생각해."
"그나저나 별안간 나타난 이유가 궁금한데. 갑자기 네놈에게 관심이 생겼거든."
"아아! 동업 제안을 좀 하고 싶어서 말이야. 웬만하면 우리 사업을 망치지 말아 줬으면 하거든."
"동업이라……. 난 딱히 그런 게 필요 없는 인간. 아니, 사람인데 말이야. 그냥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기에 와 봤을 뿐이라고."
"냉전 때문인가?"
"바로 그거지."
미국과 러시아의 충돌로 인하여 혼란에 빠지자, 비인가 헌터들에게 한국은 무슨 신개척지처럼 알려진 상태였다.
그랬기에 흑룡이 막으러 간 금정구 시장의 습격자들처럼 온갖 이상한 놈들이 마구 밀려 들어오는 실정이었다.
브라질에서 활동하는 S급 비인가 헌터, 비산의 암살자 페드로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자도 냉전의 혼란 속에서 뭔가 취할 이득이 있나 싶어서 한국에 밀입국했으리라.
그도 아니라면, 블라드 유진에게 붙잡히기 전의 DK처럼 오로지 혼돈만을 원하는 놈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위험한 자임은 분명했다.
"여기도 여기 나름대로 암흑가의 규칙이 있다고. 굴러온 돌 싫어하는 건 어디나 똑같지 않나?"
"그건 그렇겠지. 하지만 날 봐. 내가 누구지?"
"흠. 미친놈에게 규칙 따위는 없다 이건가."
"크크크! 바로 그거야."
거의 다 피운 수제 대마초의 필터를 뱉어 낸 페드로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무언가를 불쑥 꺼내 들었다.
스으으으!
공간을 꿰뚫고 나타난 그것은 불길한 암청색 빛무리가 어른거리는 거대한 낫이었다.
"한국에서의 첫 살인 기념으로 고문은 하지 않으마. 깔끔하게 죽여 주지."
"말 몇 마디에 죽인다는 소리부터 나오는 걸 보니, 제대로 미친놈이로군. 와 보길 잘했어."
"어디 내 낫에 썰리고도 그딴 여유를 부릴 수 있는지 보자."
쑤화아아앙!
페드로가 자루를 크게 휘두르자, 반달 모양의 암청색 기운이 부메랑처럼 쏘아져 나갔다.
물론 놈의 공격은 고작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낫을 연신 휘두르자, 쏘아지는 기운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하찮은 것들의 뜨거운 피로 대지를 붉게 물들이리라! 카니지 사이드(Carnage Scythe) 반월참(半月斬)!"
촤좌좌좌좌좍!
DK는 자신을 향해서 쏟아지는 수백 개의 반월도 다발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대학살의 낫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빗발치는 암청색 기운은 도무지 피할 틈도 없어 보였다.
"훗!"
하지만 DK는 작게 코웃음을 치더니, 앞으로 쭉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휘리리리릭! 퍽!
전방으로 돌진하던 DK의 신형은 반월도에 적중되자마자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무모하게 달려든 녀석은 그저 분신이었을 뿐, 진짜는 제자리에서 가만히 시가를 피우고 서 있었다.
페드로는 애먼 곳을 향해서 반월참을 무수히 갈겨 버린 것이다.
놀랍게도 분신은 피격당해 먼지로 흩어지기 직전까지 발악하듯 몸을 회전하며 공격을 피했다.
그랬기에 분신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허!"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은 페드로는 입술을 뒤틀며 재차 낫자루를 휘둘렀다.
고작 공격 한 번이 빗나갔다고 절망할 것도 아니고, 단지 분간할 수 없는 분신술에 잠깐 놀랐을 뿐이었다.
"카니지 사이드 반월난무(半月亂舞)!"
촤좌좌좌좍! 쿠콰콰콰콰!
암청색 빛을 머금은 거대한 낫이 춤을 추자, 발출되던 반월도의 움직임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저 일직선으로 쏘아지기만 하던 것들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이는 게 아닌가.
한두 개도 아니고 수백 개의 칼날이 그러고 있으니, 마치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쯤 되면 분신이고 자시고,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가짜들 틈에 몸을 숨긴다고 해서, 저 무시무시한 칼날 폭풍을 피하지는 못할 테니까.
"젠장!"
거대한 돌풍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자, DK는 분신들 틈에 섞여 잽싸게 몸을 날렸다.
수백 개의 인형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지만, 페드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카니지 사이드를 휘둘렀다.
놀란 메뚜기 떼처럼 이리저리 뛰어 봤자 이 일대 전체를 스킬의 범위 안에 넣으면 그만이었다.
그럼 촘촘하게 날아드는 반월도가 반드시 목표를 분쇄해 버릴 테니까.
"크하하하하!"
몰아치는 광풍을 바라보며 페드로는 광소를 터트렸다.
한국에 온 기념으로 고문은 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상대의 시체는 자신이 평소에 하던 대로 잘 다져진 고기 조각이 되어 버릴 터였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문득 페드로의 광소가 뚝 끊기더니, 낫자루를 휘두르던 팔도 멈추는 게 아닌가.
그자의 눈빛은 마치 심연을 들여다본 나약한 영혼처럼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이윽고 페드로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뭐였지?"
순간적으로 방금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움직임을 멈추느라, 몰아치던 반월난무는 점차 사그라져 가는 중이었다.
카니지 사이드의 힘과 반월도가 추가되지 않으니, 폭풍의 힘이 극도로 줄어든 것이다.
그런데 잠깐 멍하니 있던 사이, DK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분신은커녕 자그마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페드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 기술은……. 카르텔 설계자 그놈인가? 어쩐지 굴러온 돌 어쩌고 하더니, 그 녀석이 들어와 있었군."
아무래도 이자는 DK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했다.
하긴 활동하는 무대만 다를 뿐, 비인가 헌터의 최상위 실력자로 분류되는데 정보를 아예 모를 리가 없었다.
그저 DK의 인상착의가 전혀 알려지지 않아서,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을 뿐.
인상을 쓰던 페드로는 주머니에서 담배 팩을 꺼내 손목을 튕겼다.
그러자 두세 개의 담배 필터가 튀어 올라 손끝에 딱 걸쳐졌다.
툭! 띵!
대마초에 불을 붙인 그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연기를 빨아들였다.
"스으읍! 이거 일이 좀 재미있어지겠는데?"
* * *
휘발유를 5천 리터나 부어 놓고, 플라스틱 폭탄을 투척한 지 고작 30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미국 협회 지부를 치기 위해서 몰려들었던 러시아 헌터들은 하나같이 피떡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두 개의 시뻘건 칼날을 휘두르는 은발의 남자에게 그야말로 학살당했기 때문이었다.
"으으으! 사, 살려……."
콰직―!
마지막으로 남은 러시아 헌터가 손을 휘저으며 사정했지만, 블라드 유진의 손속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소수혈인을 쑤셔 박아 방어구와 함께 육신을 꿰뚫어 버렸다.
그러고는 마치 쓰레기 버리듯이 옆으로 아무렇게나 툭 던져 놓았다.
철퍽!
"크허어!"
그자는 신음을 흘리며 동료들의 혈액으로 이루어진 강에 처박히고 말았다.
피가 묻지 않은 오른쪽 눈에서 생명의 빛이 천천히 사그라졌다.
"자잘한 놈들 것까지 굳이 다 흡수할 필요는 없겠지."
수십 구나 되는 러시아 헌터들의 시체를 둘러보던 유진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인간의 혈액보다 맛있는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굳이 그저 그런 놈들의 피까지 깡그리 빨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혈액 섭취는 초반에 몇 놈 흡수한 거로도 충분했다.
게다가 이 참상을 벌인 자가 그라는 게 드러난 상황인데, 비쩍 마른 시체만 남겨 두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터였다.
‘남은 건 저놈들인가.’
블라드 유진은 불타오르는 미국 협회 지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구에서 대폭발이 일어나고 수십의 러시아 헌터들이 도륙되는 동안, 미국 협회 지부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아마 미국 헌터들도 그가 찾아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건물 외벽에 달린 CCTV로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는 건,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과연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냉전에 투입된 미국 헌터들은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당장 튀어나와 유진의 앞에 부복하여 용서를 구하거나, 적대해야만 할 터였다.
전력을 보전하여 냉전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려면, 당연히 전자를 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미 동료를 상당수 잃은 상태에서 저자세로 나갔다간, 되레 내부의 저항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이었다.
척! 척!
그는 미국 협회 지부 쪽으로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가볍게 산책이나 나온 듯한 태도였지만, 상대는 어마어마한 압박을 받고 있을 것이다.
블라드 유진이 걸어가자, 바닥에 흥건하던 러시아 헌터들의 혈액이 마치 홍해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의 발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노예와 같이 말이다.
화르르륵!
러시아 헌터들이 투척한 휘발유와 폭탄으로 인해, 눈앞에는 엄청난 크기의 불길이 치솟아 있었다.
마치 지옥 어딘가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이었다.
스프링클러가 터져 화염을 어느 정도 막고 있었지만, 자연적으로 소멸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물이 흐르는 곳으로 불붙은 휘발유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불길을 통과하려 했다.
츠츠츠츠츠!
피의 권능을 일으키면 불과 물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문득 그런 그의 앞길을 막는 누군가가 있었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