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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81화 (82/226)

6화

금정구 시장의 진 연합체 사업장을 습격한 건 정체불명의 백인 헌터들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흑룡은 마치 대호(大虎)처럼 포효하며 달려 나갔다.

타다다닷! 후우웅!

정진수의 손에 들린 대검은 무지막지한 파공성을 내며 휘둘러졌다.

터어어엉!

"컥!"

한 백인 헌터의 등판에 검신이 작렬하자, 쇳덩이를 후려갈기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흑룡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중심으로 짓쳐 들어가며 고함을 내질렀다.

"이놈들이 어디서 행패야!"

"회, 회장님!"

최선봉에 검붉은 갑옷을 입은 흑룡 정진수가 튀어나오자, 공격당하던 조직원들이 화색을 띠었다.

마치 가뭄에 단비라도 맞은 듯, 그들은 맹렬하게 반격하여 백인 헌터들의 압박에서 벗어났다.

이윽고 금정구 시장의 한복판에는 양분된 두 세력이 대치한 소강상태가 잠깐 지속되었다.

지금껏 상당한 시간 동안 전투를 벌여 온 데다, 이제야 양측의 전력이 비등해졌기 때문이었다.

흑룡은 처참한 몰골의 조직원들을 돌아보더니, 스산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뭐 하는 놈들이기에 우리 권역에서 행패를 부리는 거지? 누구 좀 아는 사람 있나."

"예! 회장님.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며칠 전부터 종종 모습을 드러내던 패거리인데, 아무래도 제3세계에서 온 놈들 같습니다."

"제3세계?"

"네, 그렇습니다. 우리 사업장만 콕 집어서 공격을 가해 온 거도 이상하고, 게다가 싸움 솜씨가 일반적인 헌터와는 전혀 다릅니다."

"쯧! 별 희한한 놈들이 사업에 끼어들었군."

사업장을 관리하던 부하로부터 보고를 받은 정진수는 대검을 늘어뜨리며 앞으로 나섰다.

일단 놈들과 대화를 좀 해 보기 위해서였다.

"한국말 할 줄 아는 놈 있나?"

"후후후. 사업장을 치면서 해당 지역 언어도 모르고 왔을 리가. 한 조직을 이끄는 놈치고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네. 아! 카리스마로 통치하는 타입인가?"

흑룡의 말에 대답한 건 거대한 덩치의 남자였다.

아마도 저자가 백인으로 구성된 비인가 헌터들을 이끄는 장본인인 듯했다.

스킨 헤드에 선글라스까지 쓴 거한이라니,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외모였다.

빈정거리는 말투가 상당히 거슬렸지만, 정진수는 꾹 눌러 참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지금껏 진 연합체를 이끌어온 흑룡이 저런 얕은 도발에 넘어갈 정도로 아둔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이 행위, 불문율을 깨는 분명한 무력 도발이다. 끝장을 보기라도 하자는 것인가."

"비인가 헌터들의 세상에서 불문율? 한국 놈들은 정말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낸 모양이로구나. 이러면 이야기가 쉬워지지. 멍청한 놈들의 이권을 빼앗는 것보다 간단한 일은 없을 테니까."

"……우물 안 개구리? 지능이 떨어져 보이는 코디를 그대로 입고 온 대머리 자식이 대체 뭐라 지껄이는 거냐!"

아무래도 노련한 비인가 헌터 조직의 보스라는 평가는 당장 갖다 버려야 할 것 같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보던 정진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검을 치켜들었다.

"이 새끼들 조져!"

"으와와아!"

콰칭! 터어엉!

흑룡의 외침과 동시에 진 연합체 조직원들은 사나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지금껏 당한 설움을 갚아 주기라도 하려는 듯, 찌르고 후려치는 무기에 살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돌격 명령을 내렸던 정진수 또한 민머리에 선글라스를 낀 녀석을 향해서 짓쳐 들어갔다.

쩌정!

하지만 흑룡은 상대측 리더를 단박에 제압하지 못했다.

제3세계에서 온 비인가 헌터답게 녀석의 실력은 정진수와 비등할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흑룡이 어떤 인물인가.

원래도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블라드 유진을 만나면서 한층 강해진 상태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최근 진 연합체의 영향력을 확대하며 수많은 전투를 거친 덕분에, 역전의 전사가 되어 있었다.

연속으로 대검을 후려갈기며 전투의 주도권을 가져오자, 점점 상대측 리더는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되었다.

종국에는 물러서기만 바쁜 상황에까지 몰리게 된 것이다.

터엉!

"크윽!"

대머리 녀석은 후퇴만 거듭하다가 가건물의 철제 벽에 등을 부딪히고 말았다.

흑룡의 대검이 목을 잘라 버릴 듯 횡으로 크게 휘둘러지자, 그자는 잽싸게 옆으로 몸을 날렸다.

바닥을 볼썽사납게 뒹굴고 나서야 간신히 공격을 피한 녀석은 가쁜 숨을 고르며 허리춤을 뒤졌다.

공간 확장 주머니에서 이 상황을 타개할 아이템이라도 꺼내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거나 먹어라!"

드르르르륵! 터더더더덩!

놀랍게도 상대측 리더가 꺼내 든 것은 기다란 탄창이 꽂힌 기관단총이었다.

난데없이 총이 등장했지만, 흑룡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수십 발의 탄환이 한순간에 발사되어 날아들었으나,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그저 검붉은 색의 방어구 표면에 살짝 흠집이 생겼을 뿐이었다.

최근 진 연합체가 승승장구하면서 품질 좋은 방어구를 갖춰 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등급이 낮았다면, 갑옷과 함께 육신이 탄환에 꿰뚫려 버렸을 테니까.

얕은 흔적이 남은 흉갑을 내려다본 흑룡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거 방탄 갑옷이야. 이 새끼야!"

드르르륵! 후웅!

상대가 탄창을 바꿔 끼우며 재차 총격을 가했지만, 정진수의 움직임이 훨씬 더 빨랐다.

미처 탄창의 탄환을 절반도 쏟아 내기 전에 달려든 흑룡이 대검을 후려갈겼다.

콰직―!

"크허억!"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이 복부에 가해지자, 상대측 리더는 눈을 까뒤집으며 나동그라졌다.

흉갑이 찌그러지며 육신에 무시무시한 힘이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대머리 녀석을 쓰러뜨린 정진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드르르르륵! 터더더더덩!

금정구 시장을 급습한 비인가 헌터들은 온갖 종류의 현대 무기를 동원하고 있었다.

A급 이상의 아이템으로 연합체 조직원들을 도배해 놓았기에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소홀했다면 큰 피해를 봤을 뻔했다.

"이 정도라면, 다른 곳도 상황이 심각하겠는데……."

흑룡은 가장 중요하다 생각되는 금정구 시장으로 곧장 달려온 참이었다.

부산 일대에 생성된 경계 지역 시장은 총 네 군데.

나머지 세 곳의 상황도 금정구와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하필이면 인원을 분산해 놨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진 헌터 연합체는 세력 확장을 거듭하느라, 전투 병력을 필요한 곳으로 분산시켜 놓았다.

사업장 규모가 커지는 속도는 엄청난데 인력 수급에는 한계가 있으니,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지원이 절실한 터라, 흑룡은 이 모든 걸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 한 남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DK 그 뺀질이 자식, 설마 이 상황에서 나 몰라라 하고 있진 않겠지?"

워낙 은밀하게 일을 꾸미고 돌아다니는 놈이다 보니, 흑룡조차도 DK의 종적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사무실에 함께 있었다지만, 앞으로 녀석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드르르륵! 터더더덩!

그러다 기관단총의 격발음에 퍼뜩 상념에서 깬 정진수는 제3세계의 비인가 헌터들을 향해서 재차 돌진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총기 소지가 불법이라고! 이 치사한 놈들아!"

온갖 불법적인 일은 다 하면서 총기 사용을 왜 규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흑룡은 습격자들을 차근차근 정리해 나갔다.

* * *

흑룡이 비인가 헌터들과 박 터지게 싸우고 있을 때, 블라드 유진은 다음 목표를 찾아 움직이는 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지만, 그와 꽤 오랫동안 함께한 전시영과 루시아는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얻은 스위트 홈을 잃은 유진의 분노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는 것을.

"어, 어디로 가시는 걸까요?"

"나야 모르지. 저 목석같은 사람 속을 대체 누가 알겠어?"

루시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어둠을 헤치며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시영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태평한 태도였다.

냉전으로 인해 국내로 들어온 헌터들을 블라드 유진이라는 초강자가 처리해 준다면, 그보다 좋은 결과는 없었다.

한국 헌터 협회는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없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제약도 걸려 있지 않으니까.

질질질! 척!

"거점이 어디라고?"

수십 명의 미국 헌터들을 모조리 도륙한 유진은 딱 한 명만 남겨 두었다.

육중한 덩치의 헌터를 한 손으로 가볍게 끌고 온 그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보라색으로 염색한 머리에 얼굴이 온통 피어싱으로 도배된 남자가 공포에 찌든 표정으로 대답했다.

"크흑! 이, 이 건물입니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데. 마치 빈 건물 같군."

"으아아! 거, 거짓말이 아, 아닙니다! 분명히 이곳을 숙소로 배정받았습니다. 아마도 어떤 작전이 있어서 나간 게 아닌지……."

"설득력 있는 말이로군. 마지막 말이 네놈의 목숨을 살렸다."

"가, 감사합니다! 으윽!"

질질질질! 퍽!

블라드 유진은 보라색 머리의 거한을 미국 헌터 협회 지부 바로 옆 건물의 벽에 처박았다.

그러고는 스산한 눈빛으로 놈을 쳐다보았다.

"그대로 찌그러져 있어."

"예, 예!"

녀석의 대답을 들은 그는 느릿하게 숙소를 돌아보았다.

바깥에서 파악한 것처럼 내부에 사람은 없는 듯했다.

대신 바로 옆의 미국 헌터 협회 지부에서 상당한 수효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오밤중임에도 뭔가 작전을 수행하려는 모양인지, 그들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당분간 더 살려 둬도 되겠군.’

보라색 머리 거한의 말이 사실로 밝혀지자, 유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오로지 진실만 말해 왔으니, 하루 이틀 정도 살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집을 부순 인간에게 해 줄 수 있는 그만의 보상이자 자비인 셈이었다.

저벅! 저벅!

블라드 유진은 존재감을 전혀 감추지 않고 미국 협회 지부 건물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사냥하기 편하도록 한곳에 모여 있으니, 들어가서 양 떼 속의 늑대처럼 날뛸 시간이었다.

대규모 살육이 예견된 바로 그때.

어디선가 문득 이상한 소음이 들려왔다.

텅! 터덩! 데구루루!

파란색 플라스틱 드럼통 수십 개가 미국 협회 지부 앞으로 굴러왔다.

울컥울컥하는 기괴한 움직임이었으나, 꾸역꾸역 구르더니 입구에 멈춰 섰다.

턱! 터덕!

"이 냄새는?"

코끝을 자극하는 비릿한 향내에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몇 번 맡아본 적이 있는 불쾌한 냄새였다.

"휘발유?"

냄새의 정체를 알아본 유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딱! 따닥! 퍼버벅!

이윽고 미약한 총격 소리가 들려오더니, 플라스틱 드럼통에 구멍이 뚫렸다.

그러자 투명한 액체가 뿜어져 나와 주변을 흥건하게 적셨다.

파란색 드럼통의 수는 건물 입구는 물론이고 벽까지 가득 메울 정도로 많았다.

보통 플라스틱 드럼통의 용량은 200리터에 달하니, 이곳에 투입된 휘발유는 족히 5천 리터가 넘을 듯했다.

투웅―! 투두둥―!

탄환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기이한 소리와 함께 삑삑거리는 카키색 블록이 그의 발치로 쇄도했다.

터더더더덕!

블라드 유진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대충 주무른 듯한 모양의 플라스틱에 뇌관과 도화선이 꽂힌 이 물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삑삑거리는 타이머가 0을 가리키는 순간, 어마어마한 폭발과 화염이 그의 전신을 덮쳤다.

쿠화아아아앙!

바닥에 흥건한 휘발유와 만나, 폭발은 엄청난 화염으로 변해 건물을 뒤덮어 버렸다.

"크하하하! 복수의 참맛이 어떠냐? 이 비겁한 새끼들아!"

미국 협회 지부가 불길에 휩싸이자, 반대편 건물 사이에 숨어 있던 자들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환호하는 그들은 하나같이 러시아어를 쓰고 있었다.

지난날 당했던 러시아 협회 지부 폭파 사건의 복수극이 바로 오늘 펼쳐진 것이다.

하필이면 유진이 미국 지부를 방문한 지금 이 시점에.

스슥―!

하지만 러시아 헌터들의 환호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새 나타난 시커먼 그림자가 짓쳐 든다 싶더니, 선두에 서 있던 자의 몸이 반으로 쩍 갈라졌기 때문이었다.

푸확―!

"허억!"

동료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순식간에 토막 나자, 근처에 서 있던 러시아 헌터들은 깜짝 놀라며 무기를 뽑아 들었다.

이어서 뒤늦게 헌터를 세로로 쪼개버린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유진은 암흑화로 폭발을 피하자마자 이곳으로 쇄도하여 소수혈인을 갈겨 버린 것이다.

그는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러시아 헌터들을 돌아보더니,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요즘 주변에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들이 많아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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