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콰과과과광!
붉게 타오르는 구체가 연이어 작렬하자, 유진의 집은 순식간에 폐허로 변해 갔다.
가스관이 터지며 연쇄 폭발이 일어난 터라,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하지만 거실에 앉아 있던 그는 그런 난리 통과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처럼 머그잔의 커피를 홀짝였다.
♬ ♪ ♩―
블라드 유진은 큼지막한 헤드셋을 쓰고, 여전히 음악을 듣는 중이었다.
노이즈 캔슬링 기술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폭발음이 들리지 않을 리 없건만, 그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마치 딴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말이다.
"으아아! 유, 유진 님!"
2층에서 잠을 자다 깜짝 놀라 내려온 루시아는 폭발 속에서 유진과 전시영을 발견했다.
그녀는 파자마를 펄럭이며 몸을 날리더니, 순식간에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왔다.
곰돌이가 그려진 귀여운 파자마에 큼지막한 깃발 창을 꺼내든 모습은 모순적이기 그지없었다.
"또 옵니다. 나가서 대응하는 게 어떻습니까?"
"음."
루시아의 외침에 그제야 눈을 뜬 유진은 헤드셋을 벗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드드득!
그러자 어깨에 묻었던 시멘트 가루와 폭발로 발생한 분진이 떨어져 내렸다.
대충 신발만 갈아 신고 밖으로 나왔는데, 때마침 굉음과 함께 집이 무너지는 게 아닌가.
조금만 늦었다면, 건물 잔해에 깔렸을 아찔한 순간이었다.
"다치지는 않으셨어요?"
"괜찮다."
"그나저나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루시아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아무리 막강한 인지 능력과 감각을 지닌 유진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전시영은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짐작 가는 놈들이 있긴 해."
"그게 누군데요?"
"미국이나 러시아겠지. 오늘 우리가 좀 크게 일을 벌였거든. 아마 독이 바짝 올랐을 거야."
루시아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전시영을 바라보았다.
"아니, 추격자들을 달고 집으로 곧장 왔단 말이에요?"
"나라고 쟤들이 날 미행해서 암살하려들 줄 알았겠어? 그것도 한국의 S급 헌터를 한국에서 말이야."
"확실히 간땡이가 배 밖으로 나온 짓거리이기는 하죠."
"게다가 나도 쟤들이 어디 소속인지 몰라.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겠지."
전시영의 말에 블라드 유진은 동의한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보지."
세 사람이 무너진 담벼락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자, 레니와 녹턴도 그 뒤를 따랐다.
―와! 불꽃놀잉!
"이히힝!"
―터진다아! 펑! 펑!
레니가 파닥거리며 무너진 담벼락을 밟을 때마다, 녹턴도 리듬에 맞춰서 앞으로 갈 듯 말 듯 움직였다.
어차피 그의 그림자 속에 숨어다니는 녀석들이라 그런지, 집이 박살 나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잠시 멈춰선 루시아는 그런 레니를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이내 시선을 거두고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벌써 전시영과 유진이 저만치 멀리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날 암살하러 온 놈들이라면, 반드시 시체를 확인하려 들 거야. 아마 그리 멀리 있지는 않을 테지."
"그렇다면 여기서부터는 흩어지는 게 좋겠네요."
저택 귀퉁이의 갈림길에 서자, 전시영과 루시아는 각자 좌우로 갈라져 움직였다.
그는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레니와 놀고 있던 녹턴을 불렀다.
"녹턴."
"이히히힝!"
"우린 위에서 지켜보자."
노는 게 중단되어 왠지 싫은 기색이었지만, 블라드 유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유령 군마 위에 올라탔다.
두두두두두!
레니를 자신의 앞에 앉힌 그는 허공으로 빠르게 치솟아 올라 집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수상한 움직임은 없었다.
이 정도로 강력한 공격을 퍼부었다면, 자신 있게 나설 만도 한 전력일 텐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 집 북쪽의 작은 언덕 근처에서 웬 소란이 이는 게 아닌가.
오른쪽 길을 택했던 전시영이 이동한 방향이었다.
콰과과광!
초열지옥 스킬을 쓰는 모양인지, 난데없이 샛노란 폭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저기로군."
두두두두두!
초토화된 건물을 지나서 날아가자, 일단의 무리와 대치하는 중인 붉은 머리의 여인이 보였다.
아무래도 저들이 이 사태를 일으킨 원흉인 듯했다.
"어이! 여기야! 이놈들이라고!"
블라드 유진을 발견한 전시영은 반가운 표정으로 팔을 크게 흔들었다.
수십 명의 헌터들을 혼자 제압하는 건 힘들 수밖에 없었다.
척! 척!
녹턴의 등에서 내려 걸어가던 그는 시뻘건 두 자루의 소수혈인을 양손에 나눠 쥐고 있었다.
어느새 그런 유진의 곁에는 루시아가 따라붙은 상태였다.
소란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달려온 것이다.
"저도 도울까요?"
"아니, 혼자서도 충분해."
"그래도 제압하려면, 손이 하나라도 더 있는 게 나을 텐데요."
그녀가 말을 걸자, 그는 잠깐 걸음을 멈추더니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말할 입은 하나면 족해."
그 말을 남긴 블라드 유진은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홀연히 앞으로 나섰다.
"어어? 자, 잠깐! 저 사람 블라드 유진 아니야? 그 옆에는 루시아 헤레라 레예스고."
"아니, 저 사람들이 왜 여기서 나와?"
"둘 다 스페인에 있는 거 아니었나? 거기서 복구 작업을 이어 간다고 들었는데."
헌터들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른 채, 갑자기 나타난 유진과 루시아를 보고 신기해했다.
아직 두 사람이 입국한 줄 몰라서 저런 말이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그가 이쪽으로 다가오자, 그들은 되레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앞으로 본인들에게 닥칠 운명을 전혀 예상하지도 못하고 말이다.
"이쪽으로 오시면 안 됩니다. 괜히 전투에 휘말리실 수도……."
"이미 휘말리게 한 거 아닌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저희는 당신에게 적대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만."
가장 레벨이 높아 보이는 헌터는 결백하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서늘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은 풀릴 줄을 몰랐다.
"하나 묻지. 누군가가 집을 폭파하고 불에 태우면, 넌 어떻게 할 건가."
"그야 당연히 뛰쳐나가서 범인을 땅바닥에 메다꽂겠죠. 헌터에게는 총보다 더 확실한 제압 방법이 아닐 수……."
"정답이로군."
"예?"
스팟―! 푸우욱!
암흑화를 시전하며 엄청난 속도로 움직인 블라드 유진은 대답한 미국 헌터의 코앞에 불쑥 나타났다.
어느새 피처럼 붉은빛을 내뿜던 소수혈인은 상대의 복부를 관통하고 있었다.
콰직―!
"끄으으!"
그는 핏빛 칼날을 우악스럽게 옆으로 돌린 다음, 그자를 높이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었다.
쿠우웅!
그러고는 스산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오늘은 미국식 대응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전시영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냉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 *
현재 DK는 흑룡과 함께 진 헌터 연합체를 이끄는 중이었다.
합류한 지 이제 고작 두 달가량 되었으나, 그들의 세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조직을 포섭하고 관리하는 건 흑룡이 맡았고, 새로운 수익 구조를 창출해 내는 건 DK의 몫이었다.
덕분에 진 헌터 연합체는 대한민국 최대의 조직으로 발돋움한 상태였다.
원래라면 카르텔을 설계한 직후에는 국가 전복이나 전쟁을 일으켜야 정상이지만, DK는 움직이지 않았다.
혈성쇄혼술에 의하여 하수인이 되었기에, 그저 조직의 확장과 유지 관리 등에만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던 진 헌터 연합체에도 조금씩 문제가 발생하는 중이었다.
"이봐 DK. 요즘 수익이 줄어드는 것 같은데, 뭐 좀 짚이는 거 없나?"
"아무래도 냉전 때문인 것 같군.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니까, 헌터들이 서울로 몰려가고 있어."
"사냥 빈도 자체가 감소한 게 영향이었나?"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이거 원……. 미국과 러시아 놈들을 정리해 버릴 수도 없고 큰일이군."
"일단은 기다려 봐야지. 마스터께서도 아직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니까."
흑룡은 DK의 말에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가에 불을 붙였다.
이 괴상한 영국 놈의 권유로 피우게 되었지만, 최근에는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마치 영화에 나오는 마피아의 두목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후우우!
입에 머금었던 연기를 뿜어내자, 짙은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이제야 제대로 즐기는군. 천박하게 빨지 말고, 천천히 들이켜라고."
"어휴! 이 자식 이거 말하는 거 하고는."
흑룡은 문신이 가득한 팔을 위협적으로 꿈틀거렸지만, DK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PVP에 특화된 비인가 헌터라고는 하지만, 상식적으로 한 등급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 새로 생긴 경계 지역 시장이 있다던데, 거긴 어떻게 되었지?"
"아직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것 같더군. 사천파 눈치 볼 필요도 없이 그냥 들어가면 될 듯해. 이미 애들 보내 놨어."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는군."
DK는 전무후무한 카르텔 설계자라 온갖 비인가 헌터들을 봐 왔다.
하지만 흑룡처럼 일 잘하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레벨은 자신보다 낮았지만, 업무 추진력에 있어서는 DK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흑룡 정진수의 과업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타다다닷! 터엉!
"회, 회장님!"
조직원 하나가 헐레벌떡 사무실로 뛰어 들어오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평소에 사무실에서는 최대한 여유 있게 행동하라고 교육해 두었기에, 흑룡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보스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조직원은 곧장 본인의 잘못을 깨달았다.
그러나 사죄보다는 정보 전달이 먼저였다.
"징계는 나중에 받겠습니다. 부산에 정체불명의 패거리가 침입해 들어와 사업장을 공격하는 중입니다."
"뭐?"
흑룡은 조금 전보다 인상을 더욱 구겼지만, 조직원을 질책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이다.
DK와 함께 피우던 시가는 재떨이에 던져 버린 지 오래였다.
반쯤 남은 더블 마두로의 래퍼(Wrapper)가 하염없이 타들어 갔다.
"부산 어디?"
"그게……. 모든 업장입니다."
"네 군데 전부 말이냐?"
"예."
"대체 어떤 놈들이지? 일단 출발하자. 애들 다 불러라."
"오면서 이미 전화 다 돌려놨습니다."
"잘했다."
흑룡 정진수는 DK를 내버려 두고 황급히 조직 사무실을 나섰다.
부우우웅!
차를 타고 미친 듯이 달려 금정구 경계 지역 시장에 도착하자, 개판 오 분 전의 사업장이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방어구를 걸친 그들은 큼직한 덩치를 바탕으로 흑룡파 조직원들을 마구 때려눕히고 있었다.
이런 일을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듯, 움직이는 게 상당히 조직적이었다.
차에서 내린 흑룡은 미간을 좁히며 헤드기어를 깊게 눌러썼다.
아무래도 저놈들과 오늘 제대로 한판 벌여야 할 것 같았다.
타다다닥!
"준비 끝났습니다. 회장님."
"그래. 자, 드가자."
"예!"
척! 척! 척!
흑룡이 마치 어슬렁거리는 호랑이처럼 선두에서 걸어가자, 조직원들은 각자 무기를 챙겨 들고 그 뒤를 따랐다.
검붉은 방어구를 걸친 수십 명의 흑룡파 조직원들은 흡사 전장을 향해 담담히 걸어가는 흑기사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흑룡은 시장에 파견된 조직원들을 때려눕히던 비인가 헌터들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 저 양키 새끼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