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한국에서 벌어진 미국과 러시아의 대결은 점점 치열해지고 있었다.
현대 무기를 사용한 국가 간의 전면전은 전혀 없었지만, 헌터 전력의 충돌은 가히 전쟁을 방불케 했다.
그런 혼란의 와중에 전시영은 러시아 대사관에 숨어 있던 대사, 안톤 니코노비치 이반을 구해 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을 맡았던 한국 헌터들은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러시아 협회 지부를 수비하던 리브라 길드원들은 조직적인 공격에 큰 피해를 보고 말았다.
당연히 냉전에 대비하여 파견되었던 러시아의 헌터들도 화를 면할 수는 없었다.
심각한 타격을 입은 러시아 측은 곧장 미국의 협회 지부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쯤 되자, 한국에서도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지금부터 냉전 관련 긴급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시급한 상황이니만큼, 자잘한 절차는 생략하도록 하죠."
미궁 전략부장 조지훈은 총대를 메고 회의를 주도하는 중이었다.
블라드 유진의 앞에서 보였던 어정쩡한 태도는 이 자리에선 일절 찾아볼 수가 없었다.
평소 일할 때의 이지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온 상태였다.
조지훈의 말에 좌중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럽시다."
긴급회의라 중진이 다 모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진화를 비롯한 유력 길드 마스터들은 대부분 참석한 상태였다.
조지훈은 곧장 길드 마스터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각 길드의 참전 투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중지를 모아 본 결과, 8 대 2로 찬성 측이 우세했습니다."
"그럼 길드 의견은 참전 확정이로군요."
"네, 정부와 협회 의견은 어떻습니까?"
기브르 길드 마스터인 이진화가 묻자, 조지훈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상부의 의견이 엇갈리는 모양이었다.
"전면적인 공격은 불가할 것 같습니다."
"하긴 정부 입장에서 대놓고 치라는 말은 하지 못할 테죠."
"하지만 반격은 가능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먼저 공격받는 상황을 만들면 되죠."
"지난번처럼 주요 거점을 지키다가 당하란 말입니까?"
"피해가 있는 건 자명한 일이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후……."
조지훈의 답변에 길드 마스터들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 불합리에 제대로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약소국의 비애가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손을 아예 놓을 수는 없었다.
"명분이야 만들면 되는 거죠. 그나저나 A. N. 이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 전시영 랭커께서 구해 낸 러시아의 대사가 있었군요. 그분을 이용하는 게 어떻습니까?"
대사의 암살을 막고 안전하게 돌려보내 주는 대가로 국내에서 적대 행위를 멈춰 달라는 요구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한국이 딱 좋은 무대기에 양국이 저러는 거지만, 찾고자 하면 전쟁터가 될 만한 땅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의견에 초를 치는 한 마디가 어딘가에서 흘러나왔다.
"그 사람 벌써 러시아에서 데려갔어."
회의실 뒤쪽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전시영이 한 말이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좌중은 전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수중에 들어온 귀한 협상 카드를 홀랑 넘겨줘 버린 처사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다들 왜 날 봐? 내가 보냈어?"
길드 마스터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전시영은 눈에 불을 켜며 으르렁거렸다.
그녀도 보내고 싶어서 이반을 내준 게 아니었으니까.
상황 설명은 조지훈 부장이 대신해 주었다.
"재외 공관을 방어하는 건 적법했지만, 타국의 대사를 억류하는 건 국제법상 용납되지 않는 일입니다. 놓아줄 수밖에 없었죠."
"남의 나라에서 전쟁을 벌이는 건 용납되는 일이고?"
"그건 아닙니다만……."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으나, 조지훈으로서도 억울한 부분은 있었다.
미궁 전략부장은 헌터 협회 측의 직원일 뿐이라, 정부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게다가 한국의 협회는 절반 이상이 정부 지원으로 운영되지 않았던가.
그냥 놓아주라는 명령을 무시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우리가 지킬 주요 거점을 선정하는 것이 중요하겠군요."
"저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니, 선택을 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소극적 반격이라도 하려면, 전투가 벌어질 만한 곳에 미리 투입되어야만 했다.
엉뚱한 곳에 대기하고 있다간 경비 업무를 하는 의미가 없을 테니까.
게다가 미, 러 양국이 한국 헌터들을 보고 피할 가능성도 상정해 둬야만 했다.
"여기가 좋겠습니다."
"아뇨. 거긴 대놓고 기브르 길드 근처가 아닙니까? 아예 길드 건물을 지켜 달라고 하시죠."
"크흠! 전투가 벌어질 확률이 높은 곳을 지목했을 뿐입니다만."
"거기보다 여기가 더 가능성이 큽니다."
회의에 참석한 길드 마스터들은 위치 선정을 두고 갑론을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론은 쉬이 나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 전투가 벌어질 줄 알고 예측한단 말인가.
그것도 냉전 당사자들이 뻔히 보고 있는 마당에.
"뭘 그렇게 머리 싸매고 있어? 답은 간단하지."
지지부진한 회의가 이어지자, 전시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자 좌중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확 쏠렸다.
"뭔가 묘수라도 있습니까?"
"묘수는 무슨. 우리도 뻔뻔하게 나가면 돼. 그냥 따라오기나 하라고."
전시영이 바깥으로 나가자, 길드 마스터들은 서로를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따라서 나가려는 사람은 없었다.
미치광이 방화광이라는 별명이 있는 사람을 어떻게 믿고 간단 말인가.
"어차피 답도 없잖아? 시간 없으니, 얼른 나가기나 해."
안지홍이 자리를 털고 일어선 뒤에야 긴급회의는 종료되었다.
"가시죠."
이윽고 한국 헌터들은 전시영의 의견에 따라서 현장에 집결해야만 했다.
의외로 그녀의 작전이 꽤 일리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진짜 이래도 되는 겁니까?"
"난들 아냐? 위에서 시키니까 하는 거지."
한국 헌터들은 미국과 러시아의 임시 협회 지부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아예 건물 자체를 에워싼 다음, 밖으로 이동하는 헌터들을 대놓고 주시했다.
그러다 뭔가 미묘한 움직임이 보이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짝 붙어서 따라다니는 모습을 보였다.
밖으로 나와서는 애초에 아무것도 못 하도록 밀착 감시에 들어간 것이다.
당연히 미국과 러시아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작전을 실행하는 한국 헌터들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하지만 전투 억제 효과 하나만큼은 제대로였다.
양국은 이렇다 할 움직임도 보이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한국 헌터들을 달고 상대 진영을 치러 갔다간 들키는 게 당연했으니까.
뻔한 작전을 실행할 수는 없어서, 자연스럽게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한국 헌터들의 밀착 마크에도 불구하고 사고는 터질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전투를 위해서 입국한 놈들인 만큼, 이는 미리 예견된 결과였다.
"아, 그만 좀 따라와라! 이 노란 원숭이 새끼들아!"
"뭐? 시대가 어느 시댄데, 인종 차별 발언이야?"
"다 꺼져! Cyka Blyat!"
참을성이 부족했던 러시아 상남자들이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따라붙는 한국 헌터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그러자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전시영은 옳다구나 하고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걸려들었네. 이게 바로 K―소극적 반격이다. 이놈들아! 초열지옥 십지폭쇄(十指爆鎖)!"
삐이이! 쿠콰콰콰콰콰쾅!
고주파 음이 들리기 무섭게 그녀의 손을 떠난 노란색 구체가 러시아 헌터들 사이에서 우수수 대폭발을 일으켰다.
그러자 평화롭던 도시가 순식간에 전장으로 뒤바뀌었다.
"으아아! 한국 놈들이 공격을 가했다! 다 죽여!"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너희들이 먼저 쳤거든?"
본격적으로 전투에 돌입하자, 중간에 미국 헌터들도 끼어들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전투의 양상이 삼파전으로 흘러가게 된 것이다.
미국은 처음에 러시아 헌터들만 치려 했으나, 혼란한 와중에 선별적으로 공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싸우다 보면, 한국 헌터들과의 충돌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동안 맹렬하게 이어지던 삼파전은 저녁이 되어서야 소강상태가 되었다.
아니, 냉전 중인 두 국가가 의외의 결과에 깜짝 놀라 알아서 물러섰다는 게 정답이었다.
난데없이 시작된 전투로 인한 피해가 점점 커졌기에, 일단 한발 후퇴한 것이다.
"오! 이게 뭐야? 네 작전이 이렇게 잘 먹힐 줄은 몰랐는데?"
"작전이랄 게 뭐 있나."
안지홍과 전시영은 저녁이 되어서야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주로 미국 헌터들을 맡았던 안지홍은 조나단 잭슨과 그저 대치만 하다가 돌아온 참이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했던 그녀는 피로에 찌든 모습이었다.
레프 미하일로비치 알렉세이를 견제하면서 싸우다 보니, 작은 실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전시영은 스킬 몇 방을 허용하고 말았다.
특히 이곳저곳에 역풍을 마구 쏘아붙였던 터라, 미국 헌터들도 그녀를 곱게 보지 않았다.
"양쪽에 괜히 미움만 샀네."
"하하! 여긴 이제 내가 맡을 테니, 들어가서 좀 쉬어."
"그래. 이 정도 해 줬으면, 내일 아침에 합류해도 되겠지. 수고해. 아저씨."
뒷일을 안지홍에게 맡긴 전시영은 협회 주차장에 세워 둔 차량을 향해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냉전이라는 이상한 싸움에 나라가 휘말려 들어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텅! 부우웅!
운전대를 잡은 그녀가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어둠 속에서 가만히 서 있던 자동차에서 문득 불빛이 들어왔다.
우우웅!
다섯 대나 되는 의문의 검은 차량은 전시영을 따라서 은밀하게 이동했다.
* * *
철컥! 띠디딕!
"다녀왔습니다아―."
집에 돌아온 전시영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신발을 벗었다.
그러자 거실 소파에 길게 누워 무선 헤드셋을 쓰고 있던 블라드 유진이 슬쩍 눈을 떴다.
♬ ♪ ♩―
그런 그의 귓가에는 다양한 종류의 음악이 연속으로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이제는 제 집처럼 드나드는군."
"어맛! 너무 편해서 우리 집인 줄 알았잖아?"
유진의 핀잔에 전시영은 입을 가리며 어색한 발연기로 당황한 척을 했다.
"너무 편해서 그렇게 더러운 꼴로 돌아다니는 건가."
그는 산발이 된 전시영의 붉은 머리와 방어구에 잔뜩 묻은 먼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진심으로 당황하며 양손을 펼쳐 보였다.
"야, 이건……. 치, 치열하게 싸우다 왔잖아. 아마 지금쯤 뉴스에도 나올걸?"
"그래? 그 냉전인지 뭔지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모양이지?"
"어휴! 말도 마. 피곤해 죽겠으니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좀 씻어야겠어."
전시영은 2층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자연스럽게 방어구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저러다 샤워 부스로 들어가기 전에 옷을 다 벗어 버릴 기세였다.
한데, 문득 들려온 블라드 유진의 말에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불청객이 있군."
"응?"
그의 목소리를 들은 전시영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거실 전면의 통유리 너머로 시뻘건 구체가 솟아올랐다가 이쪽으로 떨어져 내리는 게 보였다.
가만히 눈만 깜빡이던 그녀는 이내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