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78화 (79/226)

3화

블라드 유진은 가만히 서 있는 미궁 전략부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 더 할 말 있나?"

"아, 아닙니다. 아니, 있긴 합니다."

"해 봐."

"일전에 말씀드렸던 냉전에 관련된 일입니다. 아무래도 조금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조심?"

그가 마치 심연과도 같은 눈빛을 한 채 되묻자, 조지훈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왠지 유진의 심기를 거스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유념 정도가 적절한 표현일 것 같군요."

"계속해."

"옙."

미궁 전략부장은 등줄기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브리핑을 이어 갔다.

냉전의 개요는 간단했다.

홍콩의 탑에서 촉발된 미국과 러시아의 갈등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게 한국 헌터 협회와 무슨 상관이지?"

"시작은 미국의 헌터 협회 지부가 공격당하는 거였습니다."

미궁 사태로부터 살아남은 국가들은 나름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중국의 요청을 바티칸 시국이 받아들이는 등, 상당히 희한한 광경이 종종 펼쳐지기도 했다.

경제 형태에 따른 고전적인 진영 논리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세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리고르 아스페라에서부터 시작된 미국과 러시아의 미묘한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고 말았다.

"10년 전, S급 헌터를 잃은 보상 문제로 인해 촉발된……."

"잡설은 집어치워. 그래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저들이 전쟁터를 대한민국으로 택한 것 같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의도한 바가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만, 양측 모두 헌터 전력을 서울로 집중시키는 실정입니다. 특히 미국은 반대편 진영에 한 방 크게 먹여 주려는 모양이더군요."

"그러니까 여파에 휘말릴 수도 있다?"

"거리가 꽤 있어서 그럴 가능성은 작습니다. 하나, 미리 알려 드리긴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래. 그건 그렇고 내 땅은 어떻게 되었나."

"토지는 따로 선별 중입니다. 후보지를 뽑아 놓고 여쭈어볼 작정이었습니다. 한데, 일을 너무 빨리 마무리하셔서 아직……."

"내 영지가 준비되면, 그때 다시 오도록."

"예."

조지훈은 블라드 유진을 향해서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뒤, 뒷걸음질로 총총 테라스를 떠났다.

배웅 차 아크웰이 따라 나오자, 전략부장은 조심스럽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유진 님께서 토지를 영지라 칭하시던데, 혹시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어……. 그게 좀 옛날 분이라서요. 하하. 하."

아크웰 페리티노는 유진의 정체를 떠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 * *

조지훈이 찾아온 다음 날, 전시영은 안지홍과 함께 러시아 대사관 입구를 서성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보란 듯이 무기와 방어구를 걸치고 대사관 주변을 왔다 갔다 했다.

"아, 귀찮게. 뭐 이런 거로 사람을 오라 가라야?"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진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서울 한복판에서 전쟁이 터질 수도 있어."

전시영이 어깨까지 자란 붉은 머리칼을 긁적이며 투덜대자, 안지홍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그녀를 달래려고 설명하다 보니, 심각한 내용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미친놈들이네. 남의 땅에서 그게 뭐 하는 짓거리래?"

"그러게나 말이다."

"아저씨네 애들은 어디 있어?"

"러시아 협회 지부 근처에서 대기 중이야. 우리 길드 사람이 근처에 있으면, 공격하기 꺼려질 테니까."

"리브라 길드건 뭐건 신경 안 쓸 것 같은데……."

"설마 그러겠어? 그래도 한국 1위 길드잖아."

"남의 나라 협회도 폭파하는 놈들인데 뭐."

"그건 또 그러네."

전시영과 안지홍은 러시아 대사관 근처에서 동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가끔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기는 했으나, 아직 미국 측의 공격은 없었다.

이제는 유명무실해졌다고는 해도 같은 자유주의 진영의 동맹국이 아니었던가.

"흐아암!"

전시영은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해 댔다.

러시아 대사관에서 죽치고 있은 지 벌써 열 시간이 넘은 상태.

체력적으로 지치는 건 없었지만, 죽을 만큼 지루하다는 게 문제였다.

차라리 블라드 유진의 집에서 루시아와 아웅다웅하는 게 훨씬 재밌을 것 같았다.

한데, 문득 어디선가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픠이이이잉!

"음? 이게 무슨 소리?"

"그러게. 이 근처는 아닌 것 같은데……. 어?"

안지홍이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저 멀리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음과 동시에 굉음이 터져 나왔다.

쿠화아아앙!

"저긴!"

"러시아 협회 지부 방향이야."

"내가 갈 테니, 넌 여기 지키고 있어!"

"예이. 예이. 그럽죠."

타다다닷! 부아아앙!

대사관 입구에 세워 둔 바이크를 탄 안지홍은 폭발을 향해서 엄청난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밤이라 어차피 차량도 별로 없었으니, 속도를 거침없이 올릴 수 있었다.

안지홍이 점처럼 멀어지자, 전시영은 기지개를 켜며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는 불길을 쳐다보았다.

"뭘 썼길래 폭발이 저렇게 커? 최소한 십지폭쇄는 써야 저 정도쯤 되겠는데?"

그녀는 러시아 협회 지부 쪽에서 솟구친 화염을 보며 자신의 스킬과 은근히 비교해 보았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느낌에 긴장감을 끌어 올리는데, 문득 그런 전시영의 앞에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

정체불명의 인물은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며 그녀를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왔다.

"어? 당신은?"

그자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에 챙이 넓은 소가죽 페도라를 쓰고 있었다.

로데오 바지와 술이 달린 승마 부츠는 없었지만, 현대판의 멀끔한 카우보이 같은 복장이었다.

스윽! 척!

"오랜만이군."

러시아 대사관 정문에 나타난 거구의 흑인은 조나단 잭슨이었다.

상대는 페도라를 고쳐 쓰며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변을 휙휙 둘러보던 전시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두 달쯤 됐나? 여긴 어쩐 일이지?"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나 보군. 정보 전달이 느린 편이네."

"아니, 얼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듣긴 했는데 말이야. 그래도 예의상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당신은 이 싸움과 관련 없으니, 물러서는 게 좋을 거다."

마치 분명한 목적을 지닌 듯한 상대의 말에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 좋아. 당신들이 제2의 냉전이네 뭐네 하면서 싸우는 거? 난 진짜 조금도 관심 없어. 한국 헌터 협회도 똑같이 생각할걸?"

"그럼 비켜라."

"……그게 뭔 헛소리야? 너희들끼리 지지고 볶든 부비부비를 하든 알 바 아닌데, 왜 우리나라에서 난리냐고!"

전시영의 외침에 조나단 잭슨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양손을 좌우로 펼쳐 보였다.

"난 러시아 대사관을 공격하려는 거라고. 저긴 너희 영토도 아니잖아."

국제법상으로 재외 공관은 본국의 영토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대사관을 상주시키는 나라는 재외 공관 침입, 파괴 등의 상황에서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하는 특별 의무가 있었다.

이를테면 전시영이 조나단을 막는 것 또한 바로 그 적절한 조치에 해당했다.

"궤변은 그만두시지."

"안타깝군."

스윽!

조나단 잭슨은 담담한 표정으로 등 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저자는 그녀를 쓰러뜨리고 기어이 러시아 대사관을 박살 내려는 모양이었다.

"에라이. 이제 나도 몰라. 과거의 동료고 뭐고 그냥 명령받은 대로 한다?"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너 같으면 다른 나라 헌터가 뉴욕에서 설쳐도 가만히 있겠냐?"

"아니, 그럴 리 없지."

"그런데 뭐가 안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야?"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거다."

쉬이이익!

조나단은 큼직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매우 은밀하고 민첩하게 움직였다.

정면으로 달려오는 것 같은데, 발소리는커녕 미세한 풍절음만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황금빛 눈동자는 마치 사냥에 돌입한 검은 재규어를 연상케 했다.

슈카아앙!

"으읍!"

어디선가에서 날아든 시퍼런 섬광에 전시영은 깜짝 놀라며 뒤로 몸을 피했다.

순간적으로 공중제비를 돌지 않았다면, 두 다리가 그대로 끊어져 버렸을 터였다.

섬광이 훑고 지나간 아스팔트 바닥에는 어느새 깊은 상흔이 새겨져 있었으니까.

휘리리릭! 척!

"흠. 감이 좋군."

정면으로 달려오며 시선을 빼앗았던 조나단 잭슨은 되돌아온 푸른 무언가를 가볍게 받아들었다.

챠라랑!

그자의 손에는 은은한 청색 빛이 감도는 큼지막한 차크람이 들려 있었다.

일반적으로 차크람은 지름 10~30㎝의 링 모양이고, 무게는 0.5kg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조나단의 손에 들린 것은 지름이 1m는 넘을 듯한 크기에, 무게도 상당해 보였다.

원래 소모성 투척 무기이지만, 조나단의 차크람은 회수 기능까지 있는 듯했다.

"와! 함께 역경을 헤쳐 온 전우끼리 이럴 거야? 진짜?"

"미안하지만, 명령이라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그대와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군."

"아, 그럼 대사관 공격했다 치고 그냥 돌아가!"

"그럴 수는 없지. 목표가 저 안에 숨어 있는데 말이야."

스슥! 쉬이이익!

조나단 잭슨의 손이 어둠 속을 파고들자, 기이한 소리와 함께 재차 시퍼런 섬광이 날아들었다.

"젠장!"

차크람이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각도로 꺾이며 쇄도했기에, 대처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피하자니 마지막까지 꺾이며 따라올 것 같고, 막자니 저 무지막지한 위력이 부담스러웠다.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의 두광(頭光)."

츠츠츠츠츠!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유일한 방어 스킬을 발동하여 차크람을 막아 냈다.

전시영의 몸에서 거대한 황금빛 원이 터져 나오자, 차크람은 힘없이 튕겨 나가고 말았다.

쩌어어어엉! 휘리리릭! 척!

이상한 곳으로 날아가던 차크람은 이내 조나단의 손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흠. 역시 단순한 방법으로는 안 된다 이건가. 어쩔 수 없군."

"와! 이게 진짜 날 죽이려 하네. 나도 어쩔 수 없다."

나라연금강의 두광 스킬을 발동한 전시영은 황금빛 구체 속에서 이를 뿌득 갈았다.

상대가 진심임을 확인한 이상, 이쪽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초열지옥(焦熱地獄) 연쇄역풍(連鎖逆風)!"

"크라이시스 서클(Crisis Circle)."

삐이이―! 삐이이―!

쉬익! 쉬이익! 쉬이이익!

그녀의 손에서 다섯 개의 노란 구체가 생성되는 순간, 조나단은 거대한 차크람을 한 번에 세 개나 날려 보냈다.

스핏―! 쿠콰콰콰쾅! 쩌저정!

발출된 스킬은 아무런 간섭 없이 그대로 서로에게 작렬했다.

공간을 꿰뚫고 사라졌던 연쇄역풍은 조나단 잭슨의 근처에서 터졌고, 세 개의 차크람은 전시영에게로 날아들었다.

다행히 나라연금강의 두광 스킬의 효과가 남아 있어, 그녀는 차크람을 대부분 튕겨 낼 수 있었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전신을 보호하던 황금빛 구체가 박살 나고 말았지만.

"커헉!"

한데, 마지막 차크람이 나라연금강의 두광을 뚫고 들어와 타격을 입힌 탓에 전시영은 신음을 내뱉었다.

손에 낀 장갑의 방어력으로 어찌어찌 막아 내기는 했으나, 바닥을 나뒹구는 것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낙법을 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인상을 쓰며 입술을 닦았다.

"퉤!"

입 속에 고인 액체를 뱉어 보니, 시뻘건 혈액이 대부분이었다.

전신을 강타한 충격에 입 안이 찢어진 모양이었다.

"……처참하군."

고개를 들어 자신이 만든 참상을 목격한 전시영은 얼굴을 와락 찌푸리고 말았다.

연쇄역풍이 터진 도롯가는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스킬의 위력에 도시가스 관이 휘말려 평소보다 더욱 큰 폭발로 이어졌다.

안전장치 덕분에 여파가 멀리 번지지는 않았으나, 그녀는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최대한 스킬의 범위를 허공으로 조정했는데도 가스관이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조나단은 어디 갔지?"

연쇄역풍은 한 번에 다섯 개의 폭발 구체를 생성하는 기술.

제아무리 방어력이 높은 S급 헌터라고 해도 그 대폭발 속에서 살아남기는 어려울 터였다.

물론 그건 정통으로 맞혔을 경우지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속을 세심하게 살피던 전시영은 문득 시커먼 인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체구로 보아하니, 조나단 잭슨이 분명했다.

연기 속에서 빠져나온 그자는 어둠에 녹아들며 엄청난 속도로 높은 담장을 뛰어넘었다.

"어엇!"

시야가 가려져 그녀가 찾지 못하는 사이, 전광석화처럼 러시아 대사관으로 뛰어든 것이다.

전시영은 잽싸게 발을 놀려 그자를 따라 공관 내부로 달려갔다.

타다다닷!

"어디지? 어디야?"

폭발에 휘말려 부서진 창문을 타 넘은 그녀는 복도에 멈춰서서 좌우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전시영은 일단 대사관 안쪽 깊숙이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분명 러시아 대사관에 목표가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사람이 목적인 것 같은데……."

초조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녀는 조나단 잭슨의 의도를 떠올리며 침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굳이 S급 헌터를 동원해서 대사관을 친 이유는 암살 혹은 납치의 목적일 가능성이 컸다.

그저 건물만 부수는 거라면, 헌터가 아니라 폭약을 쓰는 게 훨씬 쉬울 테니까.

게다가 헌터를 파견하더라도 전시영처럼 폭발과 관련된 스킬을 익힌 딜러를 보냈을 터였다.

척! 처적!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다.

가만히 숨죽인 채 귀를 기울이자, 이윽고 억눌린 신음이 들려왔다.

"으윽!"

"죽든 살든, 넌 나와 함께 간다."

아무래도 조나단 잭슨이 목표를 확보한 모양이었다.

전시영은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휙 가리켰다.

"초열지옥 역풍(逆風)!"

삐이이―! 콰아아앙!

대폭발이 벽을 꿰뚫자, 트렌치코트를 입은 흑인이 저 멀리 튕겨 나가는 게 눈에 확 들어왔다.

감각적으로 날린 역풍이었으나, 가장 적절한 위치에서 터진 모양이었다.

벽의 뚫린 구멍으로 몸을 불쑥 집어넣으니, 겁에 질린 표정의 왜소한 남자가 벌벌 떨고 있었다.

"죽기 싫으면, 뛰어!"

남자의 어깨를 붙잡고 일으켜 세운 그녀는 왔던 길을 미친 듯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자의 목숨을 지키면서 조나단과 싸워 이길 자신은 없었으니까.

일단 지금은 이곳에서 벗어나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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