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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77화 (78/226)

2화

DK는 놀라운 스킬 시너지로 블라드 유진의 육신에 깊은 상처를 냈다.

하지만 한 칼 먹인 이후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가 수많은 분신 틈에 숨은 녀석의 위치를 매우 정확하게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DK는 사방 천지가 시뻘겋게 물든 용암 지대의 한가운데에서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이미 주변은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용암으로 가득 들어찬 상태.

놈이 서 있는 한 평 남짓한 공간만 용암이 아닌 멀쩡한 땅이었다.

도움닫기 없이 수십 미터를 도약할 수 있다고 해 봤자, 거기도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용암 지대일 뿐.

탈출할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허!"

DK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서 있자, 이윽고 하늘에서 누군가가 스르륵 내려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녹턴에 탑승한 블라드 유진이 무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항복……. 항복입니다."

녀석은 더 이상 싸워 봐야 그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양손을 번쩍 들었다.

완벽한 항복 의사를 표시했지만, 유진은 아무런 말도 없이 DK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어느새 그의 눈은 시뻘건 색으로 번들거리는 중이었다.

[‘정체불명의 S급 헌터’가 혈성쇄혼술에 저항합니다.]

[하수인 생성에 실패했습니다.]

‘역시 안되나.’

전투를 포기했으나, 여전히 녀석에게 혈성쇄혼술은 먹히지 않았다.

그저 항복하는 것만으로는 정신을 지배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단 한 가지뿐.

원래 하려 했던 일을 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 말고 건강한 정신력을 지닌 자신을 원망해라."

"예?"

스윽! 철컥!

블라드 유진은 악염도를 들어 올리더니, 칼등이 앞으로 오도록 고쳐 잡았다.

그러고는 녹턴의 고도를 급격히 낮추며 냅다 악염도를 찍어 내렸다.

후우웅!

"으, 으악! 항복했잖습니까? 근데 대체 왜……!"

DK는 섬의 가장자리로 이동하며 가까스로 공격을 피해 냈다.

하지만 좁디좁은 용암 중간의 섬에서 언제까지 회피할 수는 없었다.

후우우웅!

악염도가 횡으로 휘둘러지자, 녀석은 체념한 표정을 지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에는 도무지 피하지 못할 공격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퍽!

"크엑!"

칼등에 후두부를 얻어맞았지만, DK는 기절하지 않았다.

그저 양손으로 뒤통수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을 나뒹굴 뿐이었다.

아무래도 인간을 기절시키는 건 처음이라, 힘 조절에 실패한 듯했다.

스윽!

―내가 할까?

문득 블라드 유진의 그림자에서 레니가 고개만 빼꼼 내밀며 말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이럴 필요가 없었군. 혈액이 적어지면 알아서 기절하는 거였잖아."

그는 투명하게 변한 오른손을 뻗어 버둥거리던 DK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츠츠츠츠츠!

"크어억! 안 아픈 방법이 있었으면, 처음부터……."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낀 녀석은 유진을 향해서 항변하려다가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DK를 완벽하게 제압한 그는 재차 혈성쇄혼술을 사용해 보았다.

[S급 혈성쇄혼술을 S급 대상에 시전합니다.]

[대상의 정신 저항이 극도로 약해져 제압 효과를 온전히 발휘합니다.]

[‘S급 비인가 헌터 아마르 코너’의 정신이 완벽하게 제압되어 당신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하수인 슬롯이 가득 찼습니다. 10/10]

눈앞에 떠오르는 홀로그램 글귀를 읽은 블라드 유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무려 S급 헌터의 정신을 제압하여 하수인으로 부리게 되었지만, 그에게는 아주 작은 기쁨에 불과했다.

피의 군주, 뱀파이어 로드인 유진에게 DK는 그저 쓸 만한 하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가자."

"이히힝! 푸르르르!"

널브러진 녀석을 등에 싣자, 녹턴이 불쾌한 듯 투레질을 하며 괜히 허공에 뒷발차기를 날렸다.

DK가 튕겨 나와 얻어맞기를 바라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뒷덜미를 붙잡고 있었기에, 그런 참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두두두두!

이윽고 시커먼 어둠에 휩싸인 유령 군마는 허공을 가로질러 북서쪽으로 쭉쭉 날아가기 시작했다.

* * *

털썩!

"이건 뭐야?"

집으로 돌아와 거실에 DK를 대충 던져 놓자, 주방에서 요거트를 떠먹던 전시영이 다가와 고개를 갸웃했다.

먼지가 잔뜩 묻고 옷차림이 흐트러졌지만, 난데없이 웬 잘생긴 영국 신사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호기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리 잘생겼다고 해 봐야 블라드 유진의 앞에서는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했으니까.

그간 너무 고차원의 미모를 자주 접한 탓에 아무래도 눈만 높아진 모양이었다.

"하수인."

"그게 뭐……. 하인 같은 거야?"

"비슷해."

"별걸 다 주워 왔네."

툭툭!

전시영은 DK를 발로 건드려 보더니, 반응이 없자 입술을 삐쭉이며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유진은 그런 그녀와 거실에 엎어진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하수인이 된 이상,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DK는 알아서 그를 찾아올 터였다.

테라스로 나가서 선베드에 누운 블라드 유진은 곧장 홀로그램창을 켰다.

‘바뀐 게 많군. 저 녀석 덕분인가.’

능력치는 SS급에 오른 직후와 똑같았지만, 스킬 정보창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DK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난 덕분인 것 같았다.

<스킬 정보>

명칭 : 마신강림

등급 : EX        위력 : EX+

지속 시간 : 10초

재사용 대기 시간 : 7일

소모 자원 : 피의 권능

효과 : 지속 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와 이로운 효과가 2배로 적용.

<스킬 정보>

명칭 : 대군주의 역병

등급 : SS        위력 : SS+

범위 : 직경 1km

지속 시간 : 1시간

재사용 대기 시간 : 2시간

소모 자원 : 피의 권능

효과 : 스킬 효과 감소(30%), 체력 감소(30%)

<종합 스킬 정보>

‣ EX급

천계도살검, 마신강림

‣ SS급

흡혈, 혈성쇄혼술, 암흑화, 소수혈인, 권능 폭발, 대군주의 역병

‣ A급

폭사

‣ B급

레이스 트래킹, 천군압쇄

뱀파이어 전용 스킬은 전부 그의 등급과 같은 SS급으로 진화했다.

특별히 도드라지는 변화는 마신강림과 대군주의 역병이었다.

각각 페널티가 줄어들고, 효과가 대폭 상승한 것이다.

전시영에게서 가져온 초열지옥 역풍 또한 S급에 올랐지만, 프리클 플라워를 처치하고 얻은 폭사는 A급에 머물렀다.

아마도 폭사라는 스킬이 가진 한계가 딱 A급인 모양이었다.

‘재밌는 게 생겼네.’

B급 종합 스킬 정보에는 천군압쇄라는 글귀가 생성되어 있었다.

이는 DK의 혈액을 빨아들임으로써 얻은 새로운 기술이었다.

<스킬 정보>

명칭 : 천군압쇄(千軍壓碎)

등급 : B        위력 : B+

지속 시간 : 5분

재사용 대기 시간 : 10분

소모 자원 : 피의 권능

효과 : 분신 생성(10%)

최대 생성량 : 0/20

능력치의 10%에 해당하는 분신을 최대 스무 명까지 생성. 각자 알아서 판단하며 전투를 보조함.

예상했던 대로 천군압쇄는 분신을 생성하는 스킬이었다.

그저 설명만 읽어 보아도 전투를 돕거나 추격을 뿌리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것 같았다.

최근 상당히 강력한 자들의 피를 흡수한 바 있었지만, DK만큼 효용성 좋은 스킬을 차지할 수는 없었다.

죄다 종족 전용 스킬만 보유했거나, 등급이 높아서 흡혈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꽤 좋은 스킬을 얻게 됐지만 블라드 유진은 살짝 불만족스러웠다.

DK가 시전한 천군압쇄는 그야말로 천 명의 분신을 만들어 그 속에 숨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하지만 천군압쇄의 스킬 설명은 어딘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능력치의 10%밖에 안 된다는 건 별 상관없었지만, 분신이 스무 명뿐인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긴 혈성쇄혼술도 S급에서는 하수인을 고작 열 명밖에 거느릴 수 없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등급이 낮아서 그런 모양이로군.’

그러고 보니, 혈성쇄혼술이 SS급으로 오르면서 하수인을 스무 명까지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홀로그램창을 종료했다.

그러자 공교롭게도 바로 그때, 테라스의 미닫이문이 스르륵 열리는 게 아닌가.

"어……. 반갑습니다. 마스터."

"일어났나."

"예."

블라드 유진의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은 자는 DK였다.

녀석은 유들유들하던 평소와 달리,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DK는 피의 권능에 완전히 복속되어 유진에게 극진한 예를 다할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현혹 능력을 지녔더라도 뱀파이어 로드의 지배력에 저항하는 건 불가능했다.

한데, 문득 고개를 든 녀석이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마스터, 대체 절 어떻게 찾으신 겁니까?"

"끝까지 저항하려 하는군."

"그런 게 아니라, 이건 순수한 궁금증 때문에……."

"뭐, 이제는 알려줘도 상관없겠지. 추적 스킬이었다."

블라드 유진은 등허리에 지팡이 검이 쑤셔지는 순간, DK에게 레이스 트래킹을 걸었다.

고작 B급에 불과한 스킬이었지만, 대상을 추적하는 데는 최고의 위력을 발휘했다.

물론 제대로 걸 수만 있다면 말이다.

DK의 분신이 워낙 진짜와 같은 위력을 보였기에, 그로서도 레이스 트래킹을 적중시킬 수 없었다.

그러다가 확실한 기회가 온 것은 한 번 피격당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DK는 어째서 유진이 자신의 공격에 당했는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역시 그때였군요. 일부러 공격에 당해 주셨던 겁니까?"

"잘 아는군."

"예전이었다면 자괴감이 들었겠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군요. 마스터에게 당한 것이니,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다가 녀석은 대뜸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테라스 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가 아크웰을 찾기 시작했다.

그가 의념을 보내서 DK에게 명령을 내린 결과였다.

블라드 유진은 생각만으로도 하수인을 조종할 수 있었다.

물론 너무 거리가 먼 대상에게는 할 수 없지만, 가까울 때는 굳이 명령을 말로 할 필요가 없었다.

혈성쇄혼술의 편리한 기능을 오랜만에 느껴 본 유진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아크웰이 미궁 전략부장 조지훈과 함께 그를 찾아왔다.

"부, 부르셨습니까?"

"왔나? 조지."

"……네."

이제는 포기한 모양인지, 조지훈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블라드 유진은 그런 전략부장을 향해서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DK를 처리했다."

"예?"

그러자 시무룩하던 조지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버, 벌써 말입니까?"

"그래."

"그렇다면 증거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상주시 인근에 가면, 용암 지대가 생성되어 있을 거다. 거기서 찾아보든지."

"설마 죄다 녹여 버렸다는 말씀입니까?"

"먼지가 되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군. 용암을 파 봤자 시체도 안 나올 테니까."

"아……."

미궁 전략부장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그가 DK를 생포했더라면, 한국 헌터 협회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니까.

온전한 시체만 얻더라도 비슷한 효과는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예 가루가 된 시체로는 그 사실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한국 헌터 협회에서 DK를 잡았다고 떠들어 봐야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어차피 너희들은 카르텔 설계자를 한국에서 쫓아내는 게 목적 아니었나?"

"그, 그렇습니다."

"그럼 잘 해결된 거로군."

"그……. 그렇다고 볼 수 있겠군요."

조지훈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협회의 윗선을 설득하려면, 용암 지대의 사진이라도 찍어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잠시 침묵이 찾아오자, 미궁 전략부장은 옆에 서 있던 DK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한데, 처음 뵙는군요. 이분은 누구십니까?"

아크웰도 궁금한 모양인지, 슬쩍 다가와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DK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당사자가 바로 옆에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동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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