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76화 (77/226)

1화

"어, 어떻게……!"

스슥―!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DK의 앞에 서 있던 블라드 유진의 신형이 그제야 모습을 감추었다.

자신과 비슷한 능력을 갖추고 있자, 녀석은 놀란 표정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유진은 상대의 뒤편에 돌아와 소수혈인을 휘두르고 있었다.

쉬이익! 스팟!

그런데 시뻘건 칼날에 양단된 DK의 신형이 재차 사라지는 게 아닌가.

녀석은 분신을 만들어 유진의 앞에 던져 놓고, 잽싸게 뒤로 몸을 날려 공격을 피한 것이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완벽한 대응 때문인지, 이번에도 분신을 베고 말았다.

"대충 감이 잡히는군."

하지만 그는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점점 DK와 분신의 움직임이 눈에 익어 가고 있었으니까.

가까스로 몸을 피한 녀석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방금 그 분신은 뭡니까? 그런 걸 펼쳐 놓고 현혹술사가 아니라고요?"

블라드 유진은 DK와 비슷한 수준의 분신을 만들어 냈지만, 그건 특별한 스킬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허공에 피의 권능을 남겨 두고 엄청난 속도로 움직여 기척을 속였을 뿐이었다.

아마 놈은 눈앞에 남은 존재감 때문에, 그가 실존하는 분신을 생성했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

DK가 질문을 던졌으나, 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재차 소수혈인의 붉은 칼날을 찌르기만 할 뿐.

스피잉―!

"흡!"

귓전을 스치는 무시무시한 검격에 녀석은 또다시 분신을 만들며 몸을 빼냈다.

하지만 오로지 도망만 쳐서는 싸움에서 이길 수 없는 법.

DK는 회피 일변도의 고립된 전투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화를 꾀했다.

"천군압쇄!"

투우우웅!

놈의 몸에서 빛나는 동심원이 터져 나오는 순간, 퍼지는 원을 따라서 수많은 인형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DK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존재감까지도 완벽하게 구현해 냈다.

타다다닷!

달려가며 풀을 밟는 소리부터 시작해서 스치는 바람의 속도, 불현듯 등 뒤에서 공격을 가하려는 행동까지.

녀석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데다가, 실제로 물리력을 생성하고 있었다.

쩌어엉!

뒤에서 들어오는 공격에 반응하여 유진이 소수혈인을 휘두르자, 날카로운 충돌음이 귓전을 때렸다.

보지도 않고 반사적으로 뒤로 내지른 공격이었는데, 손아귀에 묵직한 반응이 있었다.

힐끗 뒤를 돌아보았지만, 충격을 받아 스러져 가는 분신의 모습만 있을 뿐.

한눈을 파는 순간, 다른 곳에서도 공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쉬쉬쉬쉭! 쩌저저저정!

수십 자루의 얇은 검이 날아들었으나, 유진의 몸에 닿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내심 감탄하는 중이었다.

‘의외로 공격이 묵직하다. 분신이라고 무시했다가는 낭패를 볼지도 모르겠군.’

상당히 희귀한 경우긴 해도 헌터나 몬스터 중에 분신 스킬을 가진 존재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DK와 같은 수준으로 물리력 행사가 가능한 분신을 만들어 낸 적은 없었다.

대부분 그저 눈속임에 지나지 않거나, 아예 존재감도 없는 환상에 그쳤다.

그뿐이랴, 그런 환상에 불과한 분신들은 움직임 또한 매우 제한적이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DK의 분신은 엄청나게 다양한 동작을 보여 주는 걸 넘어서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합동 공격까지 감행했다.

터더더더덩! 파스스스스!

소수혈인과 닿은 분신은 가루가 되어 흩날리다가, 완전히 소멸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도 수십 명의 분신이 단 한 번의 공격밖에 펼치지 못한 채, 블라드 유진의 손에 분쇄되었다.

하지만 그의 손속은 갈수록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베고 또 베어도 분신의 수효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어딘가에 숨어 있을 DK로부터 새로운 분신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어서 그런 것이리라.

"꺼져라. 날파리들아."

[대군주의 역병이 범위 내의 모든 생명체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각각 20%의 스킬 효과 감소와 체력 감소의 저주가 적용됩니다.]

츠츠츠츠츠! 촤라라라락!

유진이 좌우로 양손을 쫙 펼치자, 시커먼 형체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마기로 이루어진 박쥐들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 DK의 분신에 작렬했다.

퍼버버버벅!

그러자 유기적으로 파상 공세를 이어 가던 분신들의 움직임이 눈에 띌 정도로 느려지는 게 아닌가.

수치상으로는 20%에 불과했지만, 실제 체감은 그보다 훨씬 더 강한 효과가 걸린 것 같았다.

쩌저저저정!

그가 두 자루의 소수혈인을 폭풍처럼 휘두르자, 지팡이 검을 든 DK의 분신들이 우수수 튕겨 나갔다.

결과가 이렇다고 해서 생명체가 아닌 분신에 대군주의 역병이 걸린 것은 아니었다.

스킬 효과 감소 때문에, 자연히 분신들의 움직임이 둔화했을 뿐이었다.

이제 블라드 유진은 여유롭게 전황을 둘러볼 수 있었다.

대체 어디서 분신이 늘어나는지 파악하면, DK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내 유난히 한쪽에 분신의 인원이 많다는 것을 포착했다.

마치 발각된 바퀴벌레처럼 싹 흩어지는 모습을 보였지만, 유진은 진형의 부조화를 금방 알아보았다.

‘저기다.’

스윽!

암흑화를 통해 육신을 안개로 만든 그는 목표 지점을 향해서 엄청난 속도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DK의 본체가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지점에 도착하자마자, 유진은 불꽃 형상의 거대한 도를 꺼내 들었다.

무기의 정체는 게일드 백작을 처치하고 얻은 악염도였다.

후우우웅!

무게가 상당했기 때문에, 칼날이 날아드는 속도는 소수혈인보다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정 범위를 쓸어버리는 것에는 그야말로 최고의 효율을 자랑했다.

화르르르륵!

칼날을 휘두르자마자 거대한 화염이 일어나 사방을 마구 불태웠기 때문이었다.

"호오?"

나름 괜찮은 위력에 블라드 유진은 공격하다 말고 악염도를 훑어보았다.

너무 거창한 생김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래도 위력만은 마계 백작의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내친김에 악염도에 내장된 스킬도 사용해 보고자 했다.

하지만 이내 공격을 멈춘 채, 바닥에 사뿐히 내려서고 말았다.

‘아……. 죽이면 안 되지.’

악염도에 내장된 스킬은 맹폭(猛爆)과 화신(火神).

맹폭은 닿는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강한 고농축 에너지를 쏘아 보내는 기술이었다.

게다가 화신은 상당한 범위를 용암 지대로 바꾸는 무지막지한 열을 발산했다.

만약 둘 중 하나에 DK가 적중당하기라도 한다면, 십중팔구 뼈도 못 추리고 말 터였다.

이 녀석과는 그럴 의도로 싸우는 게 아니니, 악염도의 스킬 시험은 나중으로 미루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역시 죽이는 것보다 제압하는 게 더 어렵군."

유진은 여전히 불길을 뿜어 대는 악염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복주머니 속으로 쑥 밀어 넣었다.

그러자 그의 주변을 가득 채웠던 화염이 언제 존재했냐는 듯, 감쪽같이 사라졌다.

스스스스슥!

맹렬한 열기가 사라지고 나니, DK의 분신은 다시 빠른 속도로 증식하기 시작했다.

악염도가 자취를 감추자마자 녀석은 자신 있게 공격을 전개해 왔다.

아마 방금의 불길은 아이템이 아니라, 스킬로부터 기인했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만약 얼마든지 뽑아 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이리도 조심성 없이 접근할 리는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블라드 유진은 다시 악염도를 꺼내 들 마음이 없었으니, DK의 예상은 적중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스이잉―! 쩌저저저정!

그는 재차 소수혈인을 시전하며 공격을 빠르게 튕겨 냈다.

한데, 문득 유진의 시야가 암전되는 것이 아닌가.

[‘벨티아의 현혹’에 의하여 인지 능력이 극도로 감소합니다.]

[피의 권능이 정신 공격에 저항하여, 하락한 인지 능력을 원상 복구합니다.]

[완전 면역까지 남은 횟수 2/10]

DK가 벨티아의 현혹이라는 스킬로 그를 기절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아주 잠깐 시야가 흐려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분신들의 공격은 거의 지척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쩌저정! 콰직―!

반사적으로 소수혈인을 휘둘러 공격을 튕겨 내려는 순간, 등허리에 뜨끔한 느낌이 드는 게 아닌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다가온 DK가 지팡이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놀랍게도 녀석의 검격은 블라드 유진의 육신을 꿰뚫었다.

물론 어느 정도 파고든 다음부터는 아무리 힘을 줘도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하하! 방심하시면 안 되지요."

녀석은 비릿한 미소를 짓더니, 지팡이를 뽑으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아무래도 등허리를 찌른 놈이 본체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DK는 계획했던 대로 유유히 빠져나가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아무리 힘을 줘도 지팡이 검이 뽑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음? 이익!"

쩌저저저정!

여전히 분신들의 공격은 전개되는 중이라, 녀석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안간힘을 쓰며 손잡이를 잡아당겨 보았지만, 지팡이 검은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고개를 든 DK는 블라드 유진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왼손에서 돋아난 다섯 줄기의 소수혈인을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 분신들을 분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매우 평온했으며, 녀석을 향해서 오른손을 내뻗는 중이었다.

"흡!"

유진에게 붙잡힐 위기에 처했던 DK는 지팡이 검을 놓고 분신들의 틈으로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대군주의 역병에 걸렸음에도 몸놀림은 무척이나 재빨랐다.

이는 분신들이 둘 사이에 끼어들며 DK를 보호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제압하겠다고 대충 상대해서는 절대로 잡을 수 없는 놈이로군.’

녀석의 대응을 지켜보고 있던 그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허리춤에 걸린 복주머니를 움켜쥐었다.

아무래도 소수혈인과 육체 능력만으로 DK를 제압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스르륵! 철그렁!

블라드 유진이 재차 악염도를 꺼내 드는 사이, 등허리에 박혀 있던 지팡이 검이 저절로 뽑혀 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뱀파이어 육신의 놀라운 회복 능력이 체내로 들어온 쇠붙이를 밀어낸 것이다.

몸속 깊숙이 박혔다가 나왔음에도 검날에는 피가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피의 권능이 모든 혈액을 제어하여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은 결과였다.

놀라운 광경이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악염도를 휘둘렀다.

‘맹폭.’

기이이잉―! 슈팍! 콰아아앙!

불꽃 모양의 칼날이 맹렬하게 회전하더니, 이윽고 시뻘건 기운이 전방을 향해서 쏘아졌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폭발과 함께 범위 내의 모든 것이 가루로 변해 흩날리는 게 아닌가.

바닥의 시멘트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바위, 수많은 DK의 분신들까지.

그야말로 잿가루 같은 먼지가 되어 허무하게 비산했다.

"허억!"

자신이 방금까지 서 있던 장소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성되자, DK는 헛바람을 들이켜며 잽싸게 몸을 날렸다.

불길한 느낌이 머릿속을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유진의 맹폭 스킬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정확하게 녀석을 따라왔다.

수백에 이르는 분신들 틈에 숨어 있는데, 대체 어떻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 대체 어떻게……."

녀석은 저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말을 하면 분신이 아님을 들키게 되지만, 이제 굳이 감출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미 블라드 유진은 DK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녀석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악염도를 휘두를 뿐이었다.

"화신."

쿠화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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