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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75화 (76/226)

25화

"음?"

상대는 그제야 블라드 유진이 근처로 다가왔음을 눈치챘다.

아무래도 녀석의 인지 장해 스킬은 주변의 모든 생명체에 자동으로 걸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 그것도 1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피의 군주였다.

고작 S급 헌터의 정신 공격에 당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내 현혹 능력을 뚫는 사람이 한국에 있다니, 신기한 일이로군요."

그자는 지팡이를 유려하게 휘돌리며 흥미롭다는 듯이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그가 누군지 알아본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워낙 얼굴이 알려져 있다 보니, 블라드 유진의 정체를 알아채는 것 정도야 당연한 일이었다.

"아, 당신은?"

"네놈이 DK였군."

"허허! 처음부터 절 찾아온 거였습니까? 이것 참. 위험한 분이시군요. 후우우!"

[‘벨티아의 현혹’에 의하여 인지 능력이 극도로 감소합니다.]

[피의 권능이 정신 공격에 저항하여, 하락한 인지 능력을 원상 복구합니다.]

[혈성쇄혼술에 의하여 해당 스킬 관련 면역이 형성되었습니다.]

[같은 스킬에 당하면 당할수록 인지 복구가 빨라집니다.]

[완전 면역까지 남은 횟수 1/10]

DK가 시가 연기를 내뿜는 찰나, 그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진이 가만히 서서 자신을 쳐다만 보고 있자, DK는 미심쩍은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반응으로만 봐서는 스킬이 제대로 걸린 건지, 확인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잘 된 건지 모르겠군."

일반적으로 상대방에게 현혹 능력이 확실히 걸렸다면, 홀로그램 글귀가 떠오르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방금은 아무런 문구도 뜨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완전히 실패했거나, 절반의 성공만 거뒀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간혹 강력한 상대에게 벨티아의 현혹을 걸었을 때, 이런 경우가 있었으니까.

녀석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앞으로 다가와 눈앞에 지팡이를 흔들어 보았다.

현혹 능력을 발동하는 방식으로 알아보려 했다간 되레 스킬이 깨질 수도 있었으니까.

휙! 휙!

하지만 막대기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음에도 블라드 유진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현혹 능력이 제대로 걸린 모양이었다.

"휴! 다행이군. 하마터면 박멸자에게 걸릴 뻔했어."

DK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튕기려 했다.

그러다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모양인지, 뜨끔한 표정으로 손을 멈췄다.

버릇처럼 손가락을 튕겼다가 현혹 능력이 흐트러지면, 일을 크게 그르칠 수도 있었다.

"으으! 조심해야지. 상대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괴물인데 말이야. 그나저나 블라드 유진이라니……. 이거 너무 거물이 걸렸잖아?"

당연한 말이지만 유진은 이제 누구나 얼굴을 알 만큼 유명해진 상태였다.

헌터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한 번쯤은 이름과 얼굴을 봤을 정도로 온갖 매체에서 대서특필했으니까.

DK는 곤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돌연 씩 미소를 지었다.

"잠깐, 잘만 활용하면 일이 훨씬 수월해지겠는데? 이자를 앞세우면 뭔 일이든 못하겠어?"

생각해 보니 상대는 이용 가치가 매우 높은 인물이었다.

블라드 유진의 뒤에 숨어서 온갖 이득을 빨아먹을 걸 생각하니, DK는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이 괴물 같은 헌터를 완벽하게 제압해야만 했다.

지금처럼 현혹 능력이 대충 절반만 걸린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DK는 초조한 표정으로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기다렸다.

"됐다."

스윽!

이윽고 녀석은 유진을 향해서 다시 한번 벨티아의 현혹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스킬이 제대로 걸렸다는 홀로그램 글귀는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별짓을 다 하는군."

"헙!"

문득 초점이 흐려졌던 눈빛이 돌아오며 그가 말을 걸자, DK는 깜짝 놀라며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벨티아의 현혹에 제대로 당한 블라드 유진이 이토록 아무렇지 않을 줄은 상상도 못 한 모양이었다.

"어, 어떻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겁니까? 이렇게 빨리 풀릴 리가 없을 텐데요."

"애초부터 걸리지 않았다. 어디까지 하는지 궁금해서 가만히 지켜보았을 뿐."

"허! 날 갖고 놀았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잠깐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DK는 놀랍도록 빠르게 표정을 되돌렸다.

최면과 암시, 현혹 능력을 사용하는 자답게 본인의 감정을 감추는 것에도 탁월한 모양이었다.

DK는 원래의 유들유들한 얼굴로 돌아가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유도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건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제 제가 처음 했던 제안의 대답을 듣고 싶은데요. 블라드 유진 씨?"

"사업을 하자는 것 말인가."

유진이 자신의 머릿속에 그렸던 상황과 비슷한 대답을 내놓자, DK는 현혹이 제대로 걸렸다고 확신했다.

녀석은 그에게 조작된 기억을 확실하게 심어 주기 위해서 평소 하던 것처럼 연극을 이어 갔다.

"네, 우린 닮은 점이 좀 많은 것 같아서요. 잘 맞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카르텔 설계자의 본분을 다하려는 거겠군."

"그렇죠. 그러니 제가 한국에 만든 카르텔에 들어오는 게 어떻습니까?"

"내 조직을 거기다 넣으면 어떤 이득이 있지?"

"저는 카르텔로부터 아무런 금전적 보상을 받지 않습니다. 각 조직은 제가 키운 파이를 마음껏 먹을 수 있죠."

"대가 없이 이런 일을 한다?"

"네. 이따금 제게 호감이 있는 조직의 보스가 자금을 보내긴 합니다만. 그건 자발적인 후원이죠. 실제로 얼마 되지도 않고요."

유진은 DK의 말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별다른 이득도 얻지 못하는데, 위험천만한 제3세계를 이런 정신 나간 짓을 하면서 돌아다닌다?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녀석은 어깨를 으쓱이며 재차 입을 열었다.

"믿지 못하신다면, 보유 자금을 탈탈 털어서 보여 드릴 수도 있습니다. 제가 구축한 카르텔에 가서 직접 확인시켜 드리는 것도 가능하고요."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다. 사실 확인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저 왜 그러는지 이유가 듣고 싶을 뿐이지."

"이유요? 간단합니다. 전 혼란을 원하거든요. 질서를 깨부수는 아주아주 거대한 혼돈을요."

그러면서 씩 웃는데, 순간적으로 블라드 유진은 DK에게서 미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이자는 그와 확실히 닮은 점이 있었다.

이 정신 나간 현혹술사는 미궁 사태가 벌어진 이후, 작금의 아포칼립스 상황을 즐기는 중이었다.

"네 말이 옳다."

"그렇죠?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확실히 우리는 닮은 점이 있는 것 같네."

"그럼 제 계획에 동참하시는 건가요?"

유진의 긍정적인 반응에 DK는 쭉 찢어진 실눈을 동그랗게 뜨며 미소 지었다.

이제 거의 다 넘어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녀석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방식이 틀려먹었어."

"예?"

"왜 네놈의 밑에 들어가야 하는지 모르겠군. 당연히 군림하는 자는 내가 되어야 정상인데 말이야."

그 말이 끝난 직후, 블라드 유진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S급 혈성쇄혼술을 S급 대상에 시전합니다.]

[스킬과 대상의 등급이 같아, 저항 요소를 상쇄할 수 없습니다.]

[대상의 정신 저항이 발동하여 혈성쇄혼술의 효과를 낮춥니다.]

[‘정체불명의 S급 헌터’가 혈성쇄혼술에 저항합니다.]

[하수인 생성에 실패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혈성쇄혼술은 보기 좋게 실패해 버렸다.

동급이라서 먹히지 않았다기보다는 아무래도 DK의 정신 관련 스킬로 인한 결과인 것 같았다.

하지만 원래 예상했던 거라서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랜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완벽하게 제압한 다음, 재차 혈성쇄혼술을 사용한다.’

정신 방어는 대상의 상태에 따라서 그 능력이 천차만별이기 마련이었다.

또렷한 이성을 유지하고 있을 때와 인사불성일 때의 효과가 극명하게 다른 것이다.

스이잉―! 스각!

유진이 소수혈인을 생성하자, DK는 지팡이를 양손으로 붙잡고 좌우로 쫙 뽑아냈다.

그러자 평범한 지팡이가 분리되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날붙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는 거로 보아, 심상치 않은 물건인 듯했다.

하긴 비인가 S급 헌터가 아무런 무장도 없이 타국을 돌아다닐 리는 없었다.

"결국에 이런 말로라니……. 조금 실망입니다. 블라드 유진 씨."

"내게 뭘 기대했기에 실망이라는 거지?"

"적어도 말은 통하는 분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강압적일 줄이야. 같은 현혹술사로서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뭔가 착각하고 있군."

자기의 행동을 규탄하는 녀석을 향해서, 그는 핏빛 칼날을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무심한 어조로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스팡―! 카강!

블라드 유진이 휘두른 붉은 칼날은 놀라운 움직임을 보였다.

한순간에 칼날이 다섯 줄기로 나뉘어 각각 쇄도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로 합쳐졌다.

게다가 그 무시무시한 공격을 양손으로 펼치다 보니, DK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파상 공세에 시달리다 보니, 저절로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녀석은 잽싸게 뒤로 물러나며 지팡이 손잡이에 달린 무언가를 꾹 눌렀다.

번―쩍!

그러자 순간적으로 엄청나게 밝은 빛이 터져 나오더니, 유진의 시야를 완벽하게 가려 버렸다.

그러는 동안, DK는 그의 공격 범위에서 완전히 빠져나갔다.

"무슨 공격이……. 미국의 S급 헌터도 겪어 보았지만, 이런 미친 수준은 처음이네요. 당신 정말 S급 맞습니까?"

놈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전투 중에 대화할 정도로 그는 말이 많은 자가 아니었으니까.

그저 무자비한 공세를 퍼부어 원하는 걸 쟁취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스이잉―! 스윽!

소수혈인을 나눠 열 줄기의 칼날을 만든 유진은 DK를 향해서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암흑화를 시전했기에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신형은 눈 깜짝할 새에 다가와 있었다.

쿠콰콰콰콰!

양손을 섬전처럼 놀리자, 블라드 유진의 앞에는 그야말로 시뻘건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열 줄기의 붉은 칼날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허공을 찢어발겨서, 몸을 빼낼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게다가 그 가공할 위력의 칼날 폭풍은 공간 자체를 아예 도려내 버릴 것만 같았다.

소수혈인의 향연에 갇힌 DK는 잔뜩 웅크린 채, 공격을 온전히 맨몸으로 받아 내야만 했다.

물론 녀석도 무슨 수를 써서 방어를 굳혔겠지만, 칼날 폭풍을 완전히 막아 내지는 못할 터였다.

스슥―!

그런데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이었는데, 놀랍게도 DK의 신형은 지워지듯 사라져 버렸다.

소수혈인을 거둔 그는 방금까지 녀석이 있던 공간이 아닌,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초부터 진짜가 아니었던 건가?"

"당신 같은 괴물을 상대하는데, 보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꽤 두꺼운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DK는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놀랍게도 놈은 지금껏 분신을 만들어서 유진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다음 순간, DK는 웃는 낯을 싹 지워야만 했다.

문득 녀석의 뒤에서 블라드 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그가 가만히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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