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드, 듣보?"
DK의 명함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한 번쯤은 카르텔 설계자를 떠올리곤 했다.
베일에 싸인 인물이기는 해도, 세계적으로 꽤 유명한 비인가 헌터니까.
하지만 이제 막 문경 시장을 접수한 조직의 보스는 그런 DK를 무슨 벌레 보듯 바라보았다.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 카르텔 설계자를 정말로 알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헌터로 각성하자마자 얻게 된 능력을 통해서, DK는 상대의 심리 상태를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날 모를 리가 없는데, 이상한 일이로군."
뭔가 위화감을 느꼈지만, DK는 일단 크게 개의치 않았다.
최면과 현혹에 관련된 스킬뿐만 아니라, 이자는 상당한 전투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비인가 헌터 조직이 떼로 달려들더라도, DK는 충분히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직접 조사해 본 바로, 현재 한국에 머무르는 비인가 헌터 중 최상위는 고작 A급.
제아무리 PVP에 특화되어 있더라도, 한 단계의 차이를 극복하는 건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게다가 DK는 전투를 아예 거치지 않고도 수십 명의 헌터를 제압하는 게 가능했다.
조광욱을 만날 때와 마찬가지로 현혹 능력으로 기절시켜 버리면 그만이었다.
"시체가 되어 경계 지역 너머로 던져지고 싶지 않다면, 그냥 꺼지는 게 좋을 거다. 이 양놈 새끼야."
보스가 귀찮은 듯 손짓하자, 바로 옆에 있던 조직원이 DK의 멱살을 잡으며 으르렁거렸다.
안 그래도 험상궂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니, 흡사 악귀와 다를 바 없는 생김새였다.
하지만 DK는 살짝 조소하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딱!
현혹 스킬을 시전하여 건방 떠는 눈앞의 녀석을 제압하고, 보스와 이야기를 좀 나눠 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멱살을 움켜쥔 비인가 헌터는 눈을 부라리며 수상하다는 듯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뭐, 마술이라도 하게? 아니면 그냥 정신 나간 새끼인가."
게다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화가 난 모양인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무기를 꺼내 들려고 했다.
허리춤에서 튀어나온 회칼을 발견한 DK는 황급히 양손을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문득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조직의 보스가 슬그머니 일어나 말을 거는 게 아닌가.
"잠깐, DK라고 했나?"
"그렇습니다만."
"이거 유명한 분에게 큰 실례를 했군. 우리가 워낙 신생 조직이라, 여유가 없었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본인은 흑룡이라고 합니다."
문경 시장을 장악한 인물은 흑룡파의 정진수였다.
가평 인근의 작은 시장에서 시작된 흑룡의 조직은 어느새 문경까지 닿아 있었다.
블라드 유진이 성장을 지시한 지, 고작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DK는 그런 정진수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야기는 다음에 나눠야 할 것 같군요. 지금은 바쁜 듯하니, 다음에 들르겠습니다."
"여기까지 찾아온 손님을 그냥 보낼 순 없지. 가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허심탄회하게 대화해 봅시다."
"지금은 좀 바빠서……."
"아니, 먼저 와서 말 걸어 놓고 내빼는 게 어디 있습니까?"
성큼성큼 걸어온 흑룡이 손을 내밀었지만, DK는 잡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가온 흑룡의 눈빛에서 심각한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럼."
스팟―!
살짝 고개를 까딱이듯 인사를 한 직후, 놀랍게도 DK의 신형은 지워지듯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이윽고 살짝 몽롱해졌던 흑룡의 눈빛은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곧장 조직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자의 인상착의를……. 기억하는 놈 있나?"
"어떻게 생겼는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말입니다."
"흠! 아무래도 대부님께서 찾으시던 놈 같은데, 이거 아쉽게 되었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수배 좀 때려 놔."
"예, 형님!"
흑룡이 입맛을 다시는 동안, DK는 벌써 시장을 나서는 중이었다.
현혹 능력에 걸린 모양인지, 흑룡파 조직원들은 녀석의 움직임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흠! 잠깐. 내가 한국에 들어온 걸 아는 눈치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카르텔 설계자가 한국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극소수에 불과했다.
해 봐야 예지 능력자를 보유했다는 미국이나, 제3세계에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중국일 터.
바보도 아니고 그 정보를 민간에 풀 리가 없었다.
카르텔 설계자는 그저 입국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회의 불안을 초래하는 존재였으니까.
심각한 표정으로 숨을 고르던 DK는 문경 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지막에 보았던 흑룡이라는 자의 눈빛은 뭔가 기괴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현혹 능력이 안 통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와 비슷한 놈이 있는 건가?"
강력한 무언가를 느끼고 도망쳐 왔지만, 그건 본능과도 같은 거였다.
제3세계에서 활동할 때는 다양한 위협에 직면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새로운 기회의 땅 한국이 아니었던가.
S급이라고 해 봐야 리브라 길드의 안지홍과 혼자서 활동하는 전시영뿐이었다.
그런 자들이 고작 비인가 헌터들의 밥그릇 싸움에 끼어들겠는가.
성체 미궁 정화에 매진해도 모자랄 판인데.
"한국에 날 넘어서는 헌터는 없다. 그렇다면 그 위화감은……. 설마 동류?"
뭔가를 깨닫기라도 한 듯, DK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문경 시장을 돌아보았다.
안전을 위해서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저쪽과 맞붙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한 느낌이었다.
만약 흑룡을 막후에서 조종하는 인물을 꺾는다면, 한국에서의 카르텔 확장은 훨씬 쉬워질 터였다.
잘만 하면 상대가 이룩해 놓은 모든 것을 꿀꺽 삼켜 버릴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건 이겼을 때의 일이지. 이거 일이 상당히 재미있게 돌아갈 수도 있겠는데?"
DK는 마치 가면 같은 새하얀 미소를 유지한 채, 오염 지대의 경계선을 따라서 느릿하게 걷기 시작했다.
* * *
"벌써 빠져나갔다고?"
"면목 없습니다. 워낙 순식간에 사라진 터라……."
블라드 유진의 앞에 부복한 흑룡 정진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바닥에 머리라도 찧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제는 함부로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시끄럽다는 이유로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DK를 놓친 정진수를 질책하지 않았다.
애초에 전설적인 S급 비인가 헌터를 갓 A급이 된 자가 무슨 수로 잡는단 말인가.
"괜찮다. 능력 밖의 일로 탓하지는 않는다."
"죄송합니다. 능력을 더 키우겠습니다!"
그러나 정진수는 괜찮다는 유진의 말을 매우 창의적으로 재해석했다.
원래는 능력 밖의 일을 명령한 건 상관의 잘못이지 실무자의 책임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흑룡 정진수는 부족해서 못 써먹겠으니, 지금보다 능력을 크게 향상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순간적으로 그는 어이가 없었지만, 굳이 그런 녀석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하수인이 성장한다면, 써먹는 블라드 유진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으니까.
"수고해."
"예, 대부님!"
철컥! 텅!
정진수가 잽싸게 움직여 문을 열어 주자, 그는 조직 사무실로 쓰는 건물 밖으로 나갔다.
흑룡파는 문경 시장의 알짜배기 위치에 가건물 여러 채를 세워 놓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바깥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방이 꽉 막힌 공간이 이어졌다.
천막과 가건물을 이용하여 널찍한 복도를 만들어 둔 것이다.
자갈이 깔린 복도 양옆으로는 흑룡파의 조직원들이 두 줄로 쭉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유진을 보자마자 허리를 깊게 숙이며 나직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살펴 가십시오. 대부님."
원래는 시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야 정상이었지만, 이 또한 금지된 사항이었다.
워낙 시끄럽고 사람들의 눈에 띄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녹턴에 올라타더니, 이내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두두두두두!
희미한 말발굽 소리만 남기고 말이다.
"도망치긴 했어도 이 근처에 있다는 이야기로군. 그럼 이놈을 어디에 가서 잡아야 할까?"
녹턴을 타고 문경 인근의 하늘을 날아다니던 블라드 유진은 문득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에 그가 사용하던 이안면 인근의 마을 회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곳은 이미 헌터 관련 사업을 진행하는 건물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유진의 시야에 저 멀리 상주시 동쪽에 번화한 도회지가 보였다.
상주는 그가 문경 다음으로 성체 미궁을 정화한 위치로, 최근 상당한 성장세를 보이는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염 지대에서 수익률 좋은 몬스터가 왕왕 출현하기 때문이었다.
잠시 상주시 인근의 시장을 보고 있자니, 문득 한 가지 좋은 계획이 떠올랐다.
‘그자가 흑룡을 찾아온 이유는 명확하다. 본인이 세운 카르텔로 끌어들이기 위함이겠지. 그렇다는 말은…….’
이미 DK는 한국 어딘가에서 카르텔을 만들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자가 들어온 지는 벌써 6주가 넘었으니, 작업은 웬만큼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 말인즉, 이제는 지금처럼 하수인을 펼쳐 놓고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뜻했다.
블라드 유진은 녹턴을 조종하여 상주 시장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놈은 내가 흑룡을 통해서 지켜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역시 재미있는 놈이야."
DK는 최면과 현혹, 정신 공격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자였다.
하지만 그건 뱀파이어 로드인 그도 마찬가지.
녀석이 걸어 둔 최면술이 어떤 종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재미있는 싸움이 될 것 같았다.
‘문제가 있다면 상주를 장악한 놈에게 하수인 자리를 줄 수 없다는 거겠군.’
지금껏 유진이 거둬들인 아홉 명의 하수인은 하나같이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인재였다.
웬만큼 큰 조직과 붙어도 패하지 않을 만큼, 실력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게다가 혈성쇄혼술의 열 번째는 DK를 위해서 비워 둔 자리가 아니었던가.
아무래도 하수인을 만들기보다는 정신을 제압하고 기억을 읽어 내는 선에서 그쳐야 할 것 같았다.
그도 아니라면 잠시 하수인으로 등록했다가 나중에 처리해 버리든지.
두두두두두! 슈우우우우!
유진은 순식간에 상주 시장으로 접근하여 인적 드문 곳에 녹턴을 착륙시켰다.
그런데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곳에 웬 남자가 서 있는 게 아닌가.
누가 봐도 영국 신사 같은 느낌의 젊은 백인 남성이었다.
녹턴에서 내린 그는 그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분명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난데없이 사람이 튀어나왔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
저자는 그저 가만히 있었지만, 어쨌거나 뱀파이어 로드의 감각을 속인 셈이 되는 거였으니까.
뭔가 닿을 듯 말 듯 괴상한 느낌을 뒤로한 채, 유진은 그자를 향해서 천천히 다가가 보았다.
잠시 집중해서 놈을 쳐다보고 있으니, 기이한 감각이 전신을 옥죌 듯 다가왔다.
‘저놈은?’
[뱀파이어 로드의 지고한 정신력이 인지 장해 스킬을 깨뜨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