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73화 (74/226)

23화

블라드 유진은 흑룡파의 정진수를 시작으로 몇몇 조직의 보스들을 찾아가 혈성쇄혼술을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DK는 보스들에게 접촉해 오지 않았다.

혹시나 카르텔 설계자가 접근하기에는 규모가 작나 싶어서 그는 마음에 드는 녀석들을 하수인으로 만들었다.

혈성쇄혼술을 통해서 하수인이 된 인간들은 시전자에게 충성하게 되어 있었다.

더불어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는데, 피의 권능을 받아들임으로써 전체적인 능력치가 상승한다는 거였다.

문제는 능력치 상승 폭이 생각보다 큰 탓에, 하수인들의 세력은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그래서 거대 조직의 회합과도 같은 작금의 상황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내가 너무 뱀파이어의 입장에서만 생각해 버렸군.’

피의 군주인 유진이 보기에 하수인의 레벨이 올라 봐야 대부분은 그대로 B급이었다.

하지만 개중에 몇몇은 A급으로 올라간 이도 있었고, 같은 B급이라도 레벨이 400대 후반까지 치솟았다.

무려 아홉 명이나 되는 자들이 그렇게 성장한 데다가, 자기들끼리의 신뢰도 엄청나게 두터워졌다.

자신들이 ‘대부’로 모시는 블라드 유진이 중심을 딱 잡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는 전혀 의도치 않은 결과였지만, 의외로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 정도면 자질구레한 일들은 협회를 통하지 않아도 되겠어.’

지금까지 한국 헌터 협회는 완벽하진 않아도 유진의 마음에 꽤 드는 편이었다.

적당히 필요한 것을 주고받으면서 협력하는 관계였다.

하지만 엉겁결에 만든 비인가 헌터 조직은 어떠한가.

저들은 언제든지 블라드 유진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충실한 병력이었다.

아직 수준이 좀 낮기는 해도 그럭저럭 써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들은 오로지 PVP만 연구한 조직 폭력배가 아니었던가.

사람과의 싸움에서는 이만큼 잘 드는 칼도 없었다.

"그래도 수준이 너무 낮긴 하군."

"죄송합니다! 대부님."

쿠웅!

그의 중얼거림에 하수인으로 삼은 아홉 헌터가 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대답했다.

유진은 그중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한 녀석을 검지로 지목했다.

"너."

"예, 대부님. 흑룡파의 정진수입니다."

"시간을 줄 테니, 좀 더 강해질 수 있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쿠웅!

정진수는 다시 한번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부복했고, 나머지 하수인들도 함께 복명복창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쿠웅!

명령을 내린 그는 가평 시장 인근에 지어진 가건물을 나섰다.

여긴 하수인들에게 대충 알아서 하라 하고, 유진은 DK를 찾아서 움직일 작정이었다.

"가자."

"이히히힝!"

녹턴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자, 이내 가건물 밖으로 쏟아져 나온 하수인들이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들어가십쇼! 대부님!"

처저저저적!

왠지 낯 뜨거운 장면이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가평을 떠났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로군.’

두두두두두!

그런데 녹턴을 타고 날아가는 유진을 향해서 인사하던 하수인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정진수를 바라보았다.

"이보게. 흑룡. 대부님께서 강해지라고 하셨는데, 대체 뭘 뜻하시는 것 같은가."

"아무래도 강해진다는 건 두 가지 의미가 있겠지요. 하나는 개인의 강함이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 조직의 융성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렇지."

정진수의 답변에 하수인들은 하나같이 진중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나머지 여덟 하수인의 의견은 정확히 반으로 갈렸다.

전자 네 명과 후자 네 명.

각자 의견이 분분한 터라, 그들은 최초로 하수인이 된 정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흑룡의 결정에 따라서 앞으로 조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결정될 테니까.

"제 생각에 개인의 강함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미 대부님께서는 초월적인 힘을 보유하신 분. 우리의 자질구레한 실력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으실 겁니다."

"오오! 그렇다는 말은……!"

"지금보다 조직의 덩치를 더 키우라는 의미겠지요."

"옳소! 옳소이다!"

전자를 지지하던 하수인들조차도 정진수의 말에 설득당한 모양인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우리 조직의 정확한 명칭이 뭡니까? 그냥 지금처럼 각 조직의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지 않나 싶군요."

"대부님께서 그것까지는 정해 주시지 않았는데요."

"임시로라도 우리가 정하는 게 어떻습니까?"

"좋은 생각입니다. 그럼 의견을 좀 내보십시오."

정진수가 제안하자, 하수인들은 각자 본인의 조직과 연관 있는 이름들만 우르르 꺼내 놓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하수인들을 대표하는 명칭이 될 수가 없었다.

결국에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던 흑룡 정진수가 나서서 상황을 중재했다.

"아무래도 그냥 대부님의 성함에서 이름을 따오는 게 어떻습니까? 게다가 우린 여러 조직이 협력하는 관계니, 뒤에는 연합체라는 단어를 붙이고요."

"대부님의 성함이라……. 그럼 나아갈 진(進) 자를 써서, 진 헌터 연합체라고 부르는 게 어떻습니까?"

"오! 왠지 의미도 있는 것 같고, 그거 괜찮겠습니다. 대부님과 크게 연관이 있어 보이지도 않아서 더 좋군요."

누군가가 의견을 내는 순간, 하수인들은 지금껏 주장하던 이름을 그대로 접어 버렸다.

한순간에 유진의 하수인 조직들은 진 헌터 연합체가 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지금껏 해 오던 것보다 더욱 맹렬하게 세력 확장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그는 이제 거대 비인가 헌터 조직을 조종하는 흑막이 되어 가고 있었다.

* * *

"용산 시장은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슬슬 세력을 확장해도 괜찮겠군요."

"허허! 그렇습니까? 그럼 어디가 좋을까요? 고문님."

DK의 말에 멸궁파의 보스 조광욱은 눈을 반짝이며 질문을 던졌다.

협회 직원들을 순식간에 구워삶는 고문의 능력이라면, 다른 시장을 손에 넣는 거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터였다.

이익금이 지금보다 훨씬 늘어날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이 두근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동쪽 라인을 따라서 쭉 북상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협회의 영향력이 약한 곳부터 노리시려는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럼 제가 쓸 만한 녀석들의 명단을 한번 뽑아 보겠습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그쪽에도 제가 아는 동생들이 몇 있으니, 유력 조직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DK의 예상과는 달리, 조광욱은 꽤 유능한 인재였다.

오늘 한 대화 덕분에 놈은 목숨을 좀 더 연장할 수 있었다.

원래는 조금 데리고 놀다가 보스 자리를 교체해 버리고, 충실한 수족을 앉힐 작정이었으니까.

조광욱은 곧장 인근의 경계 지역에서 활동하는 비인가 헌터들에게 연락을 넣어 보았다.

그러자 몇몇 인물들에게서 곧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휴대 전화의 메시지를 확인한 조광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DK에게 화면을 보여 주었다.

"고문님, 그나마 좀 쓸 만한 놈들입니다."

"밀양이라는 곳이네요."

"아무래도 울산 쪽은 아예 개척이 안 된 곳이라서 말이죠. 북상하려면, 이렇게 올라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사람 좀 붙여 주십시오."

"예, 물론입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DK는 조광욱의 도움을 받아, 곧장 밀양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카르텔 설계자의 능력은 당연히 다른 지역에서도 완벽하게 먹혀들었다.

밀양에서 조광욱의 지인 김인규를 만난 DK는 곧장 경계 지역 시장을 장악한 천일파를 접수할 수 있었다.

밀양에서 머문 것은 고작 2주.

이곳은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은 경계 지역 시장이라, 조직을 개편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게다가 이미 조광욱과 김인규는 아는 사이라, 멸궁파와 연계하는 것도 매우 손쉬웠다.

그런 다음 DK는 곧장 대구를 지나 쭉쭉 치고 올라갔다.

벌써 녀석이 하나의 카르텔로 묶은 비인가 헌터 조직만 여섯 개였다.

하지만 문경에 들렀을 때 DK의 움직임은 드디어 주춤했다.

"그래.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지."

DK는 조광욱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문경시 인근을 둘러보았다.

"규모가 엄청나군. 용산 시장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데……."

DK는 용산 시장과는 달리,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허름한 간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구에 대충 걸쳐져 있는 간판엔 ‘문경 유진 시장’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블라드 유진, 그자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을 단 건가?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무려 250여 킬로미터 거리를 단신으로 뚫은 자가 바로 블라드 유진이 아니었던가.

한국에서는 거의 위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인데, 이런 이름이 달릴 만도 했다.

물론 난데없이 부흥한 지방의 소도시뿐만 아니라, 유진이라는 이름이 어디든 수십 개쯤은 달려 있을 터였다.

"그나저나 활기차네."

문경 시장은 아직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듯했다.

DK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비인가 헌터 조직들이 힘겨루기하는 장면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던 두 조직의 결전은 이윽고 막을 내리게 되었다.

결국에 검붉은색의 방어구로 복장을 통일한 조직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DK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비인가 헌터 조직의 보스로 보이는 자에게 다가갔다.

조광욱에게 접근했을 때처럼 조직원 사이를 마음껏 누볐는데, 조금의 제지도 받지 않았다.

인식 제한 능력을 발휘하여, 무의식중에 자신을 같은 편으로 여기게 만든 덕분이었다.

DK는 유유자적 걸어가 화려한 검붉은색 방어구를 입은 보스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대단한 실력이더군. 아무래도 그쪽이 이 시장을 장악한 사람이겠지?"

"음? 네놈은 뭐냐?"

난데없이 낯선 자가 지척에서 나타나자, 비인가 헌터 조직의 보스는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최면이 걸려서 그런지, 조광욱 때와 마찬가지로 반응은 꽤 온건하기 그지없었다.

초면임에도 술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법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아, 난 이런 사람이라네."

DK가 금색 테두리의 명함 한 장을 건네자, 보스는 순순히 받아들었다.

그런데 지금껏 만나 왔던 보스들과 달리, 상대의 반응은 사뭇 독특했다.

"DK? 이건 또 뭔 듣보잡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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