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72화 (73/226)

22화

난데없이 깔끔한 차림의 백인이 불쑥 나타나자, 조광욱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기분이 나쁠 때 버릇처럼 짓는 표정이었다.

보스의 기색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멸궁파 조직원들은 잽싸게 그자의 앞을 막아섰다.

"멈춰라."

타닥!

하지만 남자가 지팡이로 팔을 가볍게 치자, 앞을 가로막았던 두 조직원이 자연스럽게 길을 비켰다.

지팡이는 그저 가볍게 다가와서 닿기만 했을 뿐, 특별히 강한 힘이 실려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옆으로 비켜선 조직원들은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것들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아! 죄송합니다. 더 확실히 막겠습니다."

조광욱이 호통을 치자, 멸궁파 조직원들은 손을 뻗어 백인을 끌고 가려 했다.

척! 척! 척!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 움켜쥐고 이동하는 게 아닌가.

조직원들의 기행에 조광욱의 눈빛이 돌변했다.

콧수염을 기른 금발 백인 남성의 정체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네놈은 뭐지?"

"오! 내 소개가 필요한가? 난 이런 사람이라네."

남자는 테두리에 금칠이 된 고풍스러운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DK? 혹시 그 카르텔 설계자 DK를 말하는 거요?"

"날 아나? 그럼 이야기가 좀 빠르겠구먼."

"비인가 헌터 중에 DK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물론 당신이 그자인지는 믿을 수 없지만."

조광욱의 대답에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담배 연기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더블 마두로의 독한 시가였지만, 그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연기를 폐부 깊숙이 넣었다가 길게 내뱉었다.

"후우우우! 증명이 필요하겠구려."

"그야 당연한 거 아니겠소?"

조광욱이 도발적인 표정으로 대답하자, 남자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터더더더더덕!

그러자 그 소리와 함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멸궁파 조직원들이 동시에 우수수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지면에 얼굴을 처박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부하들을 바라보며, 조광욱은 미간을 확 좁혔다.

이토록 압도적인 능력은 이제껏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좀 믿음이 좀 생겼겠군."

"……나와 무슨 사업을 하려는 거요?"

"그거야 일종의 매니지먼트 사업이지요. 나와 함께하면 더욱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훨씬 많은 이익을 볼 수 있을 거외다."

"만약 거절한다면?"

"간단한 거 아니겠소? 이 쓰레기들은 깡그리 치워 버리고, 새로운 동업자를 찾아야겠지. 이 근방에 널리고 널린 게 비인가 헌터니까."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상대를 바라보며, 조광욱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자라면 손가락 한 번 튕김으로써 부하들을 몽땅 저세상으로 보내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윽고 조광욱은 눈앞의 백인 남성이 그 유명한 카르텔 설계자 DK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소. 뭘 어떻게 협조하면 되오?"

"만족스러운 답변이로구먼."

DK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조광욱은 시가 연기를 뿜어내는 남자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 * *

놀랍게도 DK가 원하는 바는 군림이 아니라, 진정으로 함께 사업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굴복하듯 사업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광욱은 DK를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열흘 만에 멸궁파의 사업장이 두 배로 늘었고, 매출은 세 배가 되었으니까.

"아니, 고문님. 대체 어떤 마술을 부렸기에, 조직이 이리도 성장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실 DK가 한 일은 정말 별거 없었다.

조직을 체계적으로 개편하고, 경계 지역 시장을 좀 더 효율적으로 바꾸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게다가 암암리에 거래되던 불법 품목을 모조리 양지로 끌어 올렸다.

멸궁파가 장악한 경계 지역 시장에서는 그 어떤 물건도 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지역에서도 헌터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그야말로 없는 게 없었으니까.

"허허! 이 정도는 기본이지요. 앞으로 멸궁파의 세력은 더욱 커질 거고, 협력할 여러 형제도 생겨날 거외다."

"형제라면……."

"다른 조직도 우리에게 동조하게 해서 거대한 카르텔을 만들어야지요. 협회나 길드에서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을 갖추는 겁니다."

"오오!"

"그때가 되면, 수익이 쏠쏠한 경계 지역은 모두 우리가 차지하게 되겠지요."

멸궁파가 성공을 거두면서부터 조광욱은 DK를 극진히 모시기 시작했다.

사실상 조직의 보스 자리에 앉아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DK는 그저 고문의 자리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힘으로 조직을 제어하려는 행태는 첫 만남 이후에 결단코 보이지 않았다.

멸궁파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조직원들은 보스만큼이나 DK의 명령을 잘 따랐다.

그런데 멸궁파와 협업한 지 대략 한 달쯤 되었을 무렵, 누군가가 용산 시장에 불쑥 나타나 조광욱을 찾았다.

"당신이 멸궁파 보스입니까?"

"그렇소만."

"협회에서 나왔습니다. 이거 이야기가 좀 필요할 것 같은데요."

DK가 용산 시장에서 가장 먼저 손댄 일은 불법 약물과 마약 사업이었다.

불법 약물은 허용량을 초과한 엄청난 수치의 강화 능력을 제공하는 제작 물품을 의미했다.

제아무리 신체 능력이 탁월한 헌터라도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약물.

생산직 헌터가 공들여 만든 물건이지만, 협회 인증을 받지 못해서 팔 수 없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우연히 제조되는 마약 또한 거래가 불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용산 시장은 달랐다.

그따위 협회가 만든 규칙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채, 약물을 마음껏 팔았던 것이었다.

죽을 위험이 있어도 효과가 훨씬 좋으니, 헌터들은 불법 약물을 앞다투어 구매했다.

적절한 순간에 사용하면, 되레 위기를 타개하고 살아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런 긍정적인 효과를 본 헌터들이 시장으로 돌아와서 증언하자, 물건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불법 약물 판매를 당장 중지하십시오. 안 그러면 협회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겁니다."

"허허!"

협회 직원이 진중한 표정으로 경고했으나, 조광욱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불법 약물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극소수의 증언을 상술로 이용하지 마십시오."

이미 협회에서는 용산 시장의 비위를 잘 알고 있었다.

시장에서 대놓고 파는 데다가, 헌터들이 몰려드니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DK가 끼어드는 순간,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자자, 다들 너무 분위기가 과열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난데없이 금발을 길게 기른 외국인이 유창한 한국어로 말을 걸자, 협회 직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 사람은 누구냐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멸궁파 보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조광욱은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의문점이 많았으나, 이내 그들은 DK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일단 가면서 설명해 드리죠. 우리가 불법 약물이나 마약을 판매한다는 건 다른 조직에서 퍼뜨린 유언비어에 불과합니다. 저희 장부입니다. 얼마든지 살펴보십시오."

놀랍게도 DK는 멸궁파의 내부 문건을 거리낌 없이 공개했다.

매출 장부부터 거래 품목까지 상세히 기록된 자료를 한 아름 받게 되자, 협회 직원들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비인가 헌터들이 이런 대응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었다.

조직적으로 온갖 불법적인 일을 획책하는 놈들이 뭣 하러 자료를 갖다 바치겠는가.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받은 서류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봐도 특별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이 자료가 전부인 거 확실합니까?"

"그럼요. 이쪽으로 와 보십시오. 이게 저희 조직에서 사용하는 금고입니다. 현물도 좀 들어 있긴 합니다만, 장부를 비롯한 중요한 자료는 전부 이곳에 보관하죠."

드르륵! 철컥!

DK는 아예 금고를 열어서 모든 자료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자 협회 직원들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받은 자료를 꼼꼼하게 챙겼다.

"좋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가서 자료를 검토한 뒤에 다시 오도록 하죠."

"예, 얼마든지 그러셔도 됩니다. 한 가지만 확실히 해 두자면, 멸궁파는 불법적인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뗐습니다. 그저 시장을 관리함으로써 나오는 소소한 수익만 가져갈 뿐이죠."

"그거야 우리가 알아서 판단할 테니, 그렇게 강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이지요. 조용히 처분만 기다리겠습니다."

"……그래도 상황을 보니, 진짜인 것 같네요. 아마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약간의 아부가 섞인 DK의 말에 차갑게 대꾸하던 협회 직원은 이내 긍정적인 한 마디를 덧붙였다.

마치 멸궁파의 변화를 반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윽고 협회 직원들이 돌아가자, 조광욱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고문님,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요?"

"물론입니다. 저들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테니까요."

DK는 한 발짝 옆으로 이동하며 금고 내부를 보여 주었다.

놀랍게도 협회 직원들이 가져갔어야 할 내부 문건과 그간 쌓아 둔 현물은 그대로 있었다.

"오호! 바로 이거로군요."

"아마 저놈들은 가짜를 들고, 성과를 올렸다며 희희낙락하고 있을 겁니다."

"으하하하! 역시 고문님이십니다."

두 사람은 서류 뭉치를 가득 든 채 돌아가는 헌터 협회 직원들을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저들이 가져간 자료는 조작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협회 직원들은 철석같이 자료가 진짜라 믿고, 용산 시장은 단속 대상에서 제외해 버릴 터였다.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교묘한 암시를 걸어 두었으니까.

DK는 최면을 걸어서 사람을 조종하는 정신 지배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조광욱을 처음 만났을 때, 조직원들을 한순간에 기절시켜 버린 것도 바로 그런 능력의 일환이었다.

외부에서 파악된 것과는 달리, DK는 본신의 능력을 내부 결속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조직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만들었다.

최면을 걸어 조종하는 사람의 수효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오늘처럼 꼭 필요할 때는 확실하게 능력을 드러냈다.

이 또한 카르텔을 이루는 각 조직의 보스들이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한 DK의 술수였다.

자신의 휘하에서는 불법적인 일로 돈을 얼마든지 벌어도 괜찮다는 믿음.

그것이 바로 DK가 거대 카르텔을 유지하는 비결이었다.

"슬슬 사업 영역을 확장해 볼까요?"

"흐흐! 그러시죠. 고문님."

조광욱은 비열한 표정으로 손을 비비며 신뢰 가득한 눈으로 DK를 바라보았다.

꼭두각시가 되어 조종당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 * *

한편, 카르텔 설계자 DK를 붙잡기 위해서 돌아다니던 블라드 유진은 뜻밖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더 커져 버렸군."

수십 명의 건장한 헌터들이 그의 앞에 부복하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무슨 거대 조직의 회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법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유진을 향해 고개를 바짝 숙이며 이렇게 외쳤다.

"반갑습니다. 대부님!"

쿠웅!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