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독안파의 가건물을 차지하고 편하게 쉬고 있던 흑룡은 난데없는 기습에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흑룡이 누구인가.
고작 B급에 불과했지만, 오로지 다른 헌터와의 전투만을 연구한 진정한 싸움꾼.
북한강 상류의 시장을 비롯하여 자릿세를 받는 업장만 벌써 네 곳을 점령했다.
가평 인근에서는 가장 세력이 강한 조직 폭력 헌터 집단이 된 것이다.
"차핫!"
흑룡은 짧은 기합을 내뱉으며 목을 붙잡은 새하얀 손을 떨쳐 내려고 했다.
하지만 저항이 무색하게도 어느새 투명하게 변한 손가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흑룡은 이내 정신이 아득해지며,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
"커허어……."
털썩!
이윽고 눈을 까뒤집은 그자는 마치 쓰레기처럼 구겨져 바닥에 몸을 눕혀야만 했다.
한데 흑룡이 쓰러지고 나자, 철제 캐비닛의 그림자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마치 안개 같은 그 물질은 흑룡의 목을 붙잡았던 팔과 연결되더니, 이내 사람 형상으로 변했다.
난데없이 독안파의 가건물 내부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는 놀랍게도 블라드 유진이었다.
그는 흑룡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알 수 없는 단어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정진수, 36세. 비인가 헌터. B급 상위권 수준이로군."
흘러나온 말을 들어 보니, 흡혈로 얻은 기억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최근 정진수의 행적 중에는 유진이 원하는 정보가 전혀 없었다.
"누군가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놈은 아니네."
만약 이자가 DK와 관련이 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지시를 받는 주체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정진수는 흑룡파를 독자적으로 운용하며 세력을 넓혀 가는 단순한 조직 폭력배에 불과했다.
최근 행태를 보아하니, 매춘을 제외하고는 손을 안 대는 사업이 거의 없었다.
생산직 헌터를 납치하여 신종 마약을 만들어서, 시장에 유통하는 위험한 짓까지 하는 놈이었다.
‘……다른 놈을 찾아봐야겠다. 나중에 DK가 들를 수도 있으니까, 조치를 좀 해 둬야겠군.’
그는 마치 짐짝처럼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정진수를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흡혈 스킬을 시전하여 방금 빼앗은 혈액의 일부를 되돌려 주었다.
이윽고 새하얗게 질렸던 놈의 안색이 점차 원래대로 돌아오며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기절했던 정진수가 깨어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블라드 유진은 다시 한번 피의 권능을 끌어 올렸다.
[S급 혈성쇄혼술을 B급 대상에 시전합니다.]
[대상의 등급이 현저히 낮아, 모든 저항 요소가 상쇄됩니다.]
[‘B급 비인가 헌터 정진수’의 정신이 완벽하게 제압되어 당신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하수인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0/10]
혈성쇄혼술은 두 가지 방식으로 시전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일반적으로 기억을 조작하거나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데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피의 권능을 기술의 한계까지 끌어 올리면, 완벽한 노예로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과거의 뱀파이어들은 이런 식으로 하수인을 만들어 여러 방면으로 활용해 왔다.
대낮에는 하수인의 도움을 받아 몸을 숨기거나, 성자들이 쫓아오지 못하도록 온갖 공작을 펼쳤다.
그때는 꼭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뱀파이어 로드가 된 이후로는 태양광에 영향이 없었으며, 현대의 인간은 블라드 유진을 배척하지 않았으니까.
‘이런 떨거지까지 굳이 하수인으로 만들 필요까지는 없지.’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흑룡은 얌전히 소파로 가서 원래 그러고 있던 것처럼 길게 몸을 눕혔다.
꽤 오랫동안 유지되는 암시를 걸어 두었으니, 만약 DK가 이자에게 접촉하면 바로 알 수 있을 터였다.
여기는 이렇게만 해 놓고 가면 될 듯했다.
스윽!
암흑화 스킬을 사용하여 검은 안개가 된 유진은 문틈을 통해서 가건물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왔다 간 흔적이 조금도 없는 완벽한 침투였다.
"흐아암! 좀 피곤했나 보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흑룡은 자신이 잠깐 졸았다고만 생각했다.
가건물 내에서 당했던 습격에 관한 기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흑룡파를 시작으로 블라드 유진은 꽤 많은 수의 비인가 헌터 조직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런 걸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로군.’
DK라는 놈의 행적을 좇기 위해서 그저 몇 군데 들렀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수많은 조직을 암중에서 조종하는 흑막이 된 것만 같았다.
암흑가를 통일하고 온갖 불법적인 일을 저지른다던 DK는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나저나 이놈은 어디 있는 거지."
하지만 유진은 한 가지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이렇게 단순한 방법으로 찾을 수 있을 만한 자였다면, 이미 다른 세력에 붙잡혔을 것이다.
* * *
한편, 한국은 국토의 상당 부분을 수복하며 유례없는 대호황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성체 미궁을 정리하며 영토가 확장되자, 놀랍게도 사람들은 교외로의 이동을 선택했다.
고작 서울보다 조금 큰 크기의 땅덩이에 4천만에 육박하는 인구가 빽빽하게 들어차 살았으니, 극도의 답답함을 느꼈을 터였다.
대부분은 제대로 된 집도 없는 곳에서 노숙인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오염 경계 지역을 따라 이동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헌터가 있는 곳은 경기가 활성화되고, 그만큼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니까.
그뿐이랴, 경계 지역의 확장은 다양한 외국 헌터들의 유인 요소로도 작용했다.
특히 드라코 도무스가 있었던 양산 인근은 상당한 인기 지역이었다.
대규모 미궁이 남긴 마기가 온갖 다양한 최상위급 몬스터들을 생성했기 때문이었다.
"와! 외국계 길드가 엄청나게 들어왔네. 언제부터 한국이 이민자들의 국가처럼 되어 버렸냐?"
"그러게. 이 좁은 땅덩어리에 뭐 먹을 게 있다고 기어들어 왔어?"
"그야 마기는 옅은데, 몬스터 수준은 높으니까 그렇지."
기존의 한국 헌터들은 먹을 파이가 줄어드는 것 같아, 대부분 불편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옅은 마기와 고등급 몬스터가 공존하는 현상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사라지고 말 테니까.
그동안 어떻게든 최대한의 이익을 창출해야만 하는 것이다.
헌터들은 속속 오염 지대를 넘나들며 몬스터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한데, 지팡이를 짚은 채 그런 헌터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자가 있었다.
투블럭으로 옆은 치고 나머지는 뒤로 묶은 긴 금발, 깔끔하게 정리된 수염.
클래식한 느낌의 더블 브레스티드 자켓은 두 군데 트임이 있었다.
바지 밑단의 접힌 재봉선을 보니, 확실한 영국식 정장의 느낌이었다.
철컥! 샥!
시가 커터를 꺼내 든 남자는 캡 부분을 단번에 잘라 내고, 입김을 불었다.
"후!"
바람에 담뱃가루를 날려 보낸 직후, 밴드 레이블을 손끝으로 슬쩍 벗겨 내는 모습은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스잉! 칙! 칙!
남자는 토치 라이터로 시가 풋 부분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적당히 돌려 가며 먼저 골고루 태운 뒤, 연기를 마시며 필러에 제대로 불을 붙였다.
"후우우."
이윽고 남자는 풋 부분에 다시 한번 입김을 불어 덩치를 키우려는 불꽃을 없앴다.
그러고는 천천히 연기를 흡입했다.
"역시 시가는 더블 마두로야. 코냑이 없는 게 아쉽군."
남자는 시가를 태우며 경계 지역을 쭉 살펴보았다.
헌터들은 오염 지대로 들어가서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시장과 숙박업소에 들락날락했다.
활발하게 돌아가는 경계 지역의 풍경이었다.
물론 이곳의 구성원은 거친 헌터들이 대부분이기에, 종종 곳곳에서 험악한 장면도 연출되었다.
정부와 협회의 제어가 부족했으니, 헌터들은 알아서 규칙과 질서를 만들어 나가야만 했다.
그런 과정에서 수많은 충돌이 발생하는 건 필연이라 할 수 있었다.
"만족스러워. 내 무대가 되기에 딱 좋은 곳이다."
지팡이를 휘리릭 돌린 금발의 남자는 시가 연기를 흩날리며 시장으로 향했다.
입구 쪽으로 다가가니, 용산 시장이라는 글자가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용의 무덤이라는 대규모 미궁이 있던 곳이라서 이런 이름이 붙은 모양이었다.
입구에 늘어진 매대에는 꽤 신기한 상품도 종종 보였다.
"가상 그림 카드 팝니다! 여기 그려진 몬스터를 소환해서 함께 싸울 수 있습니다."
상인의 말대로 손바닥만 한 카드에는 무시무시한 형상의 몬스터가 그려져 있었다.
마치 카드에 갇힌 것처럼 몬스터는 연신 무섭게 포효하는 중이었다.
금발의 남자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쳐다보자, 상인이 잽싸게 다가와 호객 행위를 시도하려 했다.
그런데 문득 옆에서 큼지막한 주먹이 튀어나오더니, 상인의 안면을 후려치는 게 아닌가.
퍽!
"커헉! 왜? 왜 이러십니까?"
"야! 이 새끼야. 이딴 쓰레기를 팔아 놓고, 무사하길 바랐어?"
아무래도 상인이 헌터에게 제대로 작동되지도 않는 물건을 판 모양이었다.
하지만 넘어졌던 상인은 벌떡 일어나며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제 아이템은 성능이 확실합니다! 몬스터가 소환되지 않았나요?"
"몬스터가 나오긴 했지."
"그런데 어째서 사기란 말입니까?"
"그야 지속 시간이 절반도 되지 않으니까. 중고 카드를 신품으로 속여 팔아 놓고, 그딴 말이 나와? 정신 나갔어?"
"아, 아니 그게 어디선가 불량이……."
"발동은 멀쩡하게 되는데, 그게 어째서 불량이야? 그냥 사기 친 거지. 뒈져 이 새끼야!"
퍽! 퍼벅! 빠악!
화가 머리끝까지 난 헌터는 상인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그런 소란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주변의 누구도 폭행을 말리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일단의 무리가 우르르 몰려와 두 사람을 떼어 냈다.
"무슨 일입니까?"
"이놈이 내게 사기를 쳤습니다."
방어구를 제대로 갖춘 무리가 와서 중재하자, 놀랍게도 불같이 화를 내던 헌터가 차분해지는 게 아닌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검은 복면을 쓴 무리는 곧장 상인을 포박하고 매대의 물건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이자는 우리 멸궁파가 처리하겠습니다. 이 매대는 지금부터 폐쇄하고, 상인을 다시 배정하지요."
"그럼 우리 파티의 피해 보상은요?"
"직접 받아 드리죠."
멸궁파의 조직원이 축 늘어진 상인을 가리키며 말하자, 항의하러 온 헌터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사라지자, 소란은 완벽하게 끝나 버렸다.
그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던 금발의 남자는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정말 좋은 곳이야. 정말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남자는 순식간에 표정을 싹 굳히더니, 인파 사이로 사라진 멸궁파를 따라서 움직였다.
스윽! 스슥!
그저 가볍게 발을 놀릴 뿐인데, 금발 남자의 신형은 앞으로 쭉쭉 뻗어 나갔다.
순식간에 멸궁파를 따라잡았지만, 그자의 접근을 눈치채는 조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은신이나 위장을 한 게 아니라서 분명히 눈에 보이는데,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이윽고 본거지까지 따라간 남자는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용산 시장을 장악한 멸궁파의 보스, 조광욱이 바로 남자의 목표였다.
"어이, 친구. 나랑 사업 한 번 같이 해 보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