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70화 (71/226)

20화

순간적으로 블라드 유진의 발언을 이해할 수 없었던 조지훈은 다시 한번 되물었다.

하지만 그는 같은 말을 되풀이해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저 필요한 질문만 할 뿐이었다.

"내게 이런 의뢰를 하는 이유가 뭐지? 한국에는 S급 헌터가 둘이나 있지 않나."

전시영과 안지홍은 명실공히 세계 최고 수준의 S급 헌터였다.

최근 유진이 내뿜는 찬란한 빛에 가려져 있었지만, 합심하면 고작 S급 헌터 하나 잡지 못할 리는 없었다.

게다가 협회는 그 둘뿐만 아니라, A급 최상위의 실력자들을 동원할 능력도 있지 않았던가.

하물며 안지홍은 리브라 길드의 마스터이기도 했다.

하지만 침통한 표정을 한 조지훈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의외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명 DK라 불리는 비인가 헌터는 그저 S급이라고 추정만 될 뿐,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습니다."

"호오……. 점점 관심이 생기는군. 계속해 봐."

"예."

DK(Don’t Konw)는 제3세계의 신출귀몰한 비인가 헌터를 지칭하는 코드 네임이었다.

생김새, 국적, 나이, 성별 등 모든 것이 불명인 존재.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자가 방문하는 국가의 암흑가는 몇 년 새 수십 배로 성장하고, 거대한 범죄의 온상이 된다는 것.

DK가 최근 10년간 폭주하는 괴물로 키운 신흥 국가만 자그마치 다섯이나 되었다.

밀수, 마약, 인신매매, 불법 무기 제조 등 손 안 대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DK를 카르텔 설계자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국가적 단위의 범죄 카르텔을 만드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런 자가 한국에는 뭐 하러 들어온 거지?"

"그야 최근 저희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중이니까요."

한국은 대규모 미궁을 비롯하여 큼직한 성체 미궁을 착착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

새로 얻는 영토가 기존의 수십 배는 될 정도였으니, 곳곳에서 온갖 불협화음이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당연히 불법적인 일 또한 우후죽순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돈 냄새를 맡은 거로군. 한국 정도면 괜찮은 먹잇감이라고 생각했겠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DK의 종적은 어찌 알았나? 그자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사실 저희는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협회에서 경고해 주기 전까지는 말이죠."

한국 협회는 지금 국토를 정상화하는 데 여념이 없는 상태였다.

동원할 수 있는 헌터 자원은 모조리 긁어모아서 공략 가능한 미궁에 왕창 밀어 넣는 실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비인가 헌터가 활개 치고 다니는 것을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애초에 DK라는 놈을 잡을 능력도 되지 않고 말이다.

블라드 유진은 곁에 멀뚱멀뚱 서 있던 아크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화들짝 놀라며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 왜요?"

"의견 하나 내 봐. 들어는 줄 테니."

"어……. 미국이나 중국 같은 헌터 강국에서도 놓친 놈을 한국에서 다룰 수 있을 리가 없긴 하죠."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크웰 페리티노는 이 자리에 조지훈이 있다는 걸 순간적으로 잊어먹고 말았다.

그냥 본인의 생각을 가감 없이 그대로 말했는데, 옆에서 문득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흠흠!"

"아, 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괜찮습니다. 그게 사실이긴 하니까요."

아크웰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무래도 DK의 가치가 생각보다 더 높은 것 같았다.

범죄자라 분명 정상적인 놈은 아닐 테지만.

‘그래서 더 재밌겠군.’

강한 흥미를 느꼈으나, 유진은 섣불리 조지훈의 제안을 승낙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금전 따위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는데, 집을 얻고 나니까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그의 마음에 물욕이라는 것이 작게 자라난 것이다.

"그놈을 처리하는 대가로 뭘 해 줄 수 있나?"

"혹시 원하시는 게 있다면, 부담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조지훈의 답변에 블라드 유진은 희고 긴 손가락으로 정원의 풀밭을 가리켰다.

"나는 내 영지가 될 땅을 원한다."

조지훈은 순간적으로 얼빠진 표정을 지었지만, 그가 원하는 바를 금방 알아들었다.

합법적으로 일대의 땅을 넘기고 지금보다 더 거대한 저택을 지어 달라는 의미였다.

유진 덕분에 엄청난 면적의 국토를 회복하게 되었는데, 충분히 해 줄 수 있는 요구 사항이었다.

고개를 깊게 숙여 감사를 표한 조지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아크웰은 조지훈을 문 앞까지 배웅해 주고, 그에게 되돌아와 문득 질문을 던졌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데, 그놈은 어떻게 잡으실 거예요?"

"조지의 말에 답이 있다. 그자가 한국에 오면 하는 일이 뭐겠나."

"암흑가를 통일하고 암중에서 조종하려 하겠죠. 아! 그런 시도를 하는 자를 붙잡으면 되는 거로군요."

녀석이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하자, 그는 말없이 커피를 들이켰다.

‘어떤 놈일지 기대되는군.’

* * *

"각종 포션 있습니다!"

"아이템 수리 말끔하게 해 드려요!"

"파편에서 얻은 아이템 전량 매입합니다. 가격 잘 쳐 드릴 테니, 아무거나 갖고 오세요!"

미궁의 파편이 날아드는 오염 지대 근처에는 일시적으로 시장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마기의 경계가 시시때때로 바뀌다 보니, 예전과는 다르게 갑자기 생겼다가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헌터들의 현지 거래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시장에서 전리품을 팔고, 곧장 보급하여 재차 투입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뿐이랴, 아예 경계 지역에서 기거하는 헌터들이 넘쳐나는 지경이었다.

가평 북한강 인근에도 여러 시장이 생기는 중이었다.

최근 리브라 길드가 성체 미궁 공략에 성공하면서, 경계 지역이 급격하게 확장하는 상황이라 더욱 복잡한 느낌이었다.

콰직―!

"이 새끼가, 누가 여기서 장사하랬어?"

그런 시장 한복판에 방어구를 제대로 차려입은 헌터들이 불쑥 들어와 이곳저곳에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특히 그들의 주목표가 되는 건 힘없는 하급 헌터나, 생산 계열로 각성한 자들이었다.

"아, 아니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냐고? 장사하고 싶으면, 자릿세를 내야지. 여긴 우리 땅이거든."

"어제까지만 해도 여긴 경계 지역이었는데, 땅 주인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어제 먹었어. 자꾸 자릿세 안 내고 아가리만 놀리면, 앞으로 음식 씹어서 못 삼킨다?"

"이제 막 장사 시작했는데, 그럴 돈이……."

한 생산직 헌터가 항의해 보았으나, 자릿세를 요구하는 자들의 폭력은 가차 없었다.

뻐억!

"커헉!"

"좀 두들겨서 대충 저기 갖다 버리고, 자릿세 낼 수 있는 놈으로 들여라."

"예!"

검은 안대로 한쪽 눈을 가린 남자가 명령을 내리자, 부하들이 우르르 움직여 생산직 헌터에게 매질을 가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다른 상인들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행패가 극에 달하고 있었지만, 놈들에게 대항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자들은 인근에서 보기 드문 B급 헌터인 데다가, 협회에 등록되지 않은 비인가였기 때문이었다.

"독안파 놈들이 여기까지 와 버렸군. 장사를 접어야 하나?"

"그래도 이만큼 장사 잘되는 곳을 찾기는 어렵지. 자릿세를 내더라도 경쟁력만 있으면, 충분히 이득 볼 수 있어."

"아니, 그냥 공돈을 갖다 바치면서까지 장사를 왜 하는 거야?"

"그럼 딴 데 가 봐. 거긴 안 그러고 있나."

"하긴 어딜 가나 저런 양아치들이 넘쳐나는데, 이 정도 자릿세면 낼만 하지."

가평의 경계 지역을 장악한 조직은 독안파라 불리는 놈들이었다.

전원이 뛰어난 실력을 지닌 데다가, 상대적으로 자릿세가 합리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협회에서는 대체 뭐 하는 거야? 저런 것들 얼른 안 치우고."

"인력 싹싹 긁어모아 봐야 시장마다 사람 한 명도 배치하기 힘들걸?"

"확 그냥 뒤집어엎어 버려?"

"아서라. 몬스터보다 같은 헌터를 더 잘 잡는 놈들인데, 대체 무슨 수로?"

대부분은 폭력에 순응하며 살아갔지만, 몇몇은 힘을 모아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조직 폭력 헌터는 PVP에 특화된 진짜 싸움꾼들이었다.

등급도 낮은데 아무리 뭉쳐 봐야 저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에 독안파의 횡포를 이기지 못한 상인들은 다른 시장을 찾아서 이동했다.

그러나 가평과 별반 차이가 없거나 더욱 자릿세가 높은 곳뿐이었다.

그렇다고 길드가 자리를 차지한 경계 지역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거긴 협회에서 공인한 길드의 고정 사냥터라, 현물 거래는 아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조폭 헌터들이 장악한 시장을 이용해야만 했다.

타다다닷! 푸욱!

"커헉!"

"흐, 흑룡파 놈들의 습격이다!"

"이 개자식들이?"

"뒈져라!"

당연한 말이지만, 각 조직 간의 세력 다툼은 그 어느 시대보다 활발했다.

경계 지역 시장을 장악하면, 엄청난 이익을 볼 수 있기에 충돌은 시도 때도 없이 벌어졌다.

유혈 사태가 종종 일어났으나, 오히려 상인들은 이런 상황을 환영하는 편이었다.

저러다가 자기들끼리 공멸하기도 하고, 전투 당일과 이튿날까지는 자릿세를 걷지 않기 때문이었다.

독안파와 흑룡파의 전투가 벌어졌지만, 상인들은 분분히 일어나 자리만 피할 뿐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장사에만 충실한 것이다.

게다가 저렇게 난리가 난 동안에는 근처에 가지 않는 편이 좋았다.

괜히 얼쩡거리다가 눈먼 칼에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돈 없어서 치료도 못 받는 애꾸 새끼 주제에 어딜 나대?"

콰직―! 푸확!

"커헉!"

흑룡파의 보스는 애꾸의 복부에 무기를 박아 넣고, 잔혹하게 비틀어 버렸다.

그러자 북한강 경계 지역 시장을 호령하던 독안파 보스가 그대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애꾸의 사망 직후, 전투는 싱겁게 끝나 버렸다.

독안파 조직원들은 저항을 중단하고 그대로 몸을 날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보스가 사망한 이상, 더 버텨 봐야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흑룡파 조직원들은 방금 발생한 시체 몇 구를 오염 지대로 던져 버렸다.

사람이 몇 명이나 죽었건만, 그걸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야만의 시대라고도 할 만한 세상이었으니까.

"내일까지는 자릿세를 걷지 않을 테니, 계속들 장사하시오."

흑룡파는 상인들을 안심시키더니, 끄나풀 몇몇을 입지 좋은 곳에 박아 넣었다.

자릿세를 걷지 않는 대신,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조직의 물건을 팔려는 것이다.

당연히 그런 끄나풀들이 파는 건 하나같이 비정상적인 상품이었다.

장물이거나 온갖 괴상한 효과를 일으키는 포션이 주를 이루었다.

흑룡파의 보스는 흡족한 표정으로 시장을 둘러보다가, 독안파가 사용하던 가건물을 차지하고 사무실로 사용했다.

"이로써 벌써 세 곳째인가. 도망친 놈들은 어디로 갔는지 파악됐나?"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혹시나 치고 들어오는 놈들이 있는지 잘 감시하고."

"예!"

흑룡은 부하들을 움직여 독안파 잔당과 다른 조직의 현황을 파악하려 했다.

세력 확장에 성공한 직후가 가장 위험한 법이니까.

하지만 북한강 시장을 노리고 움직이는 조직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대신에 안심하고 방어구에 묻은 피를 닦아 내려던 흑룡의 뒤에서 기이한 움직임이 있었을 뿐.

스윽! 척!

"커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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