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69화 (70/226)

19화

"아하하! 몰래 들어오려 했는데, 들켜버렸네?"

바닥을 쭉 쓸고 와서 통유리에 부딪힌 사람은 전시영이었다.

그녀는 홍콩에서 홀연히 사라진 블라드 유진을 찾아서 곧장 한국으로 온 참이었다.

협회에서 곧장 연락이 왔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스페인행 비행기를 탈 뻔했다.

"말 좀 해 주고 가지. 괜히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늦게 왔잖아."

"당분간은 스페인에서 루시아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거야 당신이 거기……. 에휴! 됐다. 됐어."

전시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거실에 널브러져 있던 자신의 짐을 정리했다.

그녀도 S급 헌터인 터라, 웬만한 물건은 유진의 복주머니 같은 저장용 아이템에 넣고 다녔다.

그랬기에 짐이라고 해 봤자, 가방 몇 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거실에는 생각보다 더 많은 짐이 쌓여 있었다.

"엥? 이건 내 거도 아니고, 방금까지 여기 있지도 않았는데?"

전시영도 짐의 정체를 모르는 모양인지, 고개를 갸웃하며 뒤돌아보았다.

유리창 안쪽에서 먹먹한 목소리로 물어보았지만, 그라고 해서 알 리가 없었다.

유진 또한 이 집에 들어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방금까지 그가 거실에 있을 때는 저런 짐이 아예 존재치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문득 화장실 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평소와 달리, 산뜻하게 차려입은 백금발의 미녀 루시아 헤레라 레예스였다.

"아니, 당신이 여긴 왜 왔어?"

"어머! 제가 못 올 데를 왔나요?"

"복구 작업한다고 스페인으로 돌아간다며! 게다가 여긴 네 집도 아니잖아?"

"그쪽 집도 아니죠. 집주인은 따로 있지 않나요?"

"이이!"

전시영과 루시아는 마치 눈에서 레이저라도 뿜어낼 기세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고개를 홱 돌리며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짐을 챙겨 들었다.

각자 자기가 쓸 방을 찾아서 온 집 안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히히힝!"

―꺄하하하!

게다가 레니와 녹턴은 이제 로데오 놀이를 하고 있었다.

개판이 되어 가고 있는 정원의 풀밭을 돌아본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분명 한적한 교외의 고급스러운 주택일진대, 왜 이렇게 시끄러워졌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탑 공략이 끝나자마자, 녹턴을 타고 훌쩍 한국으로 돌아왔는데도 말이다.

* * *

정신없던 하루가 지나가고 이튿날이 되자마자, 블라드 유진의 집에 누군가가 불쑥 찾아왔다.

"와! 정말 너무하시네요. 유진 님."

오자마자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눈망울로 쳐다보는 녀석은 아크웰이었다.

스페인에 남겨진 녀석은 혼자서 마드리드 외곽의 주택을 사용하다가 탑 공략이 끝난 직후 쫓겨나고 말았다.

유진과 루시아가 스페인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임시 정부에서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바티칸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여긴 왜 온 거지? 이제 교황청 외교관의 신분은 필요 없는데."

드라코 도무스에 이어 스페인의 미궁 군체, 홍콩에 발생한 안테리오르 타워까지.

혁혁한 전공을 올린 그는 어딜 가나 못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한국의 TV에서도 연일 유진에 관한 뉴스를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질 유명세였지만, 적어도 각국의 헌터 협회는 절대로 잊지 않을 터였다.

미궁이 세계 각지에 자리하고 오염 지대의 범위를 계속 넓혀 가는 이상, 그의 힘이 필요한 곳은 널렸으니까.

"그래도 교황청과 연결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죠. 언제 명령이 내려올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명령? 아, 그랬지."

유진이 금제를 풀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일부러 그는 손목에 휘감긴 은빛 사슬을 끊어 내지 않았다.

거동에 불편함이 없는 데다가, 굳이 그래 봐야 교황의 경각심만 일깨울 뿐이었으니까.

지금은 자신을 꽉 잡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두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블라드 유진은 아크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명령이 내려온 게 있었나."

"아뇨. 아직은 없습니다. 탑 공략이 끝났으니, 당분간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요. 게다가 국제 사회의 상황도 그리 좋지 않고요."

"그게 무슨 말이지?"

"탑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그래서 협회 간의 마찰이 좀……. 잠시만요."

아크웰은 황급히 짐을 뒤지더니, 작은 책자 하나를 꺼냈다.

헌터 정보를 전달하는 주간지였는데, 표지에 크게 제2 냉전이라는 문구가 박혀 있었다.

"냉전? 그건……."

정윤규 교수의 기억에서 20세기 냉전 시대를 떠올린 그는 어째서 저런 문구를 사용했는지 알 수 있었다.

탑 내부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이라면, 대표적으로 두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조나단과 레프의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전시영과 왕주안의 충돌이었다.

하지만 왕주안은 4층에서 전사하였으니, 남은 건 미국과 러시아의 S급 헌터 간의 갈등뿐이었다.

놀랍게도 헌터 개인 간의 갈등은 협회를 넘어서 국가 사이의 충돌로까지 번지려 하고 있었다.

"사실 이건 한순간에 확 타오른 감정은 아니에요. 그간 쌓여 있던 것이 터져 나왔을 뿐이죠."

"흠."

"시작은 리고르 아스페라부터였어요. 그때 미국의 S급 헌터들이 거의 전멸했거든요. 이후의 보상도 시원치 않았고요."

대규모 미궁 공략에 사력을 다했던 러시아는 도움을 준 국가에 충분한 보상을 하지 못했다.

그간 국경이 닿아 있는 한국이나 중국에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것이다.

내부의 잔여 성체 미궁을 밀어내는 데도 전력을 다해야 할 판국에 남을 도와줄 여력 따위는 없었다.

게다가 전사자들에 대한 금전적 보상도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가장 피해가 컸던 미국 헌터 업계는 러시아에 언제나 불만을 품고 있었다.

조나단 잭슨이 레프 미하일로비치 알렉세이의 팀을 공격한 것도 그런 묵은 감정 때문이었다.

리고르 아스페라에 참여했다가 간신히 생환한 사람 중에 조나단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촤르르륵! 툭!

"하지만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로군."

페이지를 쭉 넘겨 본 블라드 유진은 그다지 흥미 없다는 듯이 주간지를 옆에 내려놓았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그렇긴 하죠."

"당분간은 할 일이 없을 거야. 별로 움직일 마음이 없거든."

"어……. 그럼 전 어떡하죠?"

"청소나 하든지."

우당탕탕!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2층과 연결된 계단에서 누군가가 큰소리를 내며 내려왔다.

"그, 그거 당장 안 내놔요?"

"누굴 보여 주려고 이렇게 세련된 속옷을 가져온 거야? 응? 응?"

자기들 멋대로 2층에 자리 잡은 전시영과 루시아가 발생시킨 소란이었다.

두 사람은 민망한 형태의 속옷을 들고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러는 바람에 거실과 주방 사이에 깔려 있던 러그가 밀려 엉망진창이 되었다.

"아하하! 청소가 필요해 보이긴 하네요."

"가능하면 저 여자들도 좀 조용히 시켜."

"그걸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럼 쟤들이 어지를 때마다 계속 치우든지."

말을 마친 블라드 유진은 전시영과 루시아가 뛰어다니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머그잔에 커피 한 잔을 내리고는 여유롭게 정원으로 이동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평온한 모습이었다.

"여기 왠지 잘못 온 것 같은 느낌이……."

딩동! 딩동!

아크웰이 터덜터덜 움직여 어질러진 거실을 정리하려는데, 문득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인터폰을 확인하거나 문을 열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에 손님을 맞이하는 것도 아크웰 페리티노의 몫이었다.

"어서 오세……. 어?"

"으어?"

인터폰을 만질 줄 몰랐던 녀석은 입구까지 나가서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런데 대문 앞에 서 있는 중년 남자의 얼굴이 상당히 낯익었다.

아크웰은 얼빠진 소리를 내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남자를 안으로 들였다.

"집주인에게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별로 신경도 안 쓰실 것 같네요. 들어오세요."

"하하! 그런가요?"

뒷머리를 긁적이며 정원으로 발을 들인 사람은 미궁 전략부장 조지훈이었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얍삽한 염소수염은 여전했다.

아크웰 페리티노는 속으로 면도 좀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정원을 지나 테라스로 올라갔다.

어차피 블라드 유진은 선베드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미궁 전략부장 조지……."

"인사치레는 됐어. 조지, 여긴 왜 왔나."

"아하하! 저희 측에서 제공한 집이 마음에 드시는지 확인도 할까 싶어서, 겸사겸사 들러봤습니다. 근데 제 이름은 조지가 아니라, 조지……."

"집은 꽤 마음에 드는군. 커피 기계도 편리하고. 이것도 나름 괜찮아."

그는 조지훈의 말을 두 번이나 끊으며 안경다리를 까딱거렸다.

선글라스를 쓰고 선베드에 누워 햇살을 만끽하는 모습은 마치 휴양지에 있는 것 같았다.

시원한 음료수 대신, 진한 에스프레소를 머그잔에 가득 뽑아 마시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자신의 이름을 전부 말하는 걸 포기한 조지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눈을 똑바로 떴다.

한가하게 휴가를 즐기는 모습이었지만, 눈앞의 남자는 세계 최강의 헌터 중 하나로 거론되는 사람.

부탁할 것이 있어서 찾아온 주제에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조지훈은 공손하게 손을 모으며 운을 떼기 시작했다.

"우선 한국 헌터 협회에서는 드라코 도무스와 제주도의 변형 성체 미궁을 정화해 주신 블라드 유진 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

"용건만 말해. 조지."

"……예."

온갖 미사여구를 붙이려던 조지훈은 과감하게 서두를 끊으며, 곧장 본론을 꺼내 들었다.

엄청난 태세 변환 속도에 아크웰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그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직장인들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셨던 겁니까?"

아크웰 페리티노가 옆에서 뭐라고 중얼거리든 말든 조지훈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유진에게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곧장 사진을 하나하나 짚어 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최근 제3세계에서 활동하던 비인가 S급 헌터 중 하나가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첩보입니다."

"제3세계? 비인가 헌터?"

"아, 그들은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친 헌터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존재치 않는 국가로 망명하죠."

"존재치 않은 국가라……."

나름 강대국의 반열에 드는 나라는 미궁 사태에 체계적으로 대응하면서 대부분 살아남은 상태였다.

하지만 초기 대응에 실패한 국가는 멸망을 면하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등이 딱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본토를 완전히 빼앗기지는 않았으나, 국명 자체가 바뀌어 버린 곳도 존재했다.

대응에 실패한 정부 대신 새로운 헌터 연합체가 국토를 복구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운 것이다.

원래 제3세계는 동서 냉전 블록의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은 개발 도상 국가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신흥 국가와 카르텔에 점령당한 나라를 제3세계라고 불렀다.

어찌 되었든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친 비인가 헌터들은 제3세계로 망명하곤 했다.

"그래서?"

블라드 유진은 조지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지훈은 목청을 가다듬더니, 살짝 고개를 숙이며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흠흠! 비인가 S급 헌터, DK를 붙잡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고개 숙인 조지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선글라스를 내리며 칠흑같이 검은 눈을 번득였다.

"비인가 헌터라……. 내가 어떻게 처분해도 상관없다는 조건이면 하지."

"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