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제안? 이 마당에 대체 그게 무슨 소리지?"
"간단하다. 그냥 하던 거 그대로 하라는 내용이니까."
"……."
천즈한은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가만히 노려보기만 했다.
블라드 유진의 제안 속에 숨은 뜻을 알아내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마족들은 유진이 1천 년 만에 깨어난 최후의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까.
"날 지구로 돌려보낸 다음, 붙잡기라도 할 작정인가. 그런 얄팍한 수는 소용없다. 난 이대로 돌아갈 예정이니까."
"곡해가 심하군. 네가 천즈한으로 살면서 뭘 하든 나와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그래서?"
"난 이 세상이 끝나고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걸 원하지 않아. 딱 지금 이 정도가 좋을 뿐이지."
"……오호."
담담하게 내뱉은 말에서 거짓을 느끼지 못했는지, 천즈한은 턱밑을 매만지며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제껏 탑에서 그가 보여 준 모습은 여타의 인간들과 사뭇 다르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헌터들이 얼마나 희생되든 블라드 유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모습뿐만 아니라, 내심까지 그런지는 알 길이 없었다.
천즈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어차피 그 껍데기를 버리고 도망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나?"
"그건 그렇다만."
"시험해 보면 되지. 탑을 나가서 내 제안이 옳은지 어디 한번 알아봐라."
"그때 가서 도망쳐도 늦지 않다. 이 말인가? 그렇게 해서 네가 얻는 건 뭐지?"
"……그런 것까지 알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교황청 소속이라더니, 그쪽과 관련 있는 거 아니었나?"
"좋을 대로 해석하고."
쿠구구구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탑의 붕괴는 가속화되어 벌써 5층의 일부가 무너진 상태였다.
조만간 탑은 완전히 사라질 테고, 살아남은 공략대는 홍콩의 도시 한복판으로 넘어가게 될 터였다.
결정을 내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음……."
천즈한은 저 멀리서부터 공간이 붕괴하는 걸 바라보며 낮은 침음을 흘렸다.
솔직히 20년간 공들인 신분이 아깝기는 했다.
게다가 임무를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큰 문책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당연히 그로 인해 천즈한이 소속된 세력의 입지 또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저 문책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가능성이 컸다.
결정의 시간이 다가오자, 녀석은 점점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손가락을 딱 튕기며 미소를 지었다.
"좋아. 어디 이 실낱같은 구두 계약이 언제까지 가는지 한번 두고 보자고."
결국에 천즈한은 유진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혹시나 해서 남겨 둔 마신강림은 쓸 일이 없겠군.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그는 게일드 백작과의 전투에서 몇 가지 스킬을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
대군주의 역병은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 꺼내 들지도 않았지만, 마신강림은 달랐다.
능력치와 이로운 효과를 두 배로 늘려 주는 엄청난 스킬인데, 쓰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다만, 협상이 결렬될 것을 대비하여 남겨 두었을 뿐이었다.
쿠구구구구!
이윽고 탑의 붕괴가 둘을 휙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은 흩날리는 빛 가루와 함께 홍콩 한복판에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홍콩은 사방이 온통 짙은 마기로 들어차 있고 듣도 보도 못한 몬스터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번지던 마기는 탑과 함께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
동쪽 하늘에서 고개를 내민 태양이 공략대를 밝게 비추었다.
바삭거리는 햇살이 마치 그들의 성공을 축하해 주는 것만 같았다.
* * *
[……홍콩 탑 공략에 나섰던 공략대는 최종적으로 13명만 살아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공략대장을 맡았던 중국의 S급 헌터 천즈한은 책임을 통감하고 칩거에 들어간 한편, 공략대원들의 경험담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함께했던 헌터들은 전원이 ‘천즈한은 공략대를 훌륭하게 지휘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만큼 탑 공략의 난도가 엄청나게 높았다는 사실을…….]
띠리릭!
블라드 유진은 한쪽 벽에 걸린 TV를 리모컨으로 끄며 소파에 등을 붙였다.
마치 한국인처럼 소파를 등받이로 사용한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로는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의외로 착실하게 연기하는군."
언론 인터뷰에서 눈물을 참으며 사죄하는 천즈한의 모습을 보며 그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제안을 믿지 못하겠다던 녀석은 탑을 빠져나오자마자, 정의로운 S급 헌터 천즈한 모드로 돌아가 버렸다.
정말이지 웬만한 배우는 범접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연기력이었다.
잠깐 그렇게 눈을 감고 쉬던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유리로 된 창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스르륵!
어느새 그의 손에는 따뜻한 커피가 가득 든 머그잔이 들려 있었다.
테라스와 이어진 정원의 풀밭에는 녹턴과 레니가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둘은 희한한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휘리릭! 타다다닷!
레니가 암청색 기운으로 올가미를 만들어 던지면, 녹턴이 스텝을 밟으며 피하는 놀이였다.
블라드 유진은 녀석들의 모습을 보며 테라스의 선베드에 몸을 눕혔다.
‘꽤 마음에 드는 집이야.’
넓고 최신식인 데다가 고급스러운 장식과 가구가 가득 들어찬 이곳은 한국의 헌터 협회가 마련해 준 그의 집이었다.
이곳은 유진이 최초로 정화한 성체 미궁이 있던 파주라, 나름대로 의미 있는 지역이었다.
양산의 드라코 도무스를 정화한 직후, 협회는 곧장 넓은 주택 한 채를 마련해 주었다.
사실 집 같은 것에는 큰 욕심이 없었지만, 유진은 꽤 만족하고 있었다.
협회에서 최선을 다한 흔적이 곳곳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테라스에 설치된 선베드나 음식 대신 커피를 가득 채워 둔 것까지 말이다.
"슬슬 정리를 좀 해야겠는데."
탑을 클리어한 직후, 그는 곧장 녹턴을 타고 한국으로 넘어온 참이었다.
교황청의 세력 구도는 얼추 균형을 맞춰 두었고, 이제 스페인에서는 딱히 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익숙한 장소인 한국으로 들어와 시간을 좀 보낼 작정이었다.
아무래도 1천 년 만에 깨어나서 처음 흡수한 기억이 정윤규 응급의학과 교수의 것이라서 그런 것도 같았다.
유진은 가장 먼저 능력치 정보를 열어 보았다.
<능력치 정보>
이름 : 블라드 유진(Vlad Eugene)
레벨 : 976(봉인율 45%)
등급 : SS(Lv. 901~1500)
종족 : 피의 군주
종족 효과 : 강체, 불로불사, 반신
그의 레벨은 976이 되어 있었고, 등급은 SS급으로 상승한 상태였다.
백작급의 마족을 잡았기 때문인지, 봉인율이 8%나 낮아진 것이다.
무려 등급의 범위가 901에서 1500까지나 되었지만, 어쨌거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건 사실이었다.
아직 공인된 헌터 중에서 SS급에 올랐다는 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갈 길이 멀었다.’
원래 블라드 유진의 레벨은 1,775로 EX급에 해당하는 초강자였다.
기존의 경지를 회복하려면, 앞으로 무던히 노력해야 할 터.
하지만 그는 이번 탑 공략을 마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바로 마족이라는 존재였다.
‘천즈한 그놈이 작위가 있는 마족들을 왕창 데려왔으면 좋겠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아야겠지.’
유진이 천즈한의 정체를 알아냈음에도 묵과한 건 자신의 자양분이 될 마족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게일드 백작과 같은 놈들이 줄줄이 지구로 들어온다면, 봉인율을 금방 낮출 수 있을 것이다.
그 녀석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그에게 나쁜 쪽은 아닐 터였다.
사냥감이 늘어나면, 이득을 보는 건 포식자가 될 테니까.
희미한 미소를 지은 블라드 유진은 홀로그램을 넘겨 보았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게일드를 죽임으로써 얻은 아이템이었다.
<아이템 정보>
명칭 : 악염도(惡炎刀)
등급 : SS 공격력 : SS
내구도 : S+
효과 : 맹폭(猛爆), 화신(火神)
게일드 백작의 마기로 만들어진 칼날. 끝없는 열기를 발산하며, 주변을 용암지대로 만들 수 있음.
악염도는 두껍고 삐죽삐죽한 불꽃 형상의 언월도라, 별로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유진도 소수혈인을 기다란 칼날 형태로 만들어 쓰긴 했지만, 이렇게 묵직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악염도는 무게 중심이 칼날에 너무 치우쳐 있어서 양손으로 휘두르는 게 안정적이었다.
그의 힘이라면 한 손으로도 다룰 수 있으나,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건 그냥 맹폭과 화신을 써야 할 때만 꺼내 들어야겠다.’
그는 붉은 복주머니를 열어 큼지막한 언월도를 꺼내 보았다.
그러자 후끈한 열기가 뿜어져 나와서 테라스의 대리석을 맹렬하게 달구었다.
게일드 백작이 아니라, 유진의 손에 들린 것이 불쾌하기라도 한 듯 날뛰는 느낌이었다.
"이건 좀 재미있군."
생긴 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알량한 자존심으로 항거하는 모습이 귀엽게 보였다.
일단 그는 악염도를 다시 복주머니에 넣고, 테이블에 올려 둔 머그잔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천계도살검의 페널티가 얼마나 완화되었는지였다.
유진은 살짝 기대 어린 눈빛으로 스킬 정보창을 열어 보았다.
<스킬 정보>
명칭 : 천계도살검(天界屠殺劍)
등급 : EX 위력 : EX+
사거리 : 5m + α
지속 시간 : 30초
재사용 대기 시간 : 24시간
소모 자원 : 피의 권능
효과 : 타락, 재생 억제
생각보다 페널티의 완화 폭은 상당히 컸다.
고작 3초였던 지속 시간이 10배로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재사용 대기 시간은 7분의 1로 줄어들었다.
이제 천계도살검을 하루에 한 번씩 무려 30초 동안이나 사용할 수 있었다.
이전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길이 열린 것이다.
"딱 하나가 아쉽군."
안테리오르 타워를 정화하면서 그는 상당한 개인적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게일드 백작의 혈액에서 쓸 만한 스킬을 얻지는 못했다.
그저 막대한 양의 마기를 받아들임으로써 봉인율이 크게 낮아졌다는 것뿐.
‘스킬 흡수까지 원하는 건 과한 욕심인가.’
혈액을 흡수할 때, 유진은 게일드보다 한 단계 등급이 낮았다.
그래서 그런지 스킬 습득은 물론이고, 기억까지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저 단편적인 몇 개의 장면만 희미한 사진처럼 남아서, 기억의 연관성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마계에 관한 정보는 추후에 작위가 있는 마족을 잡든지, 다른 방법을 통해서 얻어야 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4층의 시련을 끝내면서 얻었던 회의록을 꺼내 보았다.
이제 마족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지만, 175456번째 회의록의 내용을 알아보기란 어렵기 그지없었다.
전후 사정을 알 수 없으니, 블라드 유진이 건진 건 몇 개의 이름뿐이었다.
‘언젠가는 도움이 되겠지.’
남은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녹턴과 놀고 있는 레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두 녀석은 암청색 기운으로 이루어진 원반을 던지고 받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블라드 유진의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우당탕탕!
쌓인 물건이 무너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쭉 밀려온 무언가가 통유리의 하단부와 충돌했다.
통!
속도가 줄어서 유리창이 깨지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유리에 박은 무언가가 사람의 머리였다면 말이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유진은 왠지 한심한 것을 목격한 듯한 눈빛으로 유리창에 닿아 찌그러진 얼굴을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