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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67화 (68/226)

17화

츠츠츠츠츠!

게일드의 혈액은 블라드 유진의 손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넘어왔다.

원래라면 강력한 마기에 붙들려 끌려가지 않으려고 저항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완벽하게 제압당한 상태라,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끌어 올 수 있는 모양이었다.

턱!

그런데 시커먼 피가 절반가량 흡수되었을 때, 게일드 백작이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마치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 이 기술은……!"

"음?"

"대체 네놈이 이 기술을 어떻게 시전할 수 있는 것이냐?"

"……."

게일드는 저항 대신 유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녀석의 반응을 보아하니, 진정으로 놀란 듯한 눈치였다.

‘이제껏 흡혈 스킬을 알아본 자가 있었나?’

1천 년 전이라면 모르지만, 현대에서는 뱀파이어의 흡혈이 어떤 건지 아는 자가 드물었다.

그의 정체를 아는 자들도 뱀파이어가 구강이 아니라, 피부를 통해 혈액을 흡수한다는 사실은 모를 터.

하지만 게일드 백작은 흡혈 스킬을 정확하게 아는 듯한 표정이었다.

"크, 크크! 뭐가 어떻게 되었든 그래……. 이, 이게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고작 첫걸음일 뿐이고, 네놈들에게는 훨씬 많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지니……."

게일드는 공격 대신, 내장을 긁어내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저주를 퍼부어 댔다.

하지만 유진은 그런 상대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흡혈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츠츠츠츠츠!

"크어어어!"

흡혈 스킬을 최고조로 운용하여 혈액을 모조리 빨아내자, 게일드 백작의 육신은 비쩍 마른 한 구의 미라처럼 변해 버렸다.

뼈와 가죽만 남은 그것은 놀랍게도 아래에서부터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기가 모조리 빠져나간 탓에 육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다.

털썩! 파스스스스!

그는 그런 게일드의 사체를 바닥에 툭 던져 놓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말로만 떠들지 말고, 좀 더 재미있는 걸 가져와라."

게일드 백작이 완벽하게 먼지로 변하자, 블라드 유진의 눈앞에 수많은 홀로그램 글귀가 떠올랐다.

[안테리오르 타워의 최종 보스 ‘게일드 백작’ 처치!]

[이미 4층에서 보상을 획득하셨기에, 새로운 공동 보상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최종 보스가 처치되었기에, 안테리오르 타워가 철거됩니다.]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게일드 백작의 무기 ‘악염도’를 획득하셨습니다.]

[등급이 SS급으로 상승함에 따라 ‘천계도살검’ 스킬의 페널티가 조정됩니다.]

상당히 매력적인 메시지가 쭉쭉 올라왔으나, 그는 손을 휘저어 홀로그램을 통째로 지워 버렸다.

그러고는 용암 위를 팔딱거리며 돌아다니던 녹턴을 불러들였다.

탑의 공략은 끝났지만,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는 어느새 저 멀리 이동하여 맹렬한 접전을 벌이는 천즈한과 레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자."

* * *

카아아앙!

"이런 빌어먹을. 하찮은 사생아 주제에 어디서 이런 힘을 얻은 거지?"

천즈한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어느새 쇄겸으로 변한 암청색 기운을 노려보았다.

무기의 형태를 바꿔 가며 공격해 들어오니,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레니는 그렇게 변형된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숙련도가 매우 높았다.

하지만 천즈한은 게일드 백작과 동급의 마족.

놀랍도록 다채로운 공격도 점점 눈에 익어 가고 있었다.

어지러운 공방 속에서도 패턴을 찾아내더니, 금세 제대로 대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기회가 올 때마다 천즈한은 번번이 레니를 놓치고 말았다.

쿠후우우웅!

저 멀리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충격파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일드가 밀리고 있다? 이거 설마……."

헌터가 제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마계의 백작이 질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투가 이어질수록 천즈한의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감이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가끔 저들의 전투를 힐끔거릴 때마다 게일드는 유진에게 밀리는 중이었으니까.

원래의 목적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자,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레니는 천즈한의 심리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과감한 공격을 시도했다.

바로 지금처럼.

촤르르륵! 스핑―!

쇄겸의 사슬 부분이 쭉 늘어나며 검신을 감쌌다.

빙글빙글 돌던 추가 천즈한의 손목을 때리자, 검이 그대로 쭉 딸려 나오는 게 아닌가.

레니가 마치 챔질하듯 낫자루를 잡아당기니, 천즈한의 검은 허공에 떠올라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휘리리릭! 카각!

"허! 이런……."

뛰어난 기교에 놀란 듯, 놈은 다크 엘프 소녀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마기에 물듦으로써 탄생한 유사 마족 따위가 자신의 무기를 빼앗아 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게일드 백작의 전투에 계속 신경을 쏟다간 빠르게 승리를 쟁취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레니는 아무런 감흥 없는 표정으로 낫자루를 허공으로 던져 올렸다.

츠츠츠츠츠!

그러자 이번에는 암청색 기운이 장창의 형태로 변했다.

―끝이야. 위선자.

마치 유진을 닮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다크 엘프 소녀는 사령보를 펼치며 창날을 들이밀었다.

레니가 유창한 마족어를 내뱉자, 천즈한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경멸스러운 걸 본 듯한 표정이었다.

"감히 다크 엘프 따위가 고귀한 존재들의 말투를 사용하다니, 멸족하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로군."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린 천즈한은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그러자 문득 공격해 들어가던 레니의 감각에 기묘한 것이 포착되었다.

도무지 위치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곳에서 거대한 살기가 자신을 향해서 쏘아진 것이다.

불길한 느낌에 즉각 공격을 멈춘 다크 엘프 소녀는 델레오 아르마를 큼지막한 방패의 형상으로 바꾸었다.

한데, 암청색 방패가 측면을 가린 순간이었다.

쉬이이익! 콰아아아앙!

"흡!"

델레오 아르마가 순간적으로 쪼개져 버릴 만큼 거대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저 멀리 튕겨 나간 레니는 공중제비를 돌며 허공에서 신체의 균형을 되찾았다.

놀랍도록 뛰어난 몸놀림이었으나, 아직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천즈한의 손짓에 따라, 심장이 쪼그라들 정도로 강력한 살기가 다시 한번 자신을 향해서 쏘아졌기 때문이었다.

쉬이이이익!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날아들자, 다크 엘프 소녀는 쪼개진 암청색 기운을 황급히 불러들였다.

하지만 너무도 큰 충격을 받은 탓인지 델레오 아르마의 움직임은 굼뜨기 그지없었다.

첫 번째보다 더 강하게 느껴지는 후속 공격을 방어할 능력을 아직 회복하지 못한 것이다.

살짝 당황한 듯, 레니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러면 받아치기보다는 회피를 택해야 하는데, 하필이면 허공에 뜬 상태.

아무래도 천즈한은 이런 상황을 노린 모양이었다.

―사령보.

스윽! 씌이이잉―!

그러나 다크 엘프 소녀는 어둠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지며, 보이지 않는 공격을 피해 냈다.

타닷!

레니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천즈한이 바라보던 정반대 편이었다.

사령보로 수백 미터 거리를 눈 깜짝할 새에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회심의 일격이 실패했는데도 천즈한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쉬이이이익!

그저 손을 휘저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재차 날려 보낼 뿐이었다.

레니는 아무리 피하려 해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결국에 수동적으로 막아 내기보다는 상대의 무기를 쳐 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투명한 공세의 정체를 알아내는 건 물론이고, 더 이상 마음껏 공격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천즈한의 공격은 그저 미세한 기척과 살기만 느껴질 뿐, 어디서 어떻게 날아오는지 감지할 수가 없었으니까.

방패로 막은 건 순전히 운이 좋아서 할 수 있었던 거였다.

게다가 레니의 델레오 아르마는 아직 정상적인 기능을 회복하지 못했다.

반쪽짜리 무기를 들고 저 무지막지한 공격을 튕겨 내야 하는 것이다.

―어렵다.

어느새 레니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만큼 엄청난 압박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였다.

쉬이이이익!

천즈한의 공격이 지척까지 다다랐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다크 엘프 소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짤막한 단검을 들어 올렸다.

기능이 저하된 델레오 아르마로는 이런 형태밖에 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희미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뒤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느껴졌다.

두두두두두! 카아앙!

흠칫 놀라며 돌아본 레니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게일드 백작과 싸우고 있었던 블라드 유진이 불쑥 나타나 뭔가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잡아챈 것은 쇄겸의 사슬에 걸려서 저 멀리 날아갔던 천즈한의 검이었다.

"신기한 기술이로군. 형태를 완벽하게 감추는 데다가, 기척까지 극도로 억제하다니."

유진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검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외견은 평범해 보이는데, 아이템 정보는 사뭇 대단한 모양이었다.

"그 더러운 손 치워라."

스핑―!

천즈한이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젓자, 붙잡혀 있던 검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러더니 주인에게로 쏜살같이 날아가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블라드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1층에서 사람을 넘어뜨린 무기겠군. 그럴 때는 유용하겠어."

"네놈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게일드 백작은……."

그를 발견한 천즈한은 미간을 좁히며 뒤쪽을 휙 돌아보았다.

용암이 가득하던 대지는 어느새 희미한 붉은빛만 간헐적으로 내뿜으며 식어 가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껏 무시했던 홀로그램 글귀가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최종 보스가 처치되고, 탑이 철거된다는 내용이었다.

레니와의 전투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게일드 백작이 죽은 줄도 몰랐던 것이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로 게일드를 쓰러뜨릴 줄이야."

천즈한은 새삼 놀랍다는 표정으로 블라드 유진을 바라보았다.

일반적으로 마계가 아닌 곳에서 마족은 힘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구와 달리 탑은 게일드의 영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장소.

마계와 거의 비슷한 환경이라 마족의 능력을 최대치로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게일드 백작은 패배하고 말았다.

지구에서도 마기를 사용하는 괴상한 존재에게.

직접 목격했지만,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쿠구구구구!

1층에서부터 시작된 탑의 소멸은 벌써 4층까지 도달한 모양이었다.

바닥을 타고 심상치 않은 진동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별 희한한 놈들 때문에 원대한 계획이 초장부터 어그러지다니."

"절반의 성공은 거둔 것 아닌가. 탑은 무너졌지만, 헌터들의 수효는 충분히 줄였지."

유진이 마계의 의도를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자, 천즈한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내 식어 가는 용암에서 시선을 거두며 주억거렸다.

"저 버러지 같은 놈에게 들은 건가."

"그렇다."

"거의 다 알고 있는 모양이니, 까놓고 말해 주지. 헌터들에게 절반의 성공을 안겨 주는 것이 원래 우리의 목적이었다."

"4층까지만 허용하고, 나머지는 남겨 둘 요량이었나."

"……."

그의 답변에 천즈한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블라드 유진이 마계의 의도를 더 정확하게 유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탑의 5층만 남겨 둔 채 전멸하면, 공략대는 절반의 성공만 거두게 되는 거였다.

마기의 확산은 저지할 수 있지만, 최상위급 헌터의 수효는 확실하게 줄어들게 될 터.

차원문을 연결하고 마족들이 넘어오기에 최적의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게일드 백작과의 대화를 통해서 알아낸 사실을 그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늘어놓았다.

"그러는 이유는……. 차원문 때문이겠군."

"게일드 그 자식이 별소리를 다 했나 보네. 결국에 이 짓도 끝이로구나. 공들인 완벽한 신분을 내다 버리게 생겼어."

천즈한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모든 게 들통났으니, 이제 S급 헌터 노릇을 하며 온갖 공작을 벌이는 짓은 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런데 문득 천즈한의 귀에 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분까지 버릴 필요 없다. 대신 제안 하나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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