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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66화 (67/226)

16화

"천즈한."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블라드 유진은 저도 모르게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공략대와 함께해야 할 인물이 난데없이 나타난 데다가, 최종 보스를 구한 상황이었다.

감정 변화가 거의 없는 그라고 해도 조금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진의 다음 행동은 천즈한을 놀라게 하고야 말았다.

쉬이이익!

"헙!"

상대를 확인했음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게일드 백작과의 거리를 좁혔다.

소수혈인의 붉은 칼날이 목을 일격에 날려 버릴 기세로 휘둘러지자, 당황한 건 되레 천즈한이었다.

"젠장!"

녀석이 빠르게 손짓하자, 자취를 감췄던 날카로운 기운이 블라드 유진의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그저 기척을 감추고 있었을 뿐, 주인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대로 소수혈인을 휘두르면, 그는 천즈한의 무기에 등허리가 꿰뚫리고 말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게일드를 죽일 기회를 날려 먹을 수는 없었다.

‘위력이 얼마나 강하든 몸으로 때운다.’

유진은 천즈한의 공격을 버텨 낼 각오로 소수혈인을 그대로 쭉 그었다.

한데, 뒤에서 짓쳐 든 공격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랐다.

콰칭―!

둔중한 충격이 전신을 덮치자, 소수혈인의 궤적이 틀어지고 말았다.

게일드 백작의 목을 날리는 것도 실패하고, 강력한 공격에 당하기까지 한 최악의 상황.

하지만 옆으로 튕겨 나간 블라드 유진의 몸은 의외로 상당히 멀쩡한 상태였다.

타닷! 치이이익!

바닥을 긁으며 몸의 균형을 잡은 그는 무심코 자신의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꽤 반가운 얼굴이 유진의 등을 받치고 있었다.

"네가 있었구나."

천즈한의 검을 튕겨 낸 건 암청색 쇄겸이었다.

블라드 유진의 그림자에 녹아들어 있던 레니가 위기의 순간에 튀어나와 공격을 막아 낸 것이다.

게일드 백작을 끝장내지는 못했으나, 그렇다고 큰 손해를 보지도 않았다.

이제 싸움은 2 대 2의 원점.

게일드가 빈사 상태에 빠졌으니, 유진이 근소하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분명 혼자였는데?"

천즈한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레니를 노려보았다.

지척에 다다를 때까지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았는데, 대체 저 소녀는 어디서 튀어나온 거란 말인가.

방금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되풀이해 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의문이 가득했으나, 천즈한은 자신이 할 일을 잊지 않았다.

게일드 백작의 앞으로 슬쩍 발걸음을 옮기며 보호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놈의 걸음을 보는 순간, 의문만 가득하던 그의 뇌리에 한 줄기 뇌전이 꽂히는 것 같았다.

‘공을 탐했기에 날 공격하려던 게 아니라, 게일드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딱 한 조각이 빠져 있던 머릿속의 퍼즐.

천즈한의 미묘한 움직임에서 유진은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시련의 중심에는 저놈이 있었다.’

1층의 시련, 죽음의 구름다리에서 천즈한은 넘어진 여성 헌터를 구했다.

사막에서 팀을 나누고, 제단에서 이름을 쓴 것도 모두 저자가 주축으로 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4층에서는 어떠한가.

"왕주안을 죽이고 동쪽 팀을 몰살시킨 게 너였군."

"이제야 눈치를 채다니 실망스럽군. 하긴 힌트가 좀 적기는 했지. 내 연기도 완벽했고 말이야. 근데 그것뿐일까?"

"1층에서 그 여자를 넘어뜨린 것도 네놈인가."

"오호? 그럼 마지막 문제. 5층에서는 뭘 했는지 알겠나?"

"……."

능글능글하게 웃어 대는 천즈한을 바라보며 유진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현혹을 걸어서 공략대를 찢어놓은 거로군. 마기의 영향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어."

"이거 봐. 내가 힌트를 더 주면 큰일 난다고 했지? 20년이나 공을 들인 내 정체까지 드러났잖아."

천즈한은 게일드 백작을 돌아보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마족어를 사용해서 그런지, 상당히 중요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거침없이 떠들어 댔다.

그러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게일드가 비칠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시뻘건 안광을 빛냈다.

하지만 아무리 마기를 끌어 올려도 그에게 당한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젠장."

치이이이익!

결국에 게일드 백작은 악염도에서 불꽃을 피워 올려 복부에 갖다 댔다.

강력한 화염에 살갗이 녹아내리자, 그제야 출혈을 막을 수 있었다.

"그래. 만만치 않은 놈이야. 방심하지 마라."

"방심하다 당한 건 내가 아닌 것 같은데."

"시끄러워. 기껏 전송한 탑인데, 여기서 잃을 수는 없어. 어떻게든 놈을 막아야 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벌써 정체가 드러나 버리면, 원대한 계획을 실현할 수가 없잖아?"

두 녀석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면서 유진을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당장 덤벼들 마음은 없는 듯했다.

‘시간을 끌려는 거로군. 게다가 내가 마족어를 습득했다는 걸 모르고 있다.’

천즈한이 헌터로 위장한 게 벌써 20년이나 되었다는 거나, 탑이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건물이라는 사실.

자기들끼리 떠들지 않았다면, 절대로 알아낼 수 없을 정보였다.

놈들의 계획대로 작전이 진행된 상황에서는 절대로 누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알아듣지 못하는 척 가만히 있어 보았지만, 아쉽게도 두 녀석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편에 딱 달라붙어 있던 레니에게 말을 걸었다.

"천즈한을 묶어 둘 수 있겠나. 이제 남은 건 싸움뿐이다."

―웅. 거기까지는 가능.

레니가 고개를 까딱이며 답하자, 블라드 유진은 곧장 천즈한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가 오른쪽."

스윽―!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그의 육신은 시커먼 안개에 휩싸여 앞으로 쭉 쏘아졌다.

암흑화로 몸을 숨긴 채,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해 나간 것이다.

그런데 레니의 모습 또한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유진의 안개 밑에 생긴 그림자를 통해서 비슷한 속도로 함께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다 돌진하던 그가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트는 순간.

왼쪽으로 몸을 날린 레니가 암청색 기운을 크게 휘둘렀다.

채찍의 형태로 변한 무기가 마치 뱀처럼 날아들어 천즈한의 검을 잡아채려 했다.

쉬이익―! 쩌어엉!

"으읏! 이거 짜릿한데?"

하지만 천즈한이 반사적으로 검을 내리긋는 바람에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다크 엘프 소녀의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스핑―! 쩌저정! 쩌정!

둘로 나뉜 레니의 채찍이 연속으로 날아들자, 천즈한은 방어하는 데 급급했다.

레니는 유진의 요구를 완벽하게 수행해 냈다.

게일드로부터 천즈한을 떼어 내고 비교적 성공적으로 발을 묶은 것이다.

그러는 동안, 블라드 유진은 게일드 백작의 정면으로 유유히 접근할 수 있었다.

쉬이익―! 콰칭!

소수혈인과 악염도가 부딪치자, 무시무시한 기파가 공기를 찢어발길 듯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만약 어중간한 헌터가 근처에 있었다면, 충돌로 튕겨 나간 작은 기운에 적중당해 유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둘의 격돌은 천외천의 수준이었다.

"그저 재미있는 놈으로만 봤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하구나. 후후."

쉴 틈 없이 공방을 주고받는 중에도 게일드는 꽤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하지만 느긋한 말투와는 달리, 녀석의 움직임은 다급했고 본능적으로 복부를 보호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천계도살검에 당한 상처는 아무리 뛰어난 회복력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바로 복구할 수가 없으니까.

뭔가 특별한 방법을 쓰지 않으면 회복하는 게 불가능할 터였다.

‘확실히 약해졌다.’

소수혈인을 받아치는 악염도는 이전과 같이 압도적인 불길을 뿜어내지 못했다.

당연히 단단한 바닥을 먼지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강력한 폭발 또한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마기를 잔뜩 머금은 채,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지는 소수혈인을 막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조금만 더 압박하면 승리가 눈앞이었다.

천즈한과 레니의 전투가 어떻게 되든 이자만 처리한다면, 탑은 끝나게 되어 있었다.

"네놈이 원하는 대로 될성싶으냐? 맹폭(猛爆)!"

기이이잉―! 슈팍! 콰아아앙!

그의 의도를 파악한 모양인지, 게일드는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뻘건 불길을 일으켰다.

물질을 먼지로 갈아 버릴 만큼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였던 바로 그 기술이었다.

유진의 공격을 받아 내면서도 꾹 참으며 기회를 엿보다가 적절한 순간에 펼친 것이었다.

놈의 선택은 매우 탁월했다.

붉은 칼날이 아찔하게 스쳐 지나가는 상황이 연속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지금 스킬을 써서 유진을 밀어내지 않았다면, 소수혈인에 모가지가 잘려 나가고 말았을 터였다.

"아쉽군."

일진광풍과 함께 몰아치는 화염, 영혼마저 찢어발길 듯한 기세가 담긴 불꽃.

저런 무지막지한 위력이라면, 제아무리 강력한 유진의 육신으로도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맹폭을 피해 물러났던 그는 혀로 입술을 살짝 핥았다.

방금은 딱 한 번의 공격 기회만 더 있었어도 상대의 목을 베어 버리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천계도살검에 당해서 그런지, 공세가 이전만큼 날카롭지 않다.’

물러난 김에 슬쩍 뒤쪽의 상황을 살피자, 레니는 천즈한을 꽤 잘 상대하고 있었다.

잠깐 나눈 대화 내용으로 유추해 봤을 때, 천즈한은 게일드 백작과 동급인 것 같았다.

하지만 다크 엘프 암살자 특유의 스킬 덕분에 상당히 잘 버티는 중이었다.

물론 전투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결국에 쓰러지는 건 레니가 될 것이다.

그가 직접 상대해 보니, 마계의 백작은 SS급 정도로 추정되었으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군.’

소수혈인을 고쳐 잡은 유진은 게일드 백작을 향해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후욱! 훅!"

게일드는 이제 입에서까지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악염도의 기운이 체내에서도 발현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흰자위까지 시뻘겋게 물든 게일드 백작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 게일드 안테리오르가 네놈의 피를 마시고 살점을 뜯어먹어 주마. 악염도 화신(火神)!"

쿠화아아아!

놈의 전신을 감싼 화염은 주변의 모든 것을 녹이고 있었다.

자신이 서 있던 바닥까지도 용암에 뒤덮여 버렸지만, 게일드의 신형은 아래로 푹 꺼지지 않았다.

놈은 허공에 둥둥 뜬 채로 유진을 향해서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움직임은 굼떴으나,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용암의 속도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지면을 모조리 녹여서 그가 발 디딜 틈도 없게 만들려는 것 같았다.

용암이 지척까지 다가왔지만, 블라드 유진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저 나직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을 뿐이었다.

"녹턴."

푸확―!

용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름을 부르자, 돌연 그림자에서 유령 군마가 튀어나와 솟구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녹턴은 용암에 갇힌 유진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게일드 백작에게로 날아갔다.

"이건……!"

자신의 아래쪽에서 난데없이 뭔가가 나타나자, 게일드는 흠칫하며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유령 군마의 육중한 몸체는 지척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사방으로 화염이 맹렬하게 번져 나가고 있었지만, 녹턴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녀석은 투레질하며 달려들더니, 방향을 휙 돌리며 게일드 백작의 복부를 후려갈겨 버렸다.

"이히히히힝!"

콰직―!

강력한 뒷발차기에 게일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쭉 튕겨 나갔다.

하필이면 천계도살검에 당한 부위를 다시 한번 얻어맞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그런 게일드 백작이 도착한 곳은 블라드 유진이 서 있던 용암 위의 섬이었다.

피의 권능에 의하여 용암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대로 계속 있다간 육신이 녹아 없어져 버릴 터였다.

화신 상태가 된 게일드가 이곳에 툭 떨어졌으니까.

휘이이잉―! 털썩! 치이이익!

벌써 섬이 점점 용암으로 변해 갔으나,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발 디딜 곳이 없어지기 전에 최종 보스를 죽여 버리면 그만이고, 녹턴도 이쪽으로 날아오는 중이었으니까.

"크아아악!"

게일드 백작은 그제야 괴성을 지르며 발악하기 시작했다.

피부를 녹여서 막아 두었던 천계도살검에 당한 상처가 다시 도졌기 때문이었다.

후우웅! 푸캉!

눈이 뒤집힌 게일드가 악염도를 휘두르자, 유진은 소수혈인을 간결하게 들이밀었다.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그는 화염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제 게일드 백작이 쏟아내는 화염이 그리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블라드 유진은 상대와 직접적으로 검격을 나눌 수 있었다.

극도로 약화한 상태였지만, 게일드의 악염도는 그를 위협하기에 충분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손톱이 부러졌어도 사자는 사자란 말인가.’

맹렬하게 휘몰아치는 악마의 도법(刀法)에 유진은 연신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결단코 밀린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는 그저 섬의 가장자리를 돌면서 게일드 백작의 공격을 무수히 받아 내고만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블라드 유진의 소수혈인이 급격한 변화를 보였다.

스핑―! 푸확!

지친 게일드가 보인 미세한 빈틈, 찰나의 순간에 끊긴 흐름을 포착하고 두 자루의 칼날을 동시에 쑤셔 박은 것이다.

하나는 악염도의 도첨(刀尖)을 후려갈겼고, 나머지는 정확히 복부에 꽂혀 들었다.

"커헉!"

이로써 게일드 백작은 천계도살검에 당한 자리를 두 번이나 더 공격받게 된 것이다.

털썩!

치명적인 피해를 보게 되자, 게일드의 무릎이 절로 꺾였다.

"재롱은 잘 봤다. 꽤 화끈하더군."

유진은 게일드 백작을 오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투명하게 변한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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