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폭사!’
블라드 유진이 쏘아 보낸 건, 검은색으로 번들거리는 네 개의 큼지막한 송곳이었다.
전시영을 통해서 초열지옥 역풍의 발현 형태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게일드 백작은 급속히 접근하는 파훼법을 시도했다.
노란색 폭발 구체는 공간을 뛰어넘어 이동하는 거라, 비교적 정확한 좌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좌우로 움직이는 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고 해도, 목표가 정면으로 쇄도할 때는 이야기가 달랐다.
하지만 게일드의 노림수를 간파한 그는 역풍을 취소하고 곧장 폭사 스킬을 발동했다.
폭사는 투사체를 날려 보내는 형식이니, 상대가 알아서 다가와 주면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스핑―! 콰지지직!
제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닌 마족이라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피격당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본인의 빠른 속도로 인해 반응할 수 없었던 게일드 백작은 가슴팍에 네 개의 송곳이 꽂히고 말았다.
"이건……. 예상 못 했군."
급격히 속도를 줄인 게일드는 자기 가슴의 상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중이었으나, 놈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저 신기한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볼 뿐이었다.
스르르륵! 투두두둑!
그러기를 잠시, 시커먼 네 개의 송곳이 절로 빠져나오더니 바닥에 툭툭 떨어져 내렸다.
어느새 게일드 백작의 가슴에 생겼던 구멍은 완벽하게 메워져 있었다.
마치 어떠한 피해도 없었던 것처럼 육신을 감싼 옷까지 완벽하게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저자가 입고 있는 옷 또한, 아무 능력 없는 천 쪼가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역시 넌 흥미로워. 근 수백 년간 내 몸에 상처를 낸 존재는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야."
"미안하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하긴 나약한 인간만이 가득한 지구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그 기록도 오늘 깨지게 되겠군."
쿠구구구구!
게일드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지면을 타고 미약한 진동이 전해졌다.
그러자 놈의 발치가 쩍쩍 갈라지더니, 그곳에서 검붉은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삐죽삐죽한 형태의 거대한 언월도가 상대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척!
마치 불꽃 또는 불규칙한 톱과도 같은 형태의 칼날은 실전과 영 거리가 먼 듯한 느낌이었다.
크기도 상당해서 예술 작품 또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무기였다.
하지만 게일드 백작은 검붉은 언월도를 손가락만으로 빙글빙글 돌리더니, 옆으로 가볍게 휘둘렀다.
쿠후우우웅!
중병기를 한 손으로 다루고 있음에도 장난감을 갖고 노는 듯, 조금도 힘에 부치지 않아 보였다.
‘따라 하라면 못할 건 없지만, 굳이 저러고 싶진 않군.’
순간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유진은 결단코 상대를 경시하지 않았다.
검붉은 언월도에서 신경을 거스르는 압박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마 저 무기에는 상당한 힘이 깃들어 있을 터였다.
"어디 이번에는 네 재롱을 좀 볼까?"
기이이이잉―!
아니나 다를까, 게일드가 든 언월도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귀청을 찢을 듯한 소음과 함께 불꽃처럼 보이는 칼날이 덩치를 두 배 이상으로 키우며 실제로 일렁이고 있었다.
슈팍! 콰아아아앙!
상대가 자루를 가볍게 휘두르자, 거대한 화염 칼날이 유진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그는 암흑화로 신체의 속도를 끌어 올리며 가볍게 몸을 피했다.
그러자 바닥에 작렬하며 암석을 마구 녹여 대던 언월도가 대뜸 옆으로 홱 돌아갔다.
거의 직각으로 방향을 바꾸며 블라드 유진을 쫓아서 움직인 것이다.
‘역시 쉽지 않은 적수다.’
놀라운 공격 전환에 감탄할 새도 없이 그는 곧바로 대응책을 내놓아야만 했다.
계속 저런 식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바꿀 수 있다면, 피해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피의 권능을 끌어 올리며 양손을 아래로 떨쳤다.
스잉! 스이잉!
그러자 커다란 소수혈인의 칼날 두 개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그는 쌍검을 교차하여 그 사이로 언월도의 칼날을 막아 냈다.
쩌어어어엉!
바로 그 순간, 무시무시한 충격파와 함께 후폭풍이 전신을 덮쳐 왔다.
모든 물질을 갈아 버릴 듯한 위력이 주변을 휩쓸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진의 모습만은 멀쩡했다.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던 바닥은 그야말로 가루가 되어 버렸지만.
아무래도 저 언월도는 뭔가와 충돌하는 순간, 대폭발을 일으켜 일정 범위를 완전히 쓸어버리는 능력이 있는 듯했다.
위력을 보아하니, 초열지옥 역풍 정도는 가볍게 상회하는 것 같았다.
그 단단하던 5층의 지면이 먼지가 되어 흩날리는 수준이었으니까.
"악염도(惡炎刀)와 정면으로 겨루고도 멀쩡하다니……."
살짝 놀란 듯한 목소리였으나, 게일드 백작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정말로 이 전투 상황을 즐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반면에 블라드 유진은 방금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전력을 다하고도 쓰러뜨리기 쉽지 않은 놈이야.’
봉인이 완벽하게 풀렸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피해 없이 이기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예 넘어설 수 없는 벽은 아니었다.
‘단 한 번의 방심. 그거면 충분하다.’
그는 피의 권능으로 소수혈인을 강화하며, 게일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덤빌 테면 덤벼 보라는 기세가 돋보였지만, 공격할 마음은 전혀 없는 듯한 태도.
게일드 백작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악염도를 빙글빙글 돌렸다.
"아예 피해가 없지는 않은 모양이지?"
기이이잉―! 슈팍! 콰아아앙!
언월도의 화염 칼날이 날아들자, 모든 물질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폭발이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유진은 소수혈인을 앞세워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내기 급급했다.
폭발의 막강한 위력에 소수혈인이 부러지면, 곧장 피의 권능을 끌어 올려 복구하며 재차 방어에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게일드는 광소를 터트리며 더욱 맹렬하게 악염도를 놀렸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아주 잠깐의 공백이 생겼을 때였다.
폭발의 반발력으로 인하여 검붉은 언월도가 측면으로 살짝 밀리는 순간, 그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혹시 모르니 몇 가지 스킬은 아껴 두자.’
[EX급 스킬 ‘천계도살검(天界屠殺劍)’이 시전되었습니다.]
[‘권능 폭발’로 인해 ‘천계도살검’이 EX급 최대치의 위력으로 적용됩니다.]
[‘안테리오르 타워의 주인 게일드 백작’이 끝없는 공포를 느낍니다.]
[게일드 백작의 악염도(惡炎刀) 맹폭(猛爆) 스킬이 취소됩니다.]
아직 상대방도 전력을 다하지 않은 상태라, 그는 권능 폭발과 천계도살검만 사용했다.
굳이 한 번에 모든 패를 다 드러낼 필요는 없었으니까.
츠팟―!
"허억!"
빈틈을 관통하고 들어간 보랏빛 섬광이 게일드의 명치를 꿰뚫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빛을 잃어 가던 악염도가 다시 한번 급격하게 불길을 키웠다.
슈팍!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대폭발이 일어나자, 유진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그는 천계도살검을 놓고 양손에 열 줄기의 소수혈인을 발현했다.
콰가가가각!
바닥에 손톱을 박아 넣자, 튕겨 나가던 블라드 유진의 신형이 빠르게 속도를 줄였다.
문득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지면에 기다란 열 개의 고랑이 파여 있었다.
피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소수혈인이었지만, 탑의 5층 바닥을 완벽하게 갈라 놓지는 못했다.
이런 강도의 암석을 먼지로 분쇄해 버리는 악염도의 위력이 새삼 그의 등줄기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크아아아! 크아아!"
콰지짓! 찌지지직!
한편, 천계도살검에 적중된 게일드 백작은 괴성을 지르고 말았다.
범접할 수조차 없는 무시무시한 마기가 체내로 파고들어 극강의 고통을 선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놈의 비명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쉭―!
지속 시간이 끝난 천계도살검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버린 탓이었다.
물론 게일드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쁜 일이었지만.
"허억! 헉!"
털썩!
상대는 비틀거리며 몇 발 앞으로 움직이더니, 이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마기를 끌어 올려도 명치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데다가, 은근한 통증도 계속되었다.
후두둑! 투두둑!
시커먼 혈액이 명치의 상처에서 주룩주룩 빠져나가자, 게일드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생각보다 훨씬 더 피해가 심각한 것 같았다.
"크으으! 대, 대체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기술……."
"원래는 다른 놈들을 상대하려고 만들어진 건데, 마족에게도 꽤 유용하군."
저벅! 저벅!
어느새 몸을 일으킨 블라드 유진은 상대를 향해서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지척에서 악염도가 터졌기에 그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폭발을 막고자 왼팔로 피의 권능을 넓게 퍼뜨렸는데, 완벽하게 방어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보니, 왼쪽 팔 전체가 거의 뼈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게일드 백작과는 다르게 유진의 상처는 느릿하게나마 회복하는 중이었다.
스슥! 타다다닷!
그가 끝장을 보기 위해 게일드의 근처까지 다가갔을 때, 뒤에서 뭔가가 빠르게 접근해 왔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숨을 헐떡이는 천즈한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마기에 저항하며 전력으로 달려온 모양인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헉! 헉! 유진 님!"
"길을 잃지 않고 잘 찾아왔군."
"이곳에서 번쩍이는 무언가를 봤습니다. 덕분에 금방 올 수 있었죠."
"다른 대원들은?"
"……마족들과 전투 중입니다."
천즈한의 대답에 유진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몸을 돌려 게일드 백작을 향해서 계속 걸어갈 뿐이었다.
왜 전투 중 이탈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최종 보스를 처치하는 게 우선이니까.
다행히 천즈한과 이야기를 나누는 잠깐 사이에 게일드가 회복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척! 스이잉!
놈의 앞에 멈춰선 그는 무심하게 소수혈인을 뽑아 들었다.
상당한 힘을 지닌 놈이라 육신을 몇 번 잘라 낸다고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계도살검에 당해서 극도로 약화한 지금이라면, 충분히 끝장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블라드 유진은 거대한 붉은 칼날을 휘둘러 게일드 백작의 목을 날려 버리려 했다.
후우웅! 스팟―!
그런데 바로 그때, 무언가가 그의 등을 노리고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이대로 소수혈인을 그어 버리면 게일드의 머리통을 분리할 수는 있겠지만, 유진 또한 상당한 상처를 입게 될 터였다.
그만큼 후방을 노리고 날아드는 공격이 내포한 힘은 무시무시한 수준이었으니까.
‘쯧.’
속으로 짧게 혀를 찬 그는 암흑화를 사용하며 흩어지듯 공격 궤적에서 벗어나 버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게일드 백작의 정면으로 향하던 은밀한 기척이 그대로 딱 멈추는 게 아닌가.
자신을 노린 공격의 정체를 확인한 블라드 유진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말았다.
상당한 힘을 지닌 뭔가가 쏘아진다는 건 알아차렸는데, 막상 시야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공격이 멈추자마자 거대하게 느껴지던 존재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깝네. 보낼 수 있었는데."
투명한 무언가의 기척이 사라지자, 왠지 낯선 목소리가 귀에 꽂혀들 듯 들려왔다.
문득 뒤를 돌아보자, 의외의 인물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건들건들한 자세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