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64화 (65/226)

14화

칠흑 같은 마기의 안갯속을 헤매던 공략대는 이내 기습을 가하던 괴물들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 시발점은 루시아의 외침에서부터였다.

"이놈들은 마족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징그러운 괴물인데, 무조건 마족이지."

전시영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지만, 루시아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최상급 마족과는 차이가 있어요. 아무래도 우리가 마기에 현혹된 것 같습니다."

그녀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방금 쓰러뜨린 괴물의 옆구리를 깃발 창의 철준(鐵鐏)으로 쿡쿡 찔렀다.

그러자 기절했던 괴물이 꿈틀거리더니, 깜짝 놀라며 버둥거리는 게 아닌가.

하는 행동 양식은 영락없이 질겁하며 발버둥 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럼 이게 우리 대원이라는 말이야?"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방금 잡은 최상급 마족과는 전혀 다르죠. 우릴 두려워하고 있잖아요."

"그건 그러네. 마족들은 아마 눈을 뜨자마자 미친놈처럼 달려들었을 테니까."

"마기에 현혹되었다는 건 알았는데, 어떻게 푸는지는 모르겠네요."

"힐러들이 풀 수 있지 않을까?"

"우린 힐러가 없잖아요."

"얘 힐러 아니야? 딱 봐도 그런 거 같은데."

최상급 마족과 몇몇 괴물들은 엄청나게 강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도 기절시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는데, 이 녀석은 걸려들자마자 자빠뜨릴 수 있었다.

탑의 5층에서 이만큼 약한 자가 존재할 수 없을 테니,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전시영이 가리킨 괴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루시아는 바닥에 쭈그려 앉더니, 손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수화요. 혹시나 배웠을지도 모르잖아요?"

"바티칸의 힐러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네. 말이 통해?"

"가만히 좀 있어 봐요."

루시아의 노력이 통한 모양인지, 줄곧 도망칠 궁리만 하던 괴물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였다.

자세를 바로 하고 그녀와 수화로 대화를 시작한 것이다.

잔뜩 썩어 문드러진 손이었으나, 수화를 알아보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윽고 화색이 돈 루시아는 빠르게 원하는 바를 전달했다.

그러자 괴물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닌가.

츠츠츠츠츠!

"으어?"

전시영은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흉측한 괴물의 모습이 점차 익숙한 사람의 형태로 바뀌어 갔기 때문이었다.

"진짜 힐러잖아?"

"허! 이런 거였다니. 그럼 이때까지 우리 편이랑 싸운 거예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힐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지금껏 자신이 만났던 괴물들이 모두 동료였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좋아. 이런 식이면, 공략대를 금방 한곳에 모을 수 있겠는데?"

"전투가 계속될수록 손해 보는 건 우리입니다. 얼른 움직이죠."

"좋아. 넌 반대편 잡아."

"네."

두 사람은 힐러의 양쪽에서 팔짱을 끼고 연행하듯 들어서 움직였다.

기절했다 깨어난 터라, 힐러의 다리에 힘이 풀렸기 때문이었다.

타다다닷!

이윽고 그들은 또 다른 괴물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최상급 마족과는 확연히 다른 형태에 공략대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루시아가 수화로 말을 거는 동안, 힐러는 정화 능력을 발현하여 상대의 상태 이상을 치료했다.

거리가 상당했지만, 힐러의 수준이 높았기에 금방 한 명의 현혹을 풀어 버릴 수 있었다.

"어? 잠깐만, 루시아 님? 어, 어떻게……."

전시영과 루시아는 뿔뿔이 흩어졌던 공략대원들을 속속 모으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들은 안지홍과 천즈한의 무리까지, 공략대를 한 자리에 집결시켰다.

물론 몇몇 A급 헌터와 힐러가 보이지 않았지만, 최소한 S급은 아무도 죽지 않은 듯했다.

"열세 명밖에 남지 않았다니……. 참담하군요."

정화 능력을 통해서 정신을 차린 천즈한은 일행을 둘러보며 낮은 탄식을 토해 냈다.

공략대라고 해 봐야 고작 스무 명뿐이었는데, 그중 일곱이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남은 건 S급 여섯에 A급 셋, 힐러 네 명이 전부.

이 전력으로 최종 보스를 상대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촤르륵!

"음?"

그런데 문득 공략대의 측면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원들은 반사적으로 무기를 들어 올리며 기습에 대비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커먼 안개를 뚫고 일전에 보았던 최상급 마족들이 불쑥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콰직!

"크아악!"

마기의 현혹에서 벗어난 덕분인지, 공략대원들은 흩어지지 않고 똘똘 뭉쳐서 싸웠다.

서로를 괴물로 인식하지 않았기에, 정상적인 대응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순조롭게 마족들의 습격을 극복해 내고 있었는데,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발생했다.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번득이는 섬광이 안개를 뚫고 퍼져 나오는 게 아닌가.

찌이이이잉!

"헉! 저게 뭐야?"

깜짝 놀란 대원들이 한눈을 판 사이, 최상급 마족들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한데, 그 빛을 본 천즈한이 눈을 크게 뜨며 공략대원들을 향해서 외쳤다.

"최종 보스입니다! 누군가 최종 보스와 싸우고 있어요!"

"아!"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전시영과 루시아는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천즈한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종 보스와 전투를 벌이는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무지 그쪽으로 이동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마기로 가득한 안개를 뚫고 어떻게 거기까지 간다는 말인가.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제가 먼저 가서 지원하겠습니다."

타다다닷!

천즈한이 전투에서 빠져나오며, 자진하여 어둠 속으로 몸을 날리는 게 아닌가.

루시아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천즈한이 사라진 안개를 힐끔 쳐다보았다.

"괜찮을까요?"

그러자 전시영이 노란빛 구체를 연신 날려 대며 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안 괜찮겠지! 얼른 처리하고 우리도 따라가자고!"

* * *

스피잉! 쩌어엉!

피의 권능이 집약된 소수혈인의 맹공이 이어졌지만, 게일드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불길한 보랏빛을 발하는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 공격을 막아 내기만 했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느긋한 발걸음이었음에도 블라드 유진의 공격은 모조리 튕겨 나갔다.

일단 소수혈인을 가다듬은 그는 슬쩍 물러나더니, 원을 그리며 천천히 돌았다.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의도를 알아챈 모양인지, 게일드 백작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놈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문득 말을 걸었다.

"왜? 압도하지는 못하겠나?"

"애석하게도 그렇군. 어중간하게 상대해서는 안 되겠어."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더욱 흥미로워. 한데 ‘하등한 놈들 사이에서 어떻게 이런 물건이 존재할 수 있을까? 왜 저따위 너절한 것들을 돕는 거지?’ 하는 의문이 들더군."

"돕는 게 아니다.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거지."

"그래? 상당히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얼추 이해가 가긴 하는군. 하긴 넌 저들이 얼마가 죽어 나가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지."

게일드는 블라드 유진의 심리까지도 꿰뚫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제껏 암중에서 유심히 관찰한 모양이었다.

그는 상대가 대화를 지속할 의사를 보이자, 소수혈인을 슬쩍 내리며 말을 이었다.

마침 탑의 주인을 만났으니, 그간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게일드 백작은 유진과 이야기하는 걸 즐기는 듯 보였으니까.

살살 잘 구슬린다면, 꽤 좋은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긴장을 늦추지는 않았다.

"탑을 지구로 보낸 목적이 뭐지? 헌터의 수효를 줄이려는 건가."

"그런 예리한 질문이라니, 이거 부담되잖아."

"대답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의도가 불 보듯 뻔해서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될 것 같군."

"아아, 우리의 원대한 계획이 그딴 식으로 간략화되는 건 원치 않는데 말이야. 너무 식상하고 단순한 이유라고 생각되지 않나?"

"때로는 가장 단순한 게 진실일 때도 있는 법이지."

"허!"

게일드는 작게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검지를 까딱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 탑은 뭐랄까, 헌터 따위의 수효를 줄이려고 만든 게 아니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던데."

"그거야 인간 놈들이 너무 약해서 올라오다 죽은 거고."

"그럼 탑은 왜 만든 거지?"

"일종의……. 전초 기지라고 해두지."

"……!"

그는 게일드 백작의 말을 듣자마자, 뇌리로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크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루시아에게서 받은 계시록의 내용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잇따라 성배의 아이템 정보에서 보았던 한 단어가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차원문? 설마 이 녀석들 마계와 지구를 연결하려고 하는 건가?’

미궁은 몬스터를 내보내는 용도고 탑은 마족을 지구로 이동시키는 수단이라 한다면, 모든 게 들어맞았다.

이제껏 미궁에서는 마족의 존재가 전혀 없었으니까.

한편, 탑에서는 여태 그 어떤 몬스터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세운 가설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서 게일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탑을 통해서 지구로 넘어오고 싶은 건가?"

"후후후. 거기까지 유추하다니 상당히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야."

"그렇다면……."

"그 이상은 알려 주고 싶지 않네. 이제 네놈의 능력이 궁금해졌거든."

쉬이이익―! 쩌어어엉!

지금껏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던 게일드 백작은 눈 깜짝할 새에 유진의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야말로 공간 이동에 버금가는 엄청난 속도였다.

은근히 긴장감을 끌어 올리고 있지 않았다면, 그로서도 제때 반응하지 못할 뻔했다.

소수혈인을 쳐올려 응조수를 막아 내기는 했는데, 손 전체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뱀파이어 종족의 강체 효과로도 충격을 온전히 완화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그의 기를 꺾을 수는 없었다.

블라드 유진은 검지를 빙글빙글 돌리며 노란색 구체를 생성하더니, 상대와 슬그머니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게일드가 입술을 뒤틀어 올리며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그 기술도 아주 잘 알고 있지. 네가 이용하는 그 붉은 머리 여자의 것이었지? 폭발하는 거였던가. 하지만 명확한 약점이 있군."

쉬이이익―!

게일드 백작은 조금 전처럼 어마어마한 속도로 다가오더니, 허공에 거대한 네 줄기의 상흔을 남겼다.

그저 자그마한 응조수에 불과했던 보랏빛 기운이 급격하게 커져서 그의 전신을 덮쳐 온 것이다.

재빠르게 거리를 좁혀서 폭발 위치 계산을 어렵게 함과 동시에, 방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

초열지옥 역풍을 상대할 때, 가장 효과적인 대응법 중 하나였다.

척!

뒤로 물러나던 유진은 순간적으로 속도를 줄이더니, 되레 앞으로 튀어 나가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의외로군. 이렇게 단순할 줄이야."

"뭐?"

간결하게 주먹을 내뻗자, 시커먼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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