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63화 (64/226)

13화

힐러의 납치를 저지한 인물은 암흑화에서 빠져나온 블라드 유진이었다.

은발을 휘날리며 잠깐 멈춰선 그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손을 뻗어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그런 다음 체중을 실어 그대로 바닥에 손을 내리찍는 게 아닌가.

턱! 콰아앙!

그러자 굉음이 터져 나오며 번득이는 광채와 함께 누군가가 형체를 드러냈다.

마치 사람처럼 생겼지만, 창백한 피부에 팔까지만 시커멓고 온몸이 뒤틀린 모습.

생김새와 옷차림으로 보아, 공략대원은 아닌 것 같았다.

푸확!

한데, 놀랍게도 상대는 유진의 손아귀에서 유유히 벗어났다.

단단히 붙잡힌 손을 풀어내지 못하자, 자기 신체 일부를 뜯어냄으로써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다.

굉장히 뛰어난 결단력의 소유자였다.

타닷! 쉬쉭―!

"어엇! 유진 님!"

"어디 가!"

그가 도망친 놈을 따라서 안개 속으로 몸을 날리자, 루시아와 전시영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기가 가득한 어둠은 몬스터와 마족에게 최고의 은신처와도 같기 때문이었다.

공략대원들의 입장에서는 블라드 유진이 너무 무리한 추격을 펼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피와 어둠의 군주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으니까.

쉬이이익! 콰직―!

암흑화로 신체를 어둠에 동화시킨 유진은 엄청난 속도로 상대에게 따라붙어 등허리를 꿰뚫어 버렸다.

소수혈인이 쑤셔박히자, 녀석은 몸을 뒤틀며 괴성을 질러 댔다.

"재빠르지만, 그게 다인가. 그래도 대놓고 기습한 배짱은 인정해 주마."

"키에엑! 어, 어□□ □아 □지?"

놈이 뭐라고 지껄여 댔으나, 여전히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츠츠츠츠츠!

왼손을 투명하게 만든 그는 상대의 뒷덜미를 붙잡고 암청색 혈액을 마음껏 빨아들였다.

그러자 버둥대며 저항하던 녀석의 움직임이 극도로 느려졌다.

[최상급 마족 대전사의 기억 중 일부를 흡수했습니다.]

[온전한 마족어를 익혔습니다.]

[흡혈 스킬의 등급이 낮아, 그 외의 기억을 가져오는 데 실패했습니다.]

역시나 이 녀석의 정체는 마족이었다.

바닥에 머리통이 쑤셔 박힌 녀석의 혈액을 섭취하자, 유진의 머릿속으로 새로운 정보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탑의 근원이나 제작자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그저 마족어와 관련된 단편적인 내용뿐이었다.

"아직 의식이 있나?"

"크륵! 어떻게 우리 말을?"

"그야 알 것 없고, 여기가 어딘지 좀 알려 줬으면 하는데."

"긍지 높은 우리 종족이 도전자 따위에게 정보를 넘겨줄 성싶으냐? 그냥 죽여라."

"깔끔하게 죽여 줄 수는 없지. 그건 너무 자비로운 처사 아닌가."

"……."

"난 네놈을 개처럼 끌고 다니며, 끝없는 절망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넌 이제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푸확!

등허리에 박힌 소수혈인을 뽑아내자, 다량의 혈액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이윽고 최상급 마족의 육신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블라드 유진이 놈의 혈액을 조종하여 회복력을 극도로 끌어 올렸기 때문이었다.

취리릿! 처적!

그는 녀석의 몸에서 뽑아낸 혈액으로 기다란 올가미를 만들어 목에 걸고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최상급 마족의 육신이 저절로 끌려왔다.

놀랍게도 유진이 손을 뗐음에도 놈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올가미를 구성하는 피의 권능에 구속되어 항거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 것이다.

그는 녀석을 끌고 유유히 공략대로 돌아갔다.

한데, 열여덟 명이어야 할 공략대원의 수효가 절반 이하로 팍 줄어 있었다.

"흩어졌군. 왜 나뉜 거지?"

* * *

"저렇게 막 가도 되는 거야?"

"유진 님이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넌 저 사람을 너무 믿는 경향이 있더라?"

"그럼 당신은 안 믿는다는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과신은 좀 자제하자는 거지."

전시영과 루시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커먼 안개 속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짙은 마기로 가득한 탓에 가시거리는 고작 몇 미터도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저 멀리 가 버린 블라드 유진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괜히 멀어지지 말라고."

"당연하죠. 그렇게 안 생겨서는 겁이 참 많네요."

"야! 이게 무서워서 그러는 건 줄 아냐?"

"그렇게 보이는……. 으힉!"

무심코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던 루시아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바로 옆에서 걷고 있던 팀원은 어디 가고, 혐오스럽게 생긴 괴물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타액이 뚝뚝 떨어지는 길쭉한 입이 벌어지자, 촘촘히 박힌 수백 개의 이빨이 드러났다.

"캬아악―!"

"으악!"

후우웅! 쩌정!

괴물이 아가리를 쫙 벌리며 들이민 탓에 루시아는 반사적으로 깃발 창을 휘둘렀다.

그러자 강한 충격을 받은 괴물이 어둠 속으로 튕겨 나가고 말았다.

"뭐야? 왜 그래?"

"바, 방금 뭔가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아까 그놈이야?"

"그 녀석보다 더 징그럽게 생겼던데요."

"조심하라고. 내가 볼 때 여긴 온통 몬스터 밭인 거 같으니……. 까!"

쿠화아아아!

전시영은 말꼬리를 흐리더니 마지막 음절을 강하게 뱉으며 양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시퍼런 화염이 쏟아져 나와 측면에서 불쑥 튀어나온 괴물을 불태웠다.

깜짝 놀라긴 했지만, 긴장을 끌어 올리고 있었기에 바로 반응할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루시아 쪽을 바라보았는데, 뭔가 이상한 점이 포착되었다.

"어? 근데 다들 어디 갔어?"

"그러게요. 분명히 근처에서 같이 걷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기습에 대응하느라 흩어진 모양이네. 일단 누구든 좀 찾아보자고."

"그러죠."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던 평소와는 달리 어깨를 딱 붙인 채, 서로에게 의지하며 동료를 찾아 헤매고 다녔다.

* * *

한편, 공략대가 나뉜 걸 확인한 블라드 유진은 가장 가까이 있던 헌터를 향해 접근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레프와 안지홍의 팀이었는데, 총원 다섯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다가가자, 대뜸 S급 헌터들이 무자비하게 공격을 퍼붓는 것이 아닌가.

쉬쉭! 후우웅!

‘왜 이러는 거지?’

유진은 암흑화를 시전하며 물 흐르듯 공격을 회피했다.

그러고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의 행동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또 나타났습니다. 무슨 몬스터가 저렇게 빠르고 강한지 모르겠군요."

"홀로그램을 살펴보니, 최상급 마족이라더군. 당연히 4층에서 봤던 놈들보다 훨씬 강할 수밖에."

"아무튼 공략대와 떨어졌으니, 평소보다 더 조심해야겠습니다."

"그러세."

레프와 안지홍은 영어로 떠듬떠듬 의사소통하며 한곳에 똘똘 뭉쳤다.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접근해 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저들은 나를 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아무래도 뭔가에 현혹된 모양이로군.’

아마도 공략대원들이 저러는 건, 5층 전체에 충만한 마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이곳에서 의심해 볼만 한 건 딱 그뿐이었으니까.

‘나와라. 녹턴.’

두두두두두!

블라드 유진은 공략대원들과 접촉할 생각은 버리고, 동반자 정보창에 잠들어 있던 녹턴을 불러냈다.

역시나 녀석은 마기로 인해 주변이 칠흑같이 변해 버렸음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녹턴을 타고 허공으로 날아오른 다음, 5층 전체를 훑으며 천천히 돌아다녔다.

곳곳에 자리한 최상급 마족의 수효는 그리 많지 않았다.

놈들도 마기가 너무 짙은 탓에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가지만 않으면, 공략대를 감지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한꺼번에 치고 들어오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슬슬 보스가 나올 때로군."

2층에서 겪었던 사막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광활했는데, 5층의 암흑은 그 정도까지는 아닌 듯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유진은 천즈한의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데, 안타깝게도 전투를 벌이던 중에 천즈한은 혼자 무리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고군분투하는 그자의 모습이 보였지만, 그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가 버렸다.

어차피 다가가 봐야 아군으로 인식하지도 못할 테니까.

‘살펴보지 않은 곳은 여기뿐인데.’

천즈한을 지나친 블라드 유진은 미지의 공간으로 쭉쭉 나아가며 최종 보스가 있을 만한 곳을 탐색해 보았다.

그러자 지금껏 경험해 왔던 5층의 전경과 사뭇 다른 듯한 장소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찾았다."

삼중으로 올려진 기단(基壇) 중앙에 우뚝 서 있는 큼지막한 석제 의자.

그곳에 앉아서 유진을 직시하는 창백한 얼굴의 남자.

인간과 흡사한 생김새였지만, 키는 대략 2.5m 정도에 갈고리 같은 손톱이 특징적이었다.

그자의 주변으로는 기묘한 보랏빛 마기가 파도치듯 일렁이고 있었다.

"역시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가, 마기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군. 그래서 이토록 빠르게 도달할 수 있었을 테지."

남자의 입에서 음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유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마치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아는 듯한 발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마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걸 아는군."

"당연하지. 너처럼 특이한 녀석을 몰라볼 리가 있나. 정말이지 흥미롭군. 지구에 이런 존재가 있었다니."

상대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눈앞으로 수많은 홀로그램 글귀가 떠올랐다.

[탑의 주인, 게일드 백작의 권능과 마주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감소합니다.]

[스킬 최종 피해량이 10% 감소합니다.]

[지속적인 정신 피해를 받게 됩니다.]

[일정 이하로 정신력이 소진되면, 조현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저 말을 하는 동안 기세를 슬쩍 흘려보냈을 뿐인데, 온갖 약화 효과가 유진에게 적용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이 정도쯤이야 피의 권능을 일으켜서 해제할 수 있으니까.

투웅―!

블라드 유진이 피의 권능을 끌어 올리자, 온몸에 가해지던 압력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다시 한번 홀로그램 글귀가 떠올랐다.

[게일드 백작의 권능에 저항합니다.]

[모든 약화 효과가 해제됩니다.]

[피의 권능과 마주한 게일드 백작이 경계심을 갖게 됩니다.]

압박을 날려 버린 그는 게일드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기만이 심하군. 자신의 성을 지켜 달라더니."

"그게 마족의 특성이지. 우린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대상에게는 얼마든지 거짓을 말할 수 있거든."

"내게는 말장난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데."

"아니, 인정할 때는 또 확실히 하지. 반드시 자신보다 강자에게만 말이야."

"흥미로운데."

게일드 백작의 대답에 블라드 유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자를 숭배하고 무조건 따르는 것이 마치 뱀파이어 사회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척! 척!

그가 기단 위로 발걸음을 옮기자, 게일드도 거무튀튀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치직! 치지직!

점점 다가갈수록 둘 사이에서 맹렬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권능이 중간에서 만나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진과 게일드 백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척까지 다가가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멈췄다.

치지지지직!

시선을 마주친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손톱을 뽑아냈다.

스이잉! 챠앙!

시뻘건 색으로 빛나는 소수혈인과 게일드의 보랏빛 응조수(鷹爪手)가 중앙에서 부딪치자, 기묘한 충격파가 일어났다.

하지만 그와 게일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방금의 한 수는 그저 본격적인 전투 전의 글러브 터치나 기수식(起手式)에 불과했다.

싸움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소수혈인을 통해서 들어온 충격을 음미하던 블라드 유진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넌 얼마나 재미있을지 궁금하군."

그러자 게일드 백작 또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쪽도 마찬가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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