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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62화 (63/226)

12화

루시아는 황급히 천즈한의 목을 받쳐 주며 흉갑을 두드려 보았다.

텅텅!

"천즈한 씨, 괜찮습니까?"

"크윽! 와, 왕주안 그 자식이 배, 배……."

"그럼 동쪽 팀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허억! 헉! 제, 제가 앞을 막는 동안, 그놈이 전부 도륙……. 그 사실을 뒤늦게……. 아, 알아차리고 반격했습니다."

천즈한이 떨리는 손을 힘겹게 들어 올리자, 루시아의 시선이 반대편 도랑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천즈한의 검에 당해 널브러진 왕주안이 있었다.

너무도 심각한 상처라, 이미 절명한 것 같았다.

루시아는 그 주변으로 널린 팀원들의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 큰 외상이 없는 거로 보아, 암살자 계열 딜러인 왕주안의 솜씨인 것 같았다.

고개를 세차게 흔든 그녀는 머릿속에서 팀원들의 죽음은 지워 버리고, 천즈한에게 집중했다.

"상처가 심합니다. 빨리 힐러에게 데려가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겠어요."

"나, 난 괜찮으니 얼른 성문부터 막아 주십……."

"아! 성문!"

천즈한의 힘없는 중얼거림을 들은 루시아는 고개를 번쩍 들어 성문을 바라보았다.

활짝 열린 동쪽 성문으로 수많은 마족이 우르르 몰려드는 중이었다.

[남은 마력 탑의 내구도.]

[18%]

다행히 전시영이 마력 탑을 잘 방어하는 중인 모양인지, 내구도는 18%에서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서 계속 몰려드는 마족들을 전부 막을 수는 없을 터였다.

초열지옥 십지폭쇄 같은 엄청난 위력의 스킬은 재사용 대기 시간이 길고, 에너지 소모도 많을 테니까.

"일단 여기서 좀 기다리고 계세요. 우리 팀원이 금방 도착할 겁니다."

"……부탁합니다."

루시아는 천즈한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깃발 창을 휘두르며 마족 군단의 측면을 꿰뚫었다.

"풀고르 글로부스!"

후우웅! 쿠콰콰콰!

백색 뇌전이 나아가며 주변의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자, 진입하던 마족들의 기세가 주춤했다.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성문 앞으로 뛰쳐나가며 맹렬하게 창을 휘둘렀다.

콰과광!

"크윽!"

일단 마력 탑의 붕괴 위기는 벗어난 듯 보였지만, 동쪽 성문은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다.

루시아 혼자서는 도무지 이 넓은 성문을 막을 수가 없었다.

강력한 스킬로 신위를 발하던 그녀는 이내 마족들에게 둘러싸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한쪽 벽을 등지고 적들을 막아 냈는데, 이러면 결국에 성문이 절반가량 열린 거나 다름없었다.

"……이래서 천즈한 씨가 당할 수밖에 없었구나."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이런 지옥 같은 상황에서 아군이라 생각했던 자가 암살을 시도하면, 피할 방도가 없을 것 같았다.

한데, 그녀를 무시한 채 성문 틈을 지나가는 마족들이 점점 많아지는 순간이었다.

"메시아의 빛(Light of Messiah )!"

"저희가 왔습니다!"

루시아의 몸 이곳저곳에 난 상처가 빠르게 아물면서 각양각색의 번득이는 기운이 날아들었다.

쿠콰콰쾅! 퍼벅!

전시영을 도와서 마력 탑 주변의 마족들을 정리하던 남쪽 팀이 드디어 성문에 도착한 것이었다.

지원 사격이 이어지자, 그녀는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도랑에 처박혀 있던 천즈한도 힐러의 치료를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이제 탑의 네 번째 시련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휴! 다행이군. 그나저나 괜찮으실까?"

루시아는 혼자서 남쪽 성벽을 맡고 있을 블라드 유진을 떠올리며 마족들을 도륙해 나갔다.

마족 군단 웨이브가 대체 언제까지 이어질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 * *

[일출이 다가왔기에, 4층의 시련이 종료됩니다.]

[최종적으로 남은 20인에게는 게일드 백작의 치하가 이어집니다.]

[게일드 백작의 보물 창고에서 한 가지 아이템을 획득하십시오.]

[보물 창고와 다음 층으로 향하는 게이트가 마력 탑 앞에 생성되었습니다.]

[아이템 획득 제한 시간은 30분입니다.]

[남은 시간.]

[29분 59초.]

[29분 58초.]

……

눈앞에 뜬 홀로그램을 본 공략대원들은 허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4층으로 올라올 때 66명이었던 공략대 중에서 살아남은 자는 고작 20명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3층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빌어먹을 시련은 도전자 수를 원하는 만큼 줄이고 나서야 멈추었다.

남은 공략대원은 S급 헌터 7명에 A급 헌터 6명, 마지막으로 힐러 7명.

왕주안이 죽었지만, 나머지 S급 헌터들은 전원 살아남았다.

강자들이 생존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참 의문이 들었다.

"다들 괜찮습니까?"

"네……. 뭐, 힐러분들 덕분에 상처는 없습니다. 조금 지칠 뿐이죠."

천즈한의 질문에 대답한 건 안지홍이었다.

항상 유쾌하고 낙관적인 성향의 안지홍마저도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만큼 공략대의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보상을 획득할 시간은 30분밖에 없군요. 얼른 들어가서 챙겨 나온 다음, 휴식을 좀 취합시다."

아군이라 여겼던 왕주안에게 기습당한 후유증인지, 천즈한의 얼굴은 핼쑥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S급 중에서는 배신자가 없으리라 여겼는데, 왕주안이 바로 그 배신자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자가 3층의 배신자라고 확정 지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모든 정황이 왕주안을 가리키고 있었다.

위기 상황에서 천즈한과 팀원들을 기습하는 건 배신자 말고는 할 수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힘든 사건을 겪었지만, 천즈한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공략대를 이끌었다.

대원들은 참담한 얼굴이었으나, 마력 탑 옆에 생성된 황금색 게이트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스팟―! 스팟―!

게이트를 넘어가자 왠지 익숙한 느낌의 창고가 눈에 들어왔다.

‘드라코 도무스의 보물 창고와 비슷하군.’

블라드 유진을 비롯한 한국 헌터들은 드라코 도무스의 보물 창고에서 아이템을 얻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보상이 마련된 게이트에 진입하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천즈한은 공략대장답게 앞으로 나가려는 대원들을 불러세웠다.

"가장 전공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순서대로 들어가겠습니다. 첫 번째는 혼자서 남쪽 성문을 지킨 유진 씨입니다. 그다음은 동쪽으로 지원을 온 루시아 씨, 마력 탑을 지킨 전시영 씨 순으로 하는 게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S급 다음은 선착순 자유 선택으로 가죠."

천즈한의 통제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물 창고의 아이템을 쭉 둘러보았다.

사실상 그에게 장비 아이템 같은 건 크게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책자나 알 수 없는 기운을 뿜어내는 독특한 물건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서적과 관련된 것들은 한쪽 벽의 책장에 쭉 모여 있었으니, 찾기는 꽤 쉬운 편이었다.

유진은 책 제목을 훑으며 옆으로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루치□ 일족의 야사(野史), □물을 길들이는 108가지 □□? 별로로군.’

대부분은 제목이 괴상한 데다가, 고유 명사는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중에서 유진의 눈에 띈 건, 상당히 고급스러운 표지의 얇은 책자였다.

‘회의록?’

그는 뭔가에 이끌리듯 검지로 책자를 빼냈다.

척! 스팟―!

그러자 표지를 제대로 살펴보기도 전에 블라드 유진의 신형이 번쩍이며 사라져 버렸다.

보상을 선택했으니, 보물 창고에서 추방된 것이다.

바깥으로 나온 그는 홀로그램을 통해서 책자의 아이템 정보를 살펴보았다.

<아이템 정보>

명칭 : 마계 원로회 회의록

등급 : ???

내구도 : 파괴 불가

효과 : 알 수 없는 언어 기록

175456번째 회의록.

촤르르륵!

‘이거 흥미롭군.’

페이지를 빠르게 넘겨 본 유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회의록의 내용 중 일부를 알아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한 대로 깨알 같은 마족어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하지만 고유 명사를 비롯한 중요한 부분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이 책자를 완벽하게 해석하려면, 좀 더 높은 등급의 마족 혈액을 섭취해야 할 것 같았다.

스팟―! 스팟―!

홀로그램을 살펴보는 동안, 아이템을 선택한 S급 헌터들이 속속 보물 창고 바깥으로 튕겨 나왔다.

하지만 A급 헌터와 힐러들이 아이템을 고를 때까지 천즈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지막까지 기다렸다가 보상을 선택할 요량인 듯했다.

‘너무 정의로운 인간은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이윽고 천즈한이 보물 창고 밖으로 튕겨 나왔다.

슈우우웅!

그와 동시에 황금빛 게이트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남은 건 다음 층으로 가는 푸른 게이트뿐.

하지만 누구도 먼저 발걸음을 옮기려는 사람이 없었다.

공략대장인 천즈한마저도 선뜻 출발하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마실 물이며 식량이 극단적으로 부족해졌지만,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동료들을 대부분 잃은 상태라, 공략대의 사기는 바닥을 쳤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체력을 좀 더 회복한 다음에 위층으로 발을 들여야 할 것 같았다.

"조금만……. 쉬겠습니다."

"그러시죠."

천즈한도 정신적으로 지친 모양인지, 대원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서 휴식을 취했다.

* * *

"이제 가야 할 때입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 천즈한은 공략대원들을 불러 모았다.

마음을 좀 추스른 모양인지, 안색이 이전보다 나아 보였다.

그렇게 최후의 20인은 5층을 향해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스팟―! 스팟―!

"여긴 뭐야? 분위기 한번 살벌하네."

5층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온통 시커먼 안개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를테면, 양산의 드라코 도무스에서 겪었던 공기 중의 지독한 마기와 흡사했다.

숨이 턱턱 막혀 오는 데다가,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아서 공략대원들은 황급히 간격을 줄였다.

안전을 위해서 가시거리 내에 동료를 두려는 행동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5층으로 들어오자 대원들의 눈앞에 지긋지긋한 홀로그램 글귀가 떠올랐다.

[5층에 진입함으로써 시련의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다섯 번째 시련의 규칙이 공지됩니다.]

[최종 보스, 탑의 주인을 공략하십시오.]

[최종 보스 외에 수많은 마족이 도전자를 찾아갈 것입니다.]

[시간제한은 없지만, 마기가 시시각각 숨통을 옥죄어 올 예정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공략에 성공하는 것이 생존에 도움 되는 행동일 겁니다.]

"아! 5층이 마지막인 모양입니다."

앞으로 시련이 몇 개가 되었든 현재 남은 전력과 보급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이 마지막 시련이라고 하자, 공략대원들은 없던 힘도 생기는 기분이었다.

최종 보스만 잡으면, 한계를 시험하듯 헌터들을 죽여 대는 탑에서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마기 때문에 숨을 쉬는 것조차도 힘들었지만, 대원들의 얼굴에는 희망이 깃들었다.

안개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시커먼 손이 A급 헌터 한 명을 낚아채 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쉬익―! 덥석!

"으아아악!"

괴성과 함께 동료 한 명이 사라지자, 공략대원들의 긴장감이 확 고조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마기 속에서 대체 뭘 어떻게 대응해야 한단 말인가.

"S급이 외곽으로 빠집시다. 힐러와 A급은 최대한 뭉치십시오."

천즈한의 명령에 따라 진형을 바꾸었으나, 두 번째로 날아든 손의 기척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쉬익―! 덥석!

"허억!"

한데, 힐러 한 명이 의문의 손에 붙잡히는 순간이었다.

턱!

진형 안쪽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시커먼 손의 주인을 부여잡는 게 아닌가.

그러자 끌려가던 힐러의 몸이 그대로 딱 멈췄다.

그와 동시에 나직한 목소리가 속삭이듯 질퍽한 마기 속에 울려 퍼졌다.

"이거 좀 재미있는 놈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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