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중급 마족 전사의 기억 중 일부를 흡수했습니다.]
[언어가 완전치 않아, 마족어 사용이 제한됩니다.]
[온전한 마족어를 사용하려면, 더 높은 등급의 혈액을 흡수하십시오.]
‘아직도 안 되는 건가.’
남쪽 성문으로 몰려든 놈들은 중급 마족이었다.
무기에 일렁거리는 시커먼 마기의 위력과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보아하니, A급 헌터 수준은 되는 듯했다.
하급 마족 암살자들의 신체 능력이 최하급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면, 이놈들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게다가 확연하게 차이가 날 정도로 무기에 깃든 마기의 형체가 큰 녀석들도 있었다.
‘저놈들은 그럼 상급 마족이란 말인가.’
수효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공략대의 A급 헌터들에게는 상당한 위협이 될 것 같았다.
중급 마족이 A급과 비슷하다면, 상급은 그보다 더 뛰어난 수준일 테니까.
루시아도 그 사실을 깨달은 모양인지, 깃발 창을 휘두르며 유진에게 말을 걸었다.
"저것들이 상급 마족이라면, 얼추 A급 최상위와 맞먹겠는데요? 스킬은 제외하고 신체 능력만 놓고 보면요."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군."
"아무래도 상급부터 빨리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건 내가 맡을 테니, 넌 성문을 지켜."
"네!"
쑤화악! 퍼석―! 콰가가각!
그는 소수혈인을 거침없이 휘두르며 성문 앞으로 몰려든 중급 마족들을 우수수 쓰러뜨렸다.
마치 귀찮은 파리를 쫓는 듯한 가벼운 손놀림이었는데, 강인한 육체의 마족들이 뭉텅이로 나가떨어졌다.
"이, □□ 뭐□¡ □ □□게 □해¿"
"□아¡"
사막에서 봤던 하급 마족 암살자들과는 달리, 이 녀석들은 목소리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블라드 유진의 귀에도 마족어가 들려왔지만, 완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홀로그램의 글귀가 알려 준 것처럼 마족어가 제한되었기 때문인 듯했다.
‘그럼 이놈은 어떨까?’
쉬이익! 텁!
암흑화를 시전하여 몸을 검은 안개로 만든 그는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며 한 녀석을 잡아챘다.
상급 마족으로 짐작되는 놈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유연하게 꿈틀거리면서 몸을 빼내는 게 아닌가.
손쉽게 붙잡혔던 중급 마족과는 달리, 신속한 몸놀림이었다.
처적! 후우웅!
게다가 녀석은 무기에서 시커먼 마기를 왈칵 뿜어내며 반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물론 유진은 고개만 살짝 까딱이는 거로 검격을 피해 버렸지만.
"네놈은 상대할 맛이 좀 나는구나."
쿠후우웅!
그는 소수혈인을 휘돌려 후방과 측면을 노리는 중급 마족들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그러고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상급 마족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블라드 유진이 드러낸 엄청난 존재감을 감지한 모양인지, 부하들이 왕창 갈려 나가는데도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긴장한 얼굴로 그의 움직임을 주시할 뿐이었다.
스슥! 파아앙!
유진이 슬쩍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상급 마족은 잽싸게 몸을 날리며 무기를 휘둘렀다.
위이이잉―!
마기를 머금은 무기가 진동하며 독특한 소리를 냈지만,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그저 접근을 차단하려는 공격이었기에, 간만 보려고 조금 움직였던 블라드 유진에게는 아예 닿을 수조차 없었던 것이었다.
일순간에 드러낸 존재감일 뿐인데 이런 반응이라니.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상급 마족을 바라보았다.
"격차를 아는 녀석이구나.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마기를 다루는 놈들이라 그런지, 일반적인 헌터보다 유진의 존재를 더 강하게 느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흥미로운 눈빛을 거둔 그는 소수혈인을 횡으로 눕혔다.
그러고는 상대를 향해서 훅 짓쳐 들어가며 가볍게 그어 버렸다.
위이이잉! 스핑! 푸확―!
상급 마족이 마기를 가득 머금은 검을 휘둘러 왔지만, 아무 소용 없는 짓이었다.
유진의 소수혈인이 놈의 무기와 육신을 한꺼번에 베어 버렸으니까.
녀석이 암청색 혈액을 쏟으며 무너져 내리자, 그는 늦기 전에 왼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덥석! 쭈우우욱―!
짜릿한 전율이 전신을 타고 흐르자, 블라드 유진은 순간적으로 비릿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상급 마족 기사의 기억 중 일부를 흡수했습니다.]
[언어가 완전치 않아, 마족어 사용이 일부 제한됩니다.]
[온전한 마족어를 사용하려면, 더 높은 등급의 혈액을 흡수하십시오.]
"이래도 안되나?"
아직도 온전한 마족어를 습득하지는 못했으나, 홀로그램 글귀의 문장이 조금 바뀌기는 했다.
슬쩍 고개를 돌리며 귀를 기울여 보니, 마족들의 이야기가 조금 더 명확하게 들려왔다.
"으으! 이, 이 자□¡ 엄□□ □물이다."
"여□ 있어 봤자 □□뿐이야. 얼른 □□□□ □□야 □!"
좀 더 알아들을 수 있는 범위가 넓어졌지만, 그렇다고 의미를 바로 해석하는 건 어려웠다.
그저 대충 어떤 느낌인지만 아는 수준이었다.
사실 그런 건 말이 아니라 놈들의 행동만 봐도 알 수 있는 거였다.
그를 둥글게 포위하며 달려들던 중급 마족들이 어느새 주춤주춤 물러났다.
마치 군대처럼 상위 마족이 아래 등급을 통솔하는 구조인 모양이었다.
‘상급 마족을 제거하니까, 사기를 급속도로 잃어버리는군. 그러면서 다른 상급 마족을 찾아 이동한다.’
중급 마족들의 행태를 지켜보던 블라드 유진은 곧장 다음 목표를 찾아서 움직였다.
마족 군단의 사기를 꺾고 지휘 체계를 박살 낼 아주 손쉬운 방법을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한데, 마기를 줄기줄기 뽑아내는 상급 마족에게로 향하던 그의 발걸음이 불현듯 멈추고 말았다.
성 내부에서 굉음이 터져 나오며 홀로그램 글귀가 주르륵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콰아아아앙!
[동쪽 성문이 뚫렸습니다.]
[마력 탑을 지키려면, 지원 병력을 파견하십시오.]
[남은 마력 탑의 내구도.]
[47%]
[46%]
……
홀로그램을 확인한 유진은 곧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눈앞의 상급 마족을 처치하기보다는 마력 탑을 수호하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이곳에서 발을 뺄 수는 없었다.
달랑 루시아와 열 명의 A급 헌터, 두 명의 힐러만으로 성문을 지키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촤좌좌좌좍! 콰칭―!
그는 곧장 루시아의 앞에 우글거리는 중급 마족들을 엄청난 속도로 도륙해 버렸다.
한순간 마족 군단의 중심에 커다란 구멍이 발생할 정도였다.
그러자 몰려드는 마족들을 쉴 틈 없이 막아 내던 그녀에게 숨돌릴 짬이 생겼다.
"휴! 유진 님, 홀로그램 보셨습니까?"
"그래."
"내구도가……. 벌써 40%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팀을 전부 데리고 동쪽 성문을 지원해. 여긴 나 혼자 맡는다."
"예?"
순간적으로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이 많은 마족을 어떻게 혼자 막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강한 힘을 지녔다고 해도 파도처럼 끝도 없이 밀려오는 군단을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하지만 그와 동시에 블라드 유진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떨떨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녀는 마력 탑의 남은 내구도를 힐끔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얼른 마력 탑을 지키러 가지 않는다면, 네 번째 시련이 실패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들 절 따라오세요!"
루시아는 성벽 위에서 공격을 퍼붓는 중인 A급 헌터들을 향해서 손짓했다.
그러고는 성문 안쪽으로 휙 몸을 날리며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혼자 남은 유진은 굶주린 개떼처럼 몰려드는 마족들을 무심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맛있는 녀석부터 먼저 오면 좋겠는데."
웬만한 헌터보다 훨씬 강한 녀석들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맛 좋은 음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듯했다.
매우 싱싱하게 팔딱거리는 생물 재료 정도로 말이다.
* * *
타다다닥!
"마력 탑은 어디……. 아! 저기다."
게일드 백작성 안으로 뛰어 들어간 루시아는 황급히 마력 탑부터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른쪽에서 우르르 몰려온 마족 군단이 중앙의 탑을 포위하고 있었다.
"여기부터 막아요! 풀고르 글로부스(fulgor globus)!"
후우웅! 쿠콰콰콰콰!
그녀가 장창을 강하게 내려치자, 깃발에 깃들어 있던 백색 뇌전이 순식간에 덩치를 키웠다.
방전하는 번개 구체가 뻗어 나가며 중급 마족들을 수십 마리씩 쓰러뜨렸다.
하지만 강력한 스킬을 먹였음에도 꾸역꾸역 몰려드는 마족의 수효는 너무도 많았다.
루시아의 팀원들이 온 힘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으나, 쉽사리 우위를 점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마력 탑이 포위된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시련은 실패하고 말 터였다.
"성문을 막아야 하는데……. 그렇다고 마력 탑을 버릴 수도 없고."
문득 홀로그램을 힐끔 바라보니, 어느새 마력 탑의 내구도는 20%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그 전에 마력 탑 주변의 마족들을 깡그리 처리해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다.
그녀가 심각한 고민에 빠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초열지옥(焦熱地獄). 십지폭쇄(十指爆鎖)!"
쿠콰콰콰콰콰쾅!
어디선가 거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마력 탑 주변에서 엄청난 위력의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명중률은 형편없었으나, 어차피 마족들은 우글우글 몰려 있는 상태.
폭발력은 마족 군단 전체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시뻘건 화염이 마구 솟구쳐 오르며 마족들을 집어삼키자, 일순간 마력 탑 주변에 공간이 생겼다.
시커멓게 타 버린 마족들의 사체까지 강력한 후폭풍에 밀려났기 때문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아!"
전시영이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마력 탑 위에 내려섰기 때문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저 여자의 화력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시영은 오른손에 다섯 개의 노란 구체를 생성하며 루시아를 향해 소리쳤다.
"뭐해?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얼른 가서 성문부터 막아!"
"이 빚은 잊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이거 못 지키면 끝장인데, 빚은 무슨 빚? 같은 팀끼리 그러는 거 아니다."
"그래요. 같은 팀. 듣기 좋네요."
"지금 서쪽은 S급 한 명이 비었어. 레프 그 사람 혼자서 계속 버티지는 못할 거야. 빨리 해결하고 와야 해."
"네, 그러죠."
희미한 미소를 지은 루시아는 곧장 몸을 돌려 동쪽 성문을 향해서 달려 나갔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는 연신 폭음이 들려왔다.
전시영이 마족들을 상대로 역풍을 쏴 대는 소리였다.
타다다닷!
루시아는 최대한 마족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성벽에 딱 붙어서 이동했다.
저놈들과 싸워 봐야 성문을 닫는 시간만 지체될 것이다.
한데, 활짝 열린 성문 근처에는 천즈한을 비롯한 중국 헌터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 간 거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문득 그녀의 귓가에 미약한 신음이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해 보니, 성벽과 딱 붙은 곳의 도랑에 천즈한이 널브러져 있었다.
전신 곳곳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