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혼란스러운 헌터들 틈바구니를 지나친 블라드 유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제단을 바라보았다.
[57초.]
[56초.]
[54초.]
……
초읽기는 이제 1분도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
당장 이름을 입력하지 않는다면, 달랑 10분뿐인 남은 시간이 또 줄어들게 될 터였다.
1분씩 뚝뚝 떨어지던 남은 시간은 어느 순간부터 7분, 10분씩 무자비하게 깎였다.
이 이후로는 고작 10분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 얼마나 줄어들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결단력이 필요하다면, 바로 지금이 발휘되어야 할 시점이었다.
그는 손에 들린 세 장의 공략대원 명단을 내려다보았다.
‘한국, 이탈리아, 스페인.’
유진과 전시영 그리고 루시아가 맡은 조사 대상자들이다 보니, 그 외 국가의 명단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제단에 이름을 써넣으려 했다.
‘이렇게 하는 거였군.’
입력 방식은 간단했다.
빈칸에 손을 휘두르자, 붉은 빛줄기가 허공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헌터들이 홀로그램을 조작하는 것과 진배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 이름을 쓰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가 블라드 유진의 옆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같이합시다."
그자의 정체는 이제껏 그 어떤 선택도 하지 못했던 천즈한이었다.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보니, 드디어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그러든지."
천즈한은 공략대 전원의 명단을 갖고 있었으니, 이제 특정 집단이나 국가의 헌터만 제외될 리는 없었다.
그가 먼저 명단에 올라 있는 이름 중 아무나 골라서 적자, 제단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그러더니 혼란한 상황 중에도 한 명의 헌터가 끌려와 번쩍이는 불빛과 함께 사라졌다.
"으악!"
[제단에 이름이 제출되었기에, 무작위 선정 페널티가 취소됩니다.]
[9분 59초.]
[9분 58초.]
[9분 57초.]
……
A급 헌터 한 명이 희생되자, 줄어들던 시간이 초기화되었다.
하지만 맨 처음처럼 30분이 되지는 않았다.
앞으로 이루어질 페널티가 취소되는 거지, 이제껏 받은 것을 돌려주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유진은 천즈한의 시선을 느끼고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공략대장은 마치 어찌 그리 단호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있는지 눈빛으로 묻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 없이 곧장 다음 사람의 이름을 적어 넣기 위해서 손을 움직였다.
본인이 뱀파이어라서 인간 몇 명이 죽는 거야 아무런 감흥도 없다고 설명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저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실행할 뿐이었다.
"지, 지금 제단에 이름을 제출한 거야?"
"아니! 무작위로 선정되는 건 그렇다 쳐도,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닌가?"
놀랍게도 전투를 벌이던 몇몇 A급 헌터들이 유진과 천즈한의 행동에 불만 어린 목소리를 냈다.
이유는 옆에서 싸우던 동료가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제단의 희생자로 바쳐졌기 때문이었다.
이제껏 얼른 결단을 내리라고 지껄였지만, 막상 본인들에게 위기가 닥치자 태세를 변환한 것이다.
가히 안면몰수의 정석이 아닐 수 없었다.
"젠장……."
그들의 목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이름을 적으려는 천즈한의 손이 덜덜 떨렸다.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지만, 사람의 운명을 가르는 일인데 부담이 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 상황을 타파하려면, 얼른 이름을 적어서 배신자를 색출해야만 했다.
천즈한은 미조사자 중 무작위로 대상자를 선정하여 묵묵히 이름을 적어 나갔다.
"으아악!"
"크악! 살려 줘!"
어느새 밀실의 대혼란은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이제 공략대원들은 지독한 침묵 속에서 끌려가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공포에 잠식되어 있었다.
얼른 배신자가 걸려들기만을 바라는 중이었다.
그런데 블라드 유진이 다음 사람의 이름을 적으려는 순간, 제단의 빈칸이 사라지며 경고음이 울렸다.
삐이―!
"……."
"어?"
그 소리에 그와 천즈한은 손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도전자 무리의 인원이 66.6명 이하가 되었기에, 3층의 시련이 종료됩니다.]
[제단에 다음 층으로 향하는 게이트가 생성됩니다.]
우우우웅!
이제껏 사람을 집어삼키기만 하던 공포의 제단 위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새파란 구체가 나타났다.
"사, 살았다."
"어휴!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네."
털썩!
공략대원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게이트를 통과하는 건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밀실 이곳저곳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으나, 그래도 현재의 정신 상태로 네 번째 시련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천즈한은 눈을 질끈 감으며 이를 악물었다.
결국에 배신자는 찾지도 못하고, 탑이 의도한 수효만큼 동료들을 줄이는 결과만 낳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공략대장을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S급과 힐러의 수효를 적절한 만큼 지켜 냈으니, 탑 공략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지는 않을 터였다.
* * *
스팟―! 스팟―!
3층에서 휴식을 취하며 재정비를 마친 공략대는 곧장 게이트를 넘었다.
공략대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거대한 성곽의 중심이었다.
2, 3층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2층처럼 후덥지근한 공기도 없었고, 3층과 같이 꽉 막히지도 않았다.
마치 중세 시대를 연상케 하는 석조 건물에 헌터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기지개를 켜며 석양의 마지막 따스한 빛줄기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답답해 죽는 줄 알았는데."
전시영은 맑은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를 만끽하는 전시영의 모습을 보니, 다른 S급 헌터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갑자기 무슨 성이 나타나다니, 아무래도 시련과 관련이 있는 것 같군요. 인원을 나눠서 주변을 탐색해 봅시다."
이제 공략대원의 수효는 300에서 66명까지 줄어든 상태.
인원을 나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천즈한은 한 팀당 대략 15명씩 인원을 구성하여 수색하도록 지시했다.
동서남북으로 각각 이동하며 성곽의 형태와 어떤 시련이 숨어 있는지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팀원들이 우르르 몰려갔지만, 블라드 유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성곽의 중앙에 우뚝 서 있는 독특한 형태의 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닷! 후웅―! 타다닷!
그러다가 훌쩍 몸을 날리더니, 울퉁불퉁한 표면을 박차며 탑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이곳이 성곽보다 더 높았기에,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안개…….’
성곽 너머에는 시커먼 안개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딱 이 성만 제외하고 사방 어느 곳의 지형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쪽 하늘의 붉은 석양도 잠시 시간이 지나면, 안개 뒤로 모습을 감춰 버릴 것 같았다.
"저 뒤에 뭐가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군."
검은 안개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마치 저 너머에 거대한 무언가가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으며 도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불길했지만, 그 근원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안개에서 시선을 거둔 블라드 유진은 성곽을 쭉 살펴보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성채의 구조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큼지막한 성문이 나 있었는데, 중앙 탑에서 대략 1km 정도의 거리였다.
성은 한 변의 길이가 2km나 되는 정사각형이었다.
이곳저곳에 수성용 기물들이 있긴 했지만, 하나같이 흉물스럽게 파괴된 모습이었다.
물끄러미 지형을 파악하던 블라드 유진은 이내 탑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얼추 위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다 얻은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수십 개의 홀로그램 글귀가 우르르 떠올랐다.
[게일드 백작성의 80% 이상을 탐사하여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네 번째 시련의 규칙이 공지됩니다.]
[마족 군단의 공세로부터 게일드 백작성을 수호하십시오.]
[중앙의 마력 탑이 파괴되면, 시련은 실패하게 됩니다.]
[시련은 해가 뜰 때까지 이어집니다.]
[성공적으로 성을 지킬 경우, 도전자들은 백작의 치하를 받게 됩니다.]
[웨이브까지 남은 시간]
[30, 29, 28, 27…….]
그와 동시에 아름다운 붉은 석양이 사라지고, 불길한 느낌의 시뻘건 달이 불현듯 튀어나왔다.
하지만 공략대원들은 그 섬뜩한 레드문을 볼 겨를이 없었다.
난데없이 시련의 규칙이 뜨고 초읽기가 시작되자, 그들은 중앙으로 달려오기 바빴다.
무슨 일이 발생하면 곧장 탑 앞으로 모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동쪽 성곽을 탐색하던 천즈한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며 신속하게 인원을 분배했다.
이미 게일드 백작성을 탐색하며 머릿속에 계획을 세워 두기라도 한 듯, 매우 자연스러운 대응이었다.
"S급은 8명, 힐러 17명, A급 41명입니다! 지금부터 네 팀으로 나눌 건데, 각 팀당 대략 S급 둘과 힐러 넷, A급은 10명쯤 배정될 겁니다."
"그럼 S급은 어떻게 나눌 겁니까?"
"저와 왕주안이 동쪽을 맡고 조나단과 안지홍이 북쪽, 레프와 전시영이 서쪽입니다. 블라드 유진과 루시아는 남쪽을 부탁드립니다."
다급한 상황에서도 천즈한의 리더십은 빛을 발했다.
공략대장은 순식간에 S급 헌터들을 나누었는데, 그 짧은 시간에도 나름 머리를 좀 쓴 모양이었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레프와 조나단, 전시영과 왕주안을 떼어 놓은 것이다.
그뿐이랴, 힐러와 A급 헌터들의 인원 분할 또한 달리는 중에 완벽하게 해냈다.
누구도 불만이 없을 만큼 완벽한 팀 구성이었다.
"아니, 왜 쟤가 유진과 한 팀이냐고! 날 보내 줘야지!"
물론 완벽하게 거부의 목소리가 없을 수는 없었다.
전시영은 블라드 유진과 루시아가 한 팀이 된 것이 불만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귀여운 반란은 안지홍의 개입으로 순식간에 진압되었다.
"시간 없으니까, 군말 말고 위치로 가. 알았지?"
"으아! 이 아저씨가 왜 훼방이야!"
"훼방은 지금 네가 놓고 있는 거고. 저 러시아 아저씨 따라서 얼른 가!"
안지홍이 툭 밀자, 전시영은 하는 수 없이 레프와 함께 서쪽 문을 향해서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남쪽 성문 앞에 선 루시아를 휙 돌아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중에 묵사발을 만들어 주겠다는 의미인 듯했다.
"모두 잘 부탁합니다!"
중앙의 마력 탑에서 잠깐 멈춘 천즈한은 흩어지는 대원들을 향해서 크게 소리쳤다.
그러고는 자신이 맡은 동쪽 성문으로 달려 나갔다.
쿠구구구구!
인원 배치가 이루어지자마자 유진이 맡은 남쪽에서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무지 셀 수 없을 만큼, 끝도 없이 밀려드는 마족 군단의 발소리였다.
언덕 아래에 모습을 드러낸 마족들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것 같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시커먼 기운이 일렁이는 무기를 들고 있었다.
‘……마기를 직접 뽑아서 사용하는군.’
유진은 놈들의 무기에 깃든 기운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2층에서 보았던 하급 마족 암살자가 무기에 바른 독액과는 확연히 다른 형태였다.
"조금 조심해야겠군. 어려운 싸움이 될지도 모르겠어."
"확실히 심상치 않아 보이네요."
나직한 경고에 루시아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녀가 보기에도 이번에 나타난 마족들은 어딘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후웅! 척!
깃발 창을 한 번 크게 휘두른 루시아는 준비되었다는 듯, 유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이잉―!
그 또한 초장부터 소수혈인을 하나의 칼날로 합치며 길게 뽑아냈다.
그러는 동안, 마족 군단은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두두두두두!
사람과 비슷한 덩치의 녀석들이 달려올 뿐이었지만, 마치 대규모 기마대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렇게 마족 군단의 첫 번째 웨이브는 남쪽 성문을 가장 먼저 강타했다.
파죽지세로 쏟아져 들어왔지만, 놈들은 성문에 마기가 깃든 무기를 박아 넣을 수가 없었다.
좁은 길목을 틀어막은 블라드 유진과 루시아 때문이었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놈들인지 좀 볼까?"
쑤화아아앙!
그는 소수혈인을 크게 휘둘러 마족들을 와르르 쓸어버림과 동시에, 한 녀석의 목을 움켜쥐었다.
유진의 왼손에 붙잡힌 마족은 무기를 휘두르며 반항하려 했으나, 이내 몸을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투명하게 변한 그의 손을 통해서 막대한 양의 혈액이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입술을 핥은 블라드 유진은 새하얀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린 마족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