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으아아악!"
"뭐 하는 짓이야? 이 미친 새끼야!"
밀실 내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한 A급 헌터가 바로 옆에 서 있던 동료를 무기로 찔러서 죽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돌발적인 상황에 놀란 공략대원들은 각자 무기를 뽑아 들며 방어 태세를 취했다.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잽싸게 뭉쳤지만, 혼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시, 시간이 멈추지 않아! 그럼 죽은 저 친구도 배신자가 아니라는 소리잖아?"
"야, 이 새끼야! 네가 배신자 확실하다며?"
동료를 찔렀던 A급 헌터는 그야말로 만민의 적이 되고 말았다.
자칫 잘못하면 악감정이 있는 사람을 배신자로 몰아갈 수 있기에, 무분별한 지목은 삼가야 했다.
천즈한 또한 자신의 주관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 이제껏 선택하지 못한 게 아니었던가.
멈추지 않는 초읽기를 본 그자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이, 이럴 수가……. 진짜 의심스러웠는데. 다리에서 넘어진 여자를 가장 많이 욕한 것도 저놈이고, 사막에서는 물을 일부러 많이 흘리면서 마셨다고! 한 방울조차도 아까운 물을 말이야!"
당황한 표정으로 보아, 저자는 악의적인 의도로 옆 사람을 찌른 건 아닌 모양이었다.
분명 지금껏 저자만 느낀 뭔가가 있긴 할 터였다.
‘확신이 있었으니, 과감하게 행동을 단행했겠지. 그저 잘못 짚었을 뿐.’
블라드 유진은 고개를 마구 흔드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자신이 대상자가 되어 제단으로 끌려가거나, 똑같이 동료의 무기에 당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푸확!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가 그자의 뒤에서 불쑥 튀어나오더니 단번에 목을 그어 버렸다.
목은 방어구가 덮고 있지 않은 곳 중, 가장 노리기 쉬운 부위였으니까.
"커헉!"
"누군가를 죽였다면, 네놈도 죽을 각오를 했겠지. 억울하지는 않을 거라 본다."
기습에 이은 또 다른 기습이 일어나고, 복수는 새로운 복수를 낳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 친구를 죽여?"
"이 새끼가 내 동료를 먼저 죽였어!"
"뒈져라! 이 양키 새끼야! 마더 로씨아의 긍지를 보여 주마!"
공략대원들은 가장 먼저 나라별로 쪼개져서 각축전을 벌였다.
같은 편끼리 미친 듯이 혈투를 벌여 대자, 힐러들은 누구를 지원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투에 휘말릴 수는 없었기에, 자신들을 조사 중이던 블라드 유진의 뒤로 몰려들었다.
"이, 이쪽으로!"
"유진 님 뒤편이라면, 안전할 거야. 봐봐! 이쪽으로는 아예 오지도 않잖아."
"맞아. 정신 나간 것처럼 보여도 판단은 제대로 하고 있다니까? 여기로 오면 다 죽는 걸 아는 거지."
물론 모든 힐러들이 그의 뒤에 숨을 수는 없었다.
절반 가까운 수효의 힐러들은 저 미친 내전에 휘말려 어이없이 죽어 나갔다.
동료의 허무한 죽음에 발을 동동 굴렀지만, 유진은 그들을 구할 마음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턱을 괸 채, 제단만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죽어도 멈추지 않는다.’
[2분 34초.]
[2분 33초.]
[2분 32초.]
……
전투를 벌이느라 벌써 십수 명이 죽었음에도 초읽기는 0을 향해서 계속 줄어드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면 무작위로 또 한 명의 공략대원이 사망하게 될 터였다.
"그만들 하십시오!"
"이러다가 시련을 직접 겪는 것보다 사상자가 더 많이 나오겠습니다!"
천즈한을 비롯한 S급 헌터들이 끼어들고 나서야 상황은 조금 진정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룹별로 뭉친 대원들은 서로를 불안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는 동료가 아닌, 언제든 뒤에서 칼침을 놓을 수 있는 적으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새로운 대상자를 선정할 때가 되었다.
[제단에 이름이 제출되지 못했기에, 대상자가 무작위로 선정됩니다.]
"아아악!"
비명과 함께 이번에는 유진의 뒤에 있던 힐러 중 한 명이 제단으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와 동시에 제단의 글귀가 다시 한번 바뀌었다.
[대상자 무작위 선정 페널티로 남은 시간이 10분 줄어듭니다.]
[계속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대상자가 무작위로 선택됩니다.]
[9분 59초.]
[9분 58초.]
[9분 57초.]
……
이번 페널티는 남은 시간을 무려 10분이나 줄여 버렸다.
이제 10분에 한 번씩 새로운 대상자가 무작위로 선정되는 것이다.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자,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던 장내는 재차 혼란에 휩싸여 갔다.
"아니, 이거 그냥 결단을 내려야 한다니까?"
"이봐요. 천즈한 씨! 아직도 의심되는 사람이 없어요?"
"그냥 조사 안 된 사람 중에 찍어! 그럼 페널티를 안 받아도 되잖아!"
몇몇 헌터들이 천즈한을 향해서 불만을 표시했다.
그들은 이미 조사를 거친 자들이었고, 당연히 반대편에서는 불평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야! 이 미친 새끼들아. 조사가 완벽한지 아닌지, 신뢰성을 어떻게 평가해?"
"그래! 이미 조사를 받았는데, 배신자가 그 안에 있으면 어쩔 거야? 그럼 우린 다 개죽음이네?"
국가별로 나뉘었던 대원들은 다시 조사를 마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분열되어 아우성쳤다.
그야말로 분열이 극에 달한 모습이었다.
‘실로 엄청난 미션이로군. 이 시스템이 원하는 게 대체 뭘까?’
블라드 유진은 혼란스러운 상황을 지켜보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이제는 배신자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의심이 될 정도였다.
뱀파이어 로드인 그가 이런 마음일진대, 나약한 인간들은 의심이 꼬리를 물고 계속 반복되는 중일 것이다.
유진은 이제껏 겪어왔던 탑의 시련을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
‘첫 번째는 최하급 마족들을 따라가니 시련이 발동되었다. 두 번째는 물이 20% 남았을 때였지. 내가 기억하기로 세 번째는…….’
분명 탑의 시스템은 ‘인원 초과로 인한 조건의 만족’이라는 말을 했다.
맨 처음 제단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던 글귀였지만,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인원 초과가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탑은 공략대의 인원을 줄이기 위해서 이런 시련을 만들어 둔 것이다.
‘뭔가 의미가 있을 텐데……. 모르겠군. 1층은 협력을 요구했고 2층은 고통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분열, 3층은 그냥 대놓고 분열 조장.’
그냥 갈수록 의도가 노골적으로 변해 간다는 것 말고는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콰아아앙!
그런데 문득 밀실의 한쪽 구석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껏 헌터들이 싸움을 벌이기는 했지만, 저렇게까지 무지막지한 스킬을 시전하지는 않았다.
혹시나 이 방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공략대는 그대로 몰살당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투를 벌이는 자들은 그런 것 따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너 이 새끼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하! 감정적인 게 꼴사납기 그지없군."
"네놈이 사막에서 우릴 먼저 쳐 놓고, 누가 누구더러 감정적이래?"
주변을 거의 초토화할 정도로 박빙으로 맞붙은 자들은 러시아의 레프와 미국의 조나단이었다.
사막에서 먼저 기습을 감행한 건 조나단 잭슨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는 레프 미하일로비치 알렉세이가 되레 승부를 걸었다.
다른 A급 헌터들과 마찬가지로 사막에서 자신을 기습했던 조나단이 배신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역시 신경도 안 쓰시네요."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던 블라드 유진의 곁으로 누군가가 슬쩍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짧게 답했다.
접근한 사람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까."
"그러실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저도 괜히 휩쓸리지 않으려고 이리로 왔지요. 저기 뒤늦게 눈치채고 이쪽으로 오는 사람도 있네요."
루시아가 손짓하자, 유진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잔뜩 인상을 쓰며 전진하는 전시영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앞으로 뛰어다니며 무기를 휘두르는 A급 헌터를 붙잡아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에이! 이게 무슨 멍청한 짓이래?"
"멍청하진 않죠.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한 발악인데요."
"듣고 보니 그건 그러네. 근데 왜 우리는 발악하지 않는 거야?"
"그야……. 굳이 안 끼어들어도 저러면 알아서 배신자가 걸러질 테니까?"
"그럼 쟤들이 멍청한 거 맞네."
"뭐, 듣고 보니 그러네요."
"따라 하지 마. 저 마초 아저씨들처럼 확 그냥 싸움 걸어 버린다."
전시영은 루시아를 향해서 으르렁거리다가 유진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두 사람이 그의 곁으로 온 것처럼, 다른 S급 헌터들도 파벌을 이루고 있었다.
안지홍은 완전 반대편에 있어서 이쪽으로 건너오지 못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누군가와 연합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왕주안과 대치하는 중이었다.
"저분은 왜 왕주안을 상대하고 있는 거죠? 싸울 이유가 없을 텐데요."
루시아의 말대로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안지홍과 왕주안은 접점이 전혀 없는 사이였으니까.
하지만 사막에서 한 번 크게 당해 보았던 전시영은 이유를 곧장 유추해 냈다.
"저 자식 저거 또 딴생각하는 모양이네."
"딴생각이요?"
"그냥 배신이 몸에 밴 놈이야. 어떻게든 남을 밟고 올라가서 생존할 생각밖에 안 하거든."
"안지홍 씨를 처리한다고 해서 본인의 생존율이……. 어쨌든 조금 올라가긴 하겠군요."
"S급 중에서 저 아저씨가 좀 조용한 편이잖아. 그래서 의심하는지도 몰라."
"어쨌거나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군요."
확실히 같은 편끼리 벌이는 살육전을 보고 있기란, 매우 힘들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힘을 합쳐 역경을 건너온 데다가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들 아닌가.
규칙에서 인원을 거론하는 걸 보니, 탑의 시련이 고작 3층으로 끝날 리는 없을 테니까.
게다가 탑을 클리어하고 나면, 바깥에서 마주칠 수도 있고 말이다.
스윽!
전투를 지켜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블라드 유진이 문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루시아와 전시영의 손에 들려 있던 명단을 휙 낚아챘다.
"잠시 좀 빌리지."
"어어? 그거로 뭐 하게?"
전시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질문했으나, 유진은 답하지 않고 앞으로 거침없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명단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스륵! 스륵!
종이를 넘겨 가며 제단을 향해 나아가는 유진의 모습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주변에는 온갖 스킬이 터지고, 무기가 휘둘러지는 중인데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쉬이이익! 터엉!
하지만 아예 모든 공격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은빛 무언가가 날아들자, 그는 슬쩍 몸을 돌리며 오른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큼지막한 철퇴 머리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는 게 아닌가.
무기를 휘둘렀던 A급 헌터는 블라드 유진의 얼굴을 보자 사색이 되었다.
그를 의식하고 공격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 일부러 그런 건……."
"꺼져."
"넵!"
유진이 스산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자는 자신의 무기가 날아간 방향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곧장 제단 앞으로 걸어가 섰다.
"대충 뭘 원하는지 알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