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비명은 불안한 표정으로 제단을 주시하던 힐러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그중 한 여성 힐러가 보이지 않는 기이한 힘에 붙잡혀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제단을 향해서 끌려가는 게 아닌가.
주변의 공략대원들이 달려들어 그녀를 붙잡아 보려 했으나, 도저히 완력으로 막을 수가 없었다.
"아악! 사, 살려 주세요!"
"모두 붙잡아!"
대여섯 명이 달라붙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되레 단단히 붙잡은 힐러의 발목 관절만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그녀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이어지자, 헌터들은 결국에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파지지지직!
여성 힐러의 전신을 타고 강력한 뇌전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으윽!"
털썩!
결국에 공략대원들은 바닥에 떨어진 채, 끌려가는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단의 한가운데로 날아간 여자는 단말마를 남기고 번득이는 불빛과 함께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꺄악!"
번―쩍! 피유우웅!
방금까지 그녀가 떠 있던 허공에는 웬 시커먼 먼지가 흩날리고 있었다.
"설마 저 뇌전에 육신이 가루가 된 건 아니겠지?"
"으, 으웩!"
자신들이 사람이었던 것을 공기와 함께 들이마셨다는 생각이 든 모양인지, 몇몇 대원들은 헛구역질까지 했다.
헌터로서 동료가 희생되는 거야 수도 없이 봐 왔지만, 그걸 직접 흡입하게 되는 건 다른 문제였으니까.
"저게 진짜 그 사람의 흔적일까?"
"아니."
전시영의 질문에 블라드 유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여성 힐러가 공간 이동 되었을 뿐이고, 저 먼지는 인간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혈액에 누구보다 민감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하긴 사람을 태워서 가루로 만들었는데, 고작 저만큼밖에 안 나오는 건 이상하지."
"구역질 나니까 그런 말은 그만 좀 해 줄래요?"
"알았어. 알았다고."
사뭇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으나, 전시영도 속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방금 그 여성 힐러는 탑의 시련에서 탈락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미루어 봤을 때, 십중팔구 사망했을 것이다.
제아무리 사사로운 감정에 무딘 헌터라 해도,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본다는 건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위이이잉!
"또 시작이네."
제단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빛으로 이루어진 글귀가 불쑥 떠올랐다.
[대상자 무작위 선정 페널티로 남은 시간이 1분 줄어듭니다.]
[계속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대상자가 무작위로 선택됩니다.]
[28분 59초.]
[28분 58초.]
[28분 57초.]
……
제단은 30분이었던 남은 시간을 1분 줄여 버렸다.
앞으로 계속 배신자를 색출해 내지 않으면, 시간은 자꾸만 줄어들 터였다.
이러다가 종국에는 대상자 선정 시간이 극단적으로 줄어들지도 몰랐다.
"이거 선택하지 않으면, 몰살당할 수도 있겠는데?"
"그렇죠. 결국에 남은 시간이 뭐, 1초 이렇게밖에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전시영과 루시아는 불안한 표정으로 제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블라드 유진 또한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고 눈을 가늘게 떴다.
‘가만히 있다가는 나까지 빨려 들어갈지도 모르겠군.’
물론 그 전에 배신자를 찾아내지 못하리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공략대원들을 조사하다 보면 인간과 미묘하게 다른 놈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테니까.
그에게는 다른 사람의 눈은 속여도 자신은 절대 속일 수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다 상황이 여의찮으면 흡혈을 통해서 배신자를 색출해 내는 것도 가능했다.
이미 유진은 마족 혈액의 유형이 인간과 어떻게 다른지 다 파악하고 있었으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공략대원들을 설득하냐는 거였다.
제단에 이름을 적으려면,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니까.
‘저자의 결단이 중요할 듯한데.’
유진은 심각한 고민에 빠진 공략대장 천즈한을 바라보았다.
벌써 남은 시간 절반이 지나갔음에도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한 모습이었다.
"대장님!"
왕주안 대신 오른팔 역할을 하던 중국 헌터가 소리를 쳤지만, 천즈한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렇다고 제단의 빈칸에 이름을 적어 넣을 사람이 나오지도 않았다.
애초에 다른 헌터들의 이름을 전부 아는 이는 공략대장인 천즈한뿐이었으니까.
아마 의심되는 사람이 있더라도 일면식도 없는 사이라면, 이름을 적지 못할 터였다.
"결국에 저자의 결단만이 상황을 타파할 열쇠로군."
블라드 유진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전시영과 루시아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친분이 있는 대원들이 몰려와 결정을 촉구했으나, 결국에 천즈한은 이번에도 이름을 적지 못했다.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고 뛰어난 리더이긴 하지만, 모진 선택을 하기에 저자는 너무 정의로웠다.
심장을 옥죄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도무지 다음 희생자를 선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사실 천즈한이 아닌 다른 누구를 저 자리에 데려다 놔도 결정을 내리기는 힘들 터였다.
희생자가 될 사람이 코앞에 눈을 똑똑히 뜨고 살아 있는데, 어떻게 죽으라고 등을 떠민단 말인가.
결국에 천즈한이 선택한 건, 끊임없는 조사뿐이었다.
"다음 사람."
자신이 가진 명단을 기반으로 조사하여 사실 관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을 찾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일대일 대면 조사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 초읽기는 다시 0에 다다르고 말았다.
[제단에 이름이 제출되지 못했기에, 대상자가 무작위로 선정됩니다.]
"으으으! 으아악! 레프 님! 살려 줘! 뭐라도 해 봐! 레프, 이 새끼야!"
이번에는 A급 헌터들의 틈에서 누군가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장비와 쓰는 언어로 미루어 보아, 러시아 출신의 딜러인 것 같았다.
처음과는 달리, 공략대원들은 대상자의 다리를 붙잡고 버티려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허망한 눈빛으로 제단에 끌려가는 헌터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
번―쩍! 피유우웅!
불빛과 함께 두 번째 대상자는 먼지만 조금 남기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대상자 무작위 선정 페널티로 남은 시간이 1분 줄어듭니다.]
[계속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대상자가 무작위로 선택됩니다.]
[27분 59초.]
[27분 58초.]
[27분 57초.]
……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남은 시간은 1분이 줄어들었다.
이러다가 정녕 초읽기를 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시간이 줄어드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 했던 우려가 가시화되자, 공략대원 사이에서 여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계속 이렇게 놔둘 겁니까? 뭐든 해 보라고요! 젠장!"
"혼자서만 조사하지 말고, 여러 사람에게 명단을 나누는 게 어떻습니까? 조사 시간이 너무 깁니다."
"그래요! 이러다가 다 죽겠습니다."
불만의 목소리는 아직 조사받지 못한 대원들이 더욱 높게 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무작위로 선정되기 전에 한 사람을 지목한다면, 조사가 끝나지 않은 사람 중에 뽑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그런 불안감을 파악한 모양인지, 천즈한은 S급 헌터들에게 조사를 부탁했다.
S급 헌터는 고작 8명에 불과했으나, 이렇게 하니 그래도 조사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다.
물론 블라드 유진의 손에도 명단이 들렸다.
‘힐러 담당이군.’
아무래도 교황청 소속은 대부분 이탈리아어를 쓰다 보니, 그가 적격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일단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유진도 같은 소속이니까.
"저……. 조사 안 하나요?"
명단을 손에 들고 가만히 있자, 앞에 앉은 힐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하지만 그는 질문을 통해 조사하기보다는 피 맛을 좀 보길 원하고 있었다.
출신이나 과거 경력 등을 대조하는 것만으로 배신자를 색출해 내지는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신분을 속이고 이 무리에 섞여든다면, 진짜의 모든 것을 다 파악했을 것이다. 고작 이딴 거로는 눈치채지 못하도록 말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조사 대상에게 신체 접촉을 할 수는 없었다.
그건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고, 자칫 잘못하면 위력에 의한 강제 추행이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올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뱀파이어의 흡혈 스킬은 맨살을 맞대고 있어야만 발동하기에, 접촉은 필수였다.
‘곤란하군. 이런 방법으로 되려나?’
유진은 자기 손에 들린 볼펜을 만지작거리다가 실수인 척 앞으로 떨어뜨렸다.
툭! 또르르!
"어, 여기요."
여성 힐러는 굴러간 펜을 주워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런 과정에서 손이 아주 잠깐 닿게 되었다.
츠츠츠츠츠!
그 잠깐의 접촉만으로도 블라드 유진은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미리 흡혈 스킬을 극도로 운용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할짝!
혀로 붉은 입술을 핥으며 바라보자, 힐러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뇌쇄적인 아름다움에 순간적으로 아찔한 표정을 짓고 만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블라드 유진은 손끝으로 들어온 미량의 혈액을 진지하게 분석했다.
‘그냥 평범한 인간이군. 로마 출신이고……. 아, 이런 정보까지는 필요 없겠지.’
명단의 신상 정보를 보자, 배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명확해졌다.
그가 파악한 것과 명단의 내용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대충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고 조사를 마쳤다.
"다음 사람 불러올까요?"
"그러지."
첫 조사가 끝나자, 로마 출신의 여성 힐러는 그의 보조를 자청했다.
어차피 조사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누군가는 그런 역할을 해 줘야 했기에, 블라드 유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사람은 교황청 출신의 남성 힐러였다.
‘이번에는 시작부터 공략해 볼까?’
괜히 뜸을 들여서는 시도도 못 해 볼 것 같아서 그는 조사 대상자가 오자마자 오른손을 내밀었다.
"반갑군."
"……아, 네."
갑작스러운 악수 요청에 살짝 당황한 모양이었지만, 남성 힐러는 흔쾌히 손을 붙잡아 주었다.
그렇게 유진은 성공적으로 두 번째 조사 대상자의 피 맛을 볼 수 있었다.
‘이자도 아니야.’
그렇게 조사를 이어 나가는 동안 28분이 지났는지, 어디선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제단에 이름이 제출되지 못했기에, 대상자가 무작위로 선정됩니다.]
"으아악!"
번―쩍! 피유우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불빛이 번득이고, 또 한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놀랍도록 차가운 정적이 밀실 내부를 가득 채웠다.
두 번째 조사 대상자를 보낸 그는 대원들의 시선을 따라 무심코 제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전과는 사뭇 다른 글귀가 유진의 눈에 박혀들 듯 들어왔다.
[대상자 무작위 선정 페널티로 남은 시간이 7분 줄어듭니다.]
[계속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대상자가 무작위로 선택됩니다.]
[19분 59초.]
[19분 58초.]
[19분 57초.]
……
계속 1분씩만 감소하던 시간이 이번에는 무려 7분이나 줄어든 것이다.
공략대원들은 눈을 크게 뜨고 글귀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제 20분에 한 명씩 제단으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