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배신자? 아니, 이게 무슨 말이지?"
"공략대 중에 배신자가 있을 수 있……. 뭐, 지금 와서 보니 그럴 수도 있긴 하겠네."
황당하다는 듯한 천즈한의 말을 받은 건 전시영이었다.
그녀는 경멸 어린 눈빛으로 왕주안을 돌아보고 있었다.
피해는 저쪽이 더 많이 봤으나, 결국에 그건 고스란히 공략대의 전력 감소로 이어지는 것.
물을 얻기 위해서였다지만, 사실상 배신행위와도 마찬가지였다.
그뿐이랴, 미국 출신의 S급 헌터 조나단 잭슨 또한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S급 헌터들은 제단 앞에 나타난 글귀를 쳐다보며 한참 동안 의견을 나누었다.
물론 내전의 원흉인 왕주안과 조나단은 수뇌부 회의에 낄 수가 없었다.
그저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을 뿐.
"배신자를 찾아서 뭘 어쩌라는 거죠? 우리끼리 죽이기라도 하라는 걸까요?"
"설마 그러겠어? 그건 너무 억지인 것 같은데."
루시아의 의견에 전시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부정했다.
그런 막무가내식의 시련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지금껏 공략대를 괴롭혔던 시련은 달성이 가능할 듯 말 듯 한 목표만을 제시해 왔으니까.
그 과정에서 희생이 있을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하지만 배신자 색출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데다가, 더 이상 불가피한 희생이 아니게 되니까.
"아마도 그런 의미는 아닌 것 같군."
인간들이 얼마가 죽든 크게 상관없는 블라드 유진도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글귀의 속뜻을 해석하는 건 조금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일단은 저 위로 올라가지 말고 회복에 집중하는 게 어떻습니까?"
"좋은 생각이에요. 마침 부패 독도 없어졌다니, 금방 부상자를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
천즈한의 제안에 S급 헌터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략대는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인원이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힐러의 수가 그대로인 걸 고려하면, 전투 담당의 공략대원만 무려 150명이나 전사한 것이다.
이 탑의 끝이 어디일지는 알 수 없으나, 남은 전력을 최대한 보존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탑을 만든 존재는 공략대가 편히 숨돌리도록 가만 놔둘 마음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인원 초과로 인해 조건이 만족되어, ‘배신자 찾기’가 강제로 시작됩니다.]
[세 번째 시련의 규칙이 공지됩니다.]
[배신자는 도전자 틈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제한 시간 내에 배신자로 짐작되는 인물의 이름을 제단에 쓰십시오.]
[만약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면, 대상자가 무작위로 선택됩니다.]
[29분 59초.]
[29분 58초.]
[29분 57초.]
……
제단 앞에 홀로그램 글귀가 연속으로 떠오르더니, 난데없이 30분짜리 초읽기가 시작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공략대원들의 표정은 묘하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중에 배신자가 있는 건 둘째치고, 직접 자기들의 손으로 지목해야 한다니.
그건 불쾌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다.
단번에 배신자를 찾아낸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확률은 146분의 1.
고작 0.68493150685%에 불과했다.
물론 배신자가 단 한 명이라는 전제하에.
분명 무고한 사람이 저 제단 위로 올라가게 될 터.
배신자를 색출하지 못했을 때의 죄책감은 강력한 심리적 타격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누군가를 지목하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공략대원들의 내면에는 불신이 자리 잡아, 심각한 분열을 초래할 가능성이 컸다.
"이거 생각을 잘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천즈한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자, S급 헌터들은 말을 아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의 늑대인간 또는 마피아 게임에서는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지목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그런데 문득 힐러들의 치유를 받고 있던 부상자들 틈에서 소란이 일었다.
"아니, 솔직히 우리가 뭐 틀린 말 했어?"
"지금 와서 그게 왜 절 지목하는 이유가 되는 건데요!"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당신 때문에 무려 60명이나 전사했잖아! 힐러들도 잘 뛰고 있었는데, A급 딜러인 당신이 왜 거기서 넘어져?"
"그야……."
"뭐? 할 말 있으면, 해 보라고."
중국어가 빠르게 지나가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상황을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언쟁을 하는 사람들이 1층의 시련에서 넘어졌던 여자와 동료를 잃은 중국인 헌터들이기 때문이었다.
이내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상황을 해석하여 전달하자, 공략대 내부의 분위기는 확 끓어올랐다.
저 여성 헌터를 제단 위로 올려야 한다는 쪽과 너무 성급한 판단이라는 주장이 충돌한 것이다.
공략대의 수뇌부에 해당하는 S급 헌터들마저도 의견이 갈렸다.
"대상자가 무작위로 선택되는 걸 기다릴 바에야 가장 의심되는 사람을 올리는 편이 좋지 않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무고한 힐러나 S급 헌터가 대상자로 걸린다면, 전력 손실이 엄청날 테니까요."
"S급을 죽여서 위장하는 건 불가능할 테지. 그러면 가장 많은 A급 중에 배신자가 있을 확률이 높겠는데."
"그렇다고 힐러를 제외할 수는 없지만, 힐러들은 이제껏 혼자 있었던 적이 없지 않나요? 보호 차원에서 항상 한 명 이상은 붙어 있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을 텐데요."
레프와 안지홍은 전력을 보존하는 측면을 강조했다.
그 말인즉, 배신자가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큰 A급 헌터 중에서 대상자를 고르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천즈한과 루시아는 그렇다고 아무나 올려서 때려 맞히는 건 안 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배신자는 도전자로 위장하여 함께하고 있댔어요. 그럼 입장 명단에 없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을까요?"
"그자는 사람이 아닐 겁니다. 탑에서 나오는 마족인데, 헌터로 위장하고 있겠지요. 그럼 분명 어딘가 어색한 점이 있을 겁니다."
"인원 점검을 하면서 명단과 대조해 보는 편이 좋겠군요."
천즈한은 공간 확장 주머니에서 출발하기 전에 받았던 명단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믿을 만한 헌터들과 함께 다니며 공략대원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방의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헌터들을 한 명씩 데리고 가서 면담하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그 방식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남은 시간.]
[3분 15초.]
[3분 14초.]
[3분 13초.]
……
"대장님, 벌써 3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제단 위로 올릴 사람을 지목해야 합니다."
왕주안 대신 천즈한의 자질구레한 일을 해 주던 중국인 헌터가 다가와 굳은 표정으로 시간을 알려 왔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제단 앞에 뜬 큼지막한 숫자가 딱 3분을 지나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얼른 이름을 쓰라는 듯, 커다란 공란이 천즈한을 부르고 있었다.
"휴! 알겠네."
천즈한은 명단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눈앞에는 자신이 구해 줬던 여성 헌터가 불안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명단에 나온 신상 정보를 토대로 질문을 해 보았지만, 도무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문득 천즈한의 눈에 이쪽을 바라보는 공략대원들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이 여성 헌터를 주시하는 중이었다.
마치 천즈한이 여자에게서 배신자의 증거를 발견하길 바라는 듯한 기이한 열망이 깃들어 있었다.
불쾌한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그녀는 연신 다리를 떨더니 자리에서 일어난 천즈한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저는 끝난 건가요?"
"네."
"설마 지금 바로 제 이름을 적으러 가는 건……."
"아닙니다. 류이신(刘怡欣) 씨. 그럴 일은 없어요."
확실하지도 않은 사람의 이름을 적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까지 탑의 시련을 살펴보았을 때, 탈락자는 대부분 잔혹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어 있었다.
1층에서는 산성 액체가 휩쓰는 바람에 건너오지 못한 대원들은 모조리 녹아내렸다.
당연히 2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을 구하지 못한 이들은 심각한 탈수로 사망하게 되었으니까.
제단에 이름을 적어 낸다면, 십중팔구 대상자는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천즈한이 직접 상대를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사람이 그런 가혹한 현실 앞에 섰을 때,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아마 대부분은 압박감을 견딜 수 없어 이름을 써내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특히나 천즈한처럼 공명정대한 사람은 더욱 그럴 것이다.
제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님, 이제 1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왕주안의 역할을 대신하던 중국 헌터가 불현듯 말을 걸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예, 아무래도 발걸음을 빨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단으로 걸어가는 동안, 2분의 시간이 허비되었다.
공략대 전체가 널찍하게 쓸 수 있을 정도로 방은 넓었지만, 헌터의 걸음으로 제단까지는 금방이었다.
하지만 천즈한은 그 거리가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다.
직접 공략대원 중 하나를 지목해야 하는 현실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일을 할 만한 책임 있는 사람은 공략대장밖에 없었다.
저벅! 저벅! 척!
천즈한이 제단으로 향하던 중, 블라드 유진의 곁을 지나치게 되었다.
시간이 1분밖에 남지 않았으나, 걸음을 멈춘 천즈한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유진 님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리실 건지요. 고견을 좀 들어 보고 싶습니다."
유진은 감정 없는 눈으로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
"……원하는 대답이 있나."
"특별히 그런 건 없습니다."
"진짜로 내 의견을 묻는 거로군."
"그렇습니다."
"전력 보존책을 택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역시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습니까?"
"그리고 가능하다면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요. 좀 더 상세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천즈한이 다시 질문하자, 블라드 유진은 불안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중인 공략대원들을 돌아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뽑힐 수도 있다는 압박감은 거세질 테지. 그걸 타파할 방법은 없어."
"차라리 폭풍처럼 몰아쳐서 고통의 시간을 짧게 가져가자는 말씀이로군요."
"이해가 빠르군."
"그럼 그 선택을 해야만 하는 저는 어떡합니까?"
"……그냥 하면 돼."
잠시 뜸을 들인 그는 메마른 눈빛으로 제단을 돌아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뱀파이어인 유진의 입장에서는 인간들이 어떻게 되든 배신자만 빨리 색출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었으나, 천즈한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힘들겠지만 감정을 배제하라는 뜻입니까?"
상대가 뭐라고 생각하든 별 상관이 없었던 그는 말없이 제단 앞에 뜬 숫자를 가리켰다.
초읽기의 남은 시간은 이제 3초에서 2초로 줄어드는 중이었다.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달려가서 이름을 적는 시간은 결단코 나오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천즈한은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제단에 누군가의 이름을 적을 마음이 전혀 없는 듯했다.
아마도 내심이 그랬기에, 문득 블라드 유진의 앞에 멈춰서서 말을 건 모양이었다.
[제단에 이름이 제출되지 못했기에, 대상자가 무작위로 선정됩니다.]
초읽기가 끝나자, 모두의 홀로그램에 같은 글귀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방의 한쪽 구석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꺄아아악!"
바로 지금, 무작위 대상자 선정이 시작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