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후우! 후!"
복부를 감싸 쥔 전시영은 초토화된 전방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초열지옥 십지폭쇄를 처음으로 맛본 왕주안의 팀원들은 심각한 피해를 받고 말았다.
방어구를 단번에 꿰뚫을 정도로 기습은 강력했지만, 그녀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독에 당해서 얼굴이 시커멓게 변한 상태에서도 전시영은 초월적인 대처를 해낸 것이다.
덕분에 되레 왕주안의 팀원들이 밀리는 형국이었다.
"크웩! 이, 이런 젠장. 무슨 이딴 말도 안 되는 위력이……."
십지폭쇄 중 하나의 폭발을 고스란히 받아 냈던 왕주안은 모래 속에 처박혔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입 속에 들어온 모래 알갱이들을 피와 함께 뱉어 내며 고개를 들자, 스산한 눈빛의 전시영이 바로 보였다.
그녀는 녀석을 노려보며 다섯 개의 샛노란 구체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십지폭쇄는 위력이 대단한 스킬이었으나, 명중률은 형편없어서 간신히 몸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상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방심한 탓에 반응이 다소 늦었기 때문이었다.
삐이이이―!
일전의 고주파 음이 재차 들려오자, 왕주안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녀석은 정면 돌파를 택했다.
타다다닷! 쉬쉬쉭!
"차핫!"
녀석은 엄청난 속도로 쇄도하며 전시영을 향해서 무언가를 쏘아 보냈다.
그러자 세 개의 수리검이 기묘한 각도를 그리며 빠르게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왕주안의 중검에서 순간적으로 섬광이 번쩍거렸다.
"섬난충(閃亂衝)."
스캉―!
수리검과 중검의 시간차 공격이 지척까지 다가왔지만, 전시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끝까지 상대의 동태를 파악하려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다 공격이 지척에 다다른 순간, 오른손을 쫙 펼친 채 바닥을 향해서 내렸다.
"초열지옥 연쇄역풍!"
삐이이―! 삐이이―! 투후우웅!
땅속 깊은 곳에서 묵직한 진동이 퍼져 나오더니, 왕주안이 밟았던 지면이 불룩 솟았다.
곧바로 엄청난 양의 모래 알갱이들이 하늘을 향해서 미친 듯이 날아올랐다.
당연히 그 위에서 달리던 녀석의 신형도 공중으로 튕겨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어엇!"
바로 그 순간이었다.
땅속에서 시작된 진동은 거대한 화염으로 변모하여, 흩어지는 모래 틈새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쿠화아아아!
직접적인 폭발 피해는 거의 없었으나, 왕주안은 수십 미터 허공을 날게 되었다.
특별한 비행 능력이나 충격을 줄이는 스킬이 없다면, 그대로 지면에 곤두박질치게 될 터였다.
모래가 일반적인 바닥보다 아무리 부드럽다고 해도 큰 부상을 면치 못하리라.
"끄아아아!"
퍽!
이 한 수로 전시영과 왕주안의 서열 정리는 곧장 끝나 버렸다.
A급에서 S급으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왕주안은 전시영을 너무 얕보고 말았다.
그녀는 십 년 전에도 S급 헌터였으며, 리고르 아스페라에서도 살아남은 베테랑이었다.
기습에 성공했다고 방심할 수 있을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녀석은 너무 일찍 승리에 도취해 있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휘이이잉! 털썩!
수십 미터 위로 솟구쳤다 떨어진 왕주안은 미동도 없었다.
아마도 죽지는 않았을 테지만, 상당한 부상이 발생했을 터였다.
이러면 당연히 두 팀 간의 전투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전시영을 막아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문제는 세계 최고 딜러 중 한 사람인 그녀의 분노를 대체 무슨 수로 잠재우냐는 거였다.
지레 겁먹은 왕주안의 팀원들이 선택한 건, 무조건 항복이었다.
"무, 무기 버렸습니다!"
"저희는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진짭니다!"
그들은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은 채, 양손을 펼쳐 머리 뒤쪽에서 깍지를 꼈다.
완벽한 투항 자세였으나, 전시영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자기 왼팔에 박힌 세 자루의 수리검을 문득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꽤 깊숙이 박힌 칼날들을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 빌어먹을 새끼. 여기도 독 발라 놨네."
털썩!
이제 얼굴이 시커멓다 못해 푸르딩딩하게 변한 전시영은 그대로 넘어가 기절하고 말았다.
* * *
[마지막 오아시스가 발견되어, 2층의 시련이 종료됩니다.]
[도전자들은 모두 게이트 앞으로 공간이동 됩니다. 5, 4, 3, 2, 1.]
슈우웅!
공략대는 대략 10시간 정도를 남겨 두고 네 개의 오아시스를 모두 찾았다.
세 번째 오아시스를 발견한 건 천즈한의 팀이었고, 마지막은 루시아가 장식했다.
문제는 저 둘 외에 다른 팀은 오아시스에서 물을 보급하지 못한 데다가, 아군끼리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이었다.
전시영과 왕주안이 격돌한 것처럼 러시아의 레프와 미국의 조나단도 각축전을 벌였다.
다행스럽게도 안지홍은 다른 팀을 만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생존이 걸린 문제라도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천즈한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왕주안과 조나단 잭슨을 쳐다보았다.
그 두 사람이 혼란을 일으킨 주범이기 때문이었다.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오아시스를 못 찾겠다고 아군을 공격하다니요!"
"면목 없습니다."
왕주안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조나단은 자신의 팀원들을 돌아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뭐라고요?"
"그렇다고 다 말라 죽을 수는 없잖습니까? 물이 있음에도 나눠 주지 않은 저 러시아 헌터의 잘못도 있습니다."
"허!"
레프는 조나단 잭슨의 말을 뒤늦게 알아듣고, 러시아어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Cyka Blyat! 저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에헤이! 여기서까지 싸우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안지홍의 만류로 조나단의 안면에 주먹을 날리지는 못했다.
총체적 난국이 이어지자, 천즈한은 이마를 짚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이제 고작 2층을 통과했을 뿐인데, 벌써 이런 분열이 생기다니.
탑의 시련을 설계한 자는 인간의 간악한 마음을 잘 간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닙니다. 인원 파악부터 하고, 물을 나눕시다."
물을 분배하겠다는 말이 나오자, 으르렁거리던 레프와 조나단은 그제야 잠잠해졌다.
오아시스를 발견한 팀은 천즈한과 루시아 그리고 블라드 유진뿐이었다.
그는 초반에 오아시스 두 곳을 발견했으나, 물을 많이 뜰 수가 없었다.
보유한 물통이 몇 개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물통이 많았다고 해도 그걸 다 채울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지만.
"생존자는 총 146명이군요."
루시아는 S급 헌터들을 모아 놓고 인원 점검 결과를 알려 주었다.
그러자 곧이어 부상자의 수효를 헤아렸던 전시영이 입을 열었다.
"부패 독에 당한 부상자는 41명이나 돼. 근데 저건 대체 언제 낫는 거야?"
"치유 능력을 계속 걸면 차도가 있긴 하다네요. 독에서 벗어난 사람도 속속 나오고 있답니다."
부상자의 회복 과정에 관해서는 레프 미하일로비치 알렉세이가 확인한 모양이었다.
불쾌한 눈으로 조나단을 잠깐 쳐다보긴 했으나, 더 이상 싸움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보고를 모두 들은 천즈한은 심각한 표정으로 부상자들을 돌아보았다.
"언제 다음 층으로 가느냐가 문제네요. 제가 보기에는 이것도 또 다른 시련 같습니다."
"어떤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아무래도 회복이 끝난 다음에 가는 게 좋을 듯한데요."
"하지만 이 날씨를 언제고 버틸 수는 없습니다. 물도 부족하고요."
"하……. 진짜 쉽지 않네."
S급 헌터들은 문제를 일으킨 주범들을 한 번씩 힐끔거렸다.
저들의 분탕질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피해가 커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던 중, 무심히 상황을 관조하던 블라드 유진이 입을 열었다.
"다음 층이 어디든 여기보단 나을 것 같군. 곧바로 시련이 시작되지도 않을 테고."
"그건 장담할 수 없잖습니까?"
"그렇다면 가만히 앉아서 다 말라 죽든지."
천즈한이 조심스럽게 반박해 보았지만, 사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여기서 죽치고 있어 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좋습니다. 그럼 다음 층으로 가 보죠. 모두 떠날 준비 하십시오!"
"네!"
천즈한이 결단을 내리자, 공략대원들은 얼른 짐을 챙겨서 다음 층으로 향하는 게이트 앞에 섰다.
저 너머에 뭐가 있을지는 모르나, 적어도 이 지옥 같은 사막보다는 나으리라.
그런 희망이 가슴속에 새록새록 솟아났다.
이윽고 S급 헌터들을 필두로 공략대는 게이트를 통과하기 시작했다.
스팟―! 스팟―!
다행스럽게도 다음 층으로 넘어가자마자 시련이 시작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공략대는 거대한 큐브 모양의 공간에 들어온 상태였다.
사방은 물론이고 상하까지 꽉 막힌 장소.
천장 근처에 백광을 뿜어내는 광채가 둥둥 떠 있었기에, 물체를 분간하는 건 문제가 없었다.
더 이상 작열하는 태양이 존재하지 않는 것만 해도 대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와! 이제 좀 살 것 같네. 공기부터 달라."
사방이 차가운 석벽으로 막혀 있다 보니, 방의 공기는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전시영은 소중한 물건을 만지듯이 돌바닥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저러다가 바닥에 엎어져서 볼을 비비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였다.
"근데 저건 뭐죠?"
루시아가 가리킨 방향에는 피라미드 모양의 제단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방의 중간에 뭔가가 떡하니 있었지만, 대원들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저런 것보다 지친 심신을 달래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시아의 말을 들은 천즈한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상당히 지쳤지만, 일찌감치 제단의 정체를 알아보려는 모양이었다.
그래야 무슨 일이 일어나도 곧바로 대응할 수 있을 테니까.
"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중국 헌터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 부패 독이 말끔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래요?"
천즈한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중국 헌터가 내민 발목을 살펴보았다.
이 사람은 방금까지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게이트를 통과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3층으로 넘어오자마자 지독하게 자신을 괴롭히던 부패 독이 싹 사라진 것이다.
"듣던 중 다행이군요. 그래도 부상자가 있을지 모르니, 현황을 좀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제, 제가요?"
"왕주안이 저 상태라, 믿고 맡길 사람이 없군요."
"아!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금방 확인해 보겠습니다!"
천즈한이 지목한 중국인 헌터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원들을 향해 달려갔다.
범죄를 저지른 왕주안의 자리를 누군가는 대신해야 하고, 그게 자신이라는 사실이 기쁜 모양이었다.
중국 최고 헌터의 측근이 되다니, 멍청한 짓으로 분란을 일으킨 놈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중국인 헌터를 잠깐 바라보던 천즈한은 다시 제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시련이 뭔지는 몰라도 저 제단에 뭔가가 있는 것만은 확실했으니까.
"음?"
그저 제단의 근처에 서서 눈으로 살피기만 했을 뿐인데, 불현듯 천즈한의 앞에 글귀가 떠올랐다.
헌터 개인에게만 보이는 홀로그램이 아니라, 제단 앞쪽에 큼지막한 글씨가 새로 나타난 것이다.
한데, 꿈틀거리며 다양한 언어로 변환된 글자는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세 번째 시련은 ‘배신자 찾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