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물을 채우고 나면, 사라져 버리는 시스템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물통을 좀 더 가져올 걸 그랬군."
콰르륵! 콰륵!
기괴한 소리와 함께 오아시스의 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자세히 보니 오아시스의 중앙에는 꽤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용무가 끝나자 어디론가 이어진 통로가 열리며, 물이 전부 흘러가 버린 모양이었다.
텁!
이윽고 오아시스 중앙의 구멍은 그대로 닫혀 버렸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여닫는 뚜껑 같은 게 존재치 않았다.
그저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바닥이 저절로 쭈그러들며 구멍을 막는 게 아닌가.
이제 오아시스가 있던 공간은 약간 축축한 느낌의 모래 구덩이만 남아 있었다.
‘아직 목표 달성은 나뿐인 건가.’
공략대는 총 네 개의 오아시스를 찾아야 시련을 통과할 수 있었다.
홀로그램 글귀에는 64시간 23분과 세 개의 오아시스가 남아 있다는 정보가 표시되었다.
그 말인즉, 아직 유진 외에 오아시스를 찾은 팀은 없다는 사실을 뜻했다.
하긴 이제 고작 7시간 반이 조금 넘게 지났는데, 걸어서 벌써 이런 용권풍 지역까지 도달했을 리가 없었다.
쉬이이이!
‘모래 폭풍이 흩어진다.’
오아시스가 사라진 직후, 맹렬하게 회전하던 토네이도가 점점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아직 하늘 높이 치솟았던 모래와 먼지가 가라앉지는 않았으나, 살갗을 찢어 버릴 듯한 바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뚝 멈췄다.
덕분에 블라드 유진은 녹턴을 움직여 유유히 먼지구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제 고작 첫 번째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어."
72시간 안에 오아시스를 전부 찾으려면, 부지런히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팀이 모두 실패한다는 최악의 상황도 가정해야 하니, 최대한 빨리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유진은 출발점과 용권풍의 거리를 감으로 가늠하며 수색 범위를 설정했다.
두두두두두!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닌 결과, 그는 상당한 크기의 바위 더미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만약 모래 위를 걸어 다니는 공략대원들이 이것을 발견했다면, 그저 이정표 정도로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녹턴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상태.
위에서 내려다보니, 바위 더미 꼭대기에 작은 연못 같은 게 보였다.
슈우우우우! 척!
고도를 낮춰 바위 위에 안착하자, 그는 이 연못이 오아시스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신비로운 느낌의 에메랄드색 물은 이 지옥 같은 사막에 존재할 수 없는 물질이었으니까.
[오아시스를 발견했습니다.]
[앞으로 시련 종료까지 35시간 51분과 두 개의 오아시스가 남았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역시나 반가운 홀로그램 글귀가 떠올라 남은 시간과 오아시스의 개수를 알려 주었다.
"쉽지 않다는 건 확실하군."
이제껏 그가 찾은 오아시스는 정말이지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만 있었다.
대체 누가 용권풍 내부와 바위 더미 꼭대기에 가 볼 생각을 했겠는가.
차라리 이곳은 그나마 지대가 높기라도 하니, 정찰 목적으로 올라올 가능성이 존재했다.
하지만 용권풍은 해도 해도 너무한 장소였다.
‘만약 다른 오아시스도 이런 식으로 숨겨져 있다면, 지금까지 찾지 못한 게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문제는 보급인데…….’
지금쯤 공략대는 일곱 팀으로 나뉘어 오아시스를 찾고 있을 터였다.
벌써 출발한 지 36시간이 훌쩍 넘은 상태.
팀별로 물을 나눴다면 이제 슬슬 바닥을 보일 때가 되었다.
공략대원들은 장장 76시간 동안 태양광에 노출된 채, 암살자들과 싸우며 이 넓은 사막을 헤맨 것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헌터라고 해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물까지 부족하다면, 그대로 말라 죽을 가능성이 컸다.
한계에 봉착했을 때, 인간은 도대체 어떤 선택을 할까?
오랫동안 수많은 유형의 인간 군상을 봐 왔던 유진은 금방 해답을 유추할 수 있었다.
"전쟁과 약탈. 남은 생존 방법은 그뿐이겠지."
그는 부지불식간에 2층의 시련이 시험하려고 하는 바를 깨달았다.
오아시스를 찾은 팀은 살아남지만, 그러지 못한 자들은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될 터.
남은 물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발생할 것이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네 팀으로 나뉘어 오아시스를 하나씩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네 팀으로 나누는 건 성공 확률이 너무 낮았다.
‘시련의 의미가 이런 거였군.’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새로운 오아시스를 찾아서 공략대를 인도해 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절반밖에 남지 않은 상황.
차라리 남은 두 개의 오아시스를 최대한 빨리 찾아 버리는 편이 나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유진은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 * *
"아니, 오아시스가 어디 있다는 거야? 이렇게 오래 돌아다녔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네."
전시영의 팀은 36시간이 흐른 상황인데도 아직 오아시스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물은 얼추 바닥을 보였고, 작열하는 태양광에 공략대원들은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오아시스 확보 메시지는 두 번에 그쳤다.
지금쯤이면 하나가 더 떠야 하는데, 영 감감무소식이었다.
녹턴을 타고 날아다니는 블라드 유진으로서도 오아시스를 찾는 게 녹록지 않은 모양이었다.
톡! 톡! 파앙―!
"젠장!"
500ml 생수통을 뒤집어 보았지만, 입술에 닿는 건 두 방울의 물뿐이었다.
전시영은 신경질을 내며 생수통을 바닥에 냅다 집어 던졌다.
그런데 모래에 박혀 들어야 정상인 플라스틱 통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게 아닌가.
푸확―!
공교롭게도 그녀가 생수통을 던진 자리에는 하급 마족 암살자들이 숨어 있었다.
"이런 지긋지긋한 새끼들이! 초열지옥 역풍!"
삐이이―! 콰아아앙!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휘둘러 노란빛 구체를 쏘아 내자, 모래 더미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아, 더워 죽겠는데! 켁! 켁!"
산산조각으로 박살 나 나뒹구는 암살자들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던 전시영은 갑작스럽게 기침을 해 댔다.
자신이 일으킨 폭발의 영향으로 모래가 왕창 튀어 입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으아아아!"
한차례 소리를 지르고 나자, 답답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트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문득 누군가가 그녀의 뒤에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팀장님?"
"후! 왜?"
전시영의 팀원이 된 한국 출신의 A급 헌터였다.
암살자들을 박살 내며 좀 진정이 되었는지, 그녀는 태연하게 되물었다.
이마에서 흐른 땀 때문에, 여전히 인상을 쓰고는 있었지만.
"……저쪽에 다른 팀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박자 숨을 고른 A급 헌터는 반대편 모래 언덕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일단의 무리가 언덕을 넘어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방향 감각을 잃고 사막을 헤매다가 이렇게 마주친 모양이었다.
"누구지? 일단 가 보자고."
"네."
전시영은 곧장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공략대원들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이서 보니, 저들은 왕주안의 팀이었다.
거의 패잔병이나 다름없는 모습은 그녀의 팀과 똑같았다.
하지만 뭔가 조금 더 피폐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좀 어때?"
전시영은 선두의 왕주안을 향해 손을 흔들며 영어로 말을 걸었다.
그러자 거의 즉각적으로 부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저쪽 언덕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연히 오아시스를 찾는 건 실패했고요."
"몇 시 방향으로 출발했지?"
"6시입니다."
"음?"
상대의 대답에 그녀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공략대는 블라드 유진이 날아간 방향을 12시로 잡고, 3시부터 9시까지 일곱 방면으로 출발했다.
녹턴을 탄 그는 하늘을 날아다니니, 그 정도는 혼자서 수색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왕주안의 대답이 좀 이상했다.
6시 방향으로 나아갔다면, 9시 방향을 맡은 전시영의 팀과 마주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8시 방향의 팀이었다면 얼추 이해하겠는데, 6시 방향은 너무 멀었다.
지금껏 걸어온 거리를 가늠해 봤을 때, 결단코 만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자, 상대는 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6시 방향은 돌산으로 완전히 막혔습니다. 오른쪽으로 우회하다 보니, 다른 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죠. 그래서 겹치지 않으려고 좀 더 크게 돌아온 겁니다."
"아, 그랬군. 이쪽으로 계속 가 보려고?"
"네, 그래야 할 것 같네요. 그런데 보급이 너무 부족합니다."
"그럴 때가 되긴 했지. 우리도 남은 게 거의 없어."
당장 팀장인 전시영마저도 배분받은 물을 모두 마신 상태였다.
나름 양심적인 그녀는 팀원들에게 남은 물을 좀 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맨 처음에 정확히 나누고 난 다음에는 물을 아끼라고 몇 번 전달만 했을 뿐.
아예 통제 자체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다른 말이 나오지 않도록 각자의 판단에 맡겨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전시영의 팀에서는 물이 부족하다는 불만이 좀처럼 터져 나오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어쩌죠? 저희는 이대로 더 이상 이동하는 건 어렵습니다. 부상자들을 먹일 물이라도 조금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흠. 일단 팀원들에게 물어보지. 우린 시작하자마자 물을 모두 나눠서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거든."
"감사합니다."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팀원들을 향해서 돌아섰다.
자신이 맡은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니, 솔직히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팀을 나눠 놓았다고는 하나, 저쪽도 같은 공략대였다.
거의 중국 헌터들로 구성되었지만, 부상자 중에는 한국인들이 다수 있었다.
전시영은 차마 그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좀 염치없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군. 물이 남은 사람 중에 나눠 줄 수……."
찌릿!
그런데 그녀가 팀원들에게 양해를 구하려는 순간, 뭔가 섬뜩한 느낌이 머릿속에 경종을 울렸다.
콰아아아아! 푹!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손에서 연옥의 숨결을 쏘아 보냈는데, 이미 날카로운 무언가가 복부를 관통한 뒤였다.
"커헉!"
"팀장님!"
이글거리는 푸른 화염은 멀리 뻗어 나가지 못하고 애꿎은 모래만 뜨겁게 달구었다.
깜짝 놀란 팀원들이 달려오려 했지만, 어이없게도 전방에서 온갖 종류의 공격 스킬이 쏟아졌다.
촤좌좌좌좍! 콰과과광!
"모조리 쓰러뜨리고 물을 빼앗아! 우리라도 살아야 한다!"
"물 내놔! 이 새끼들아!"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왕주안의 팀원들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애초부터 전시영의 팀에 접근한 것 자체가 기습과 약탈을 위함이었다.
"크으으윽!"
바닥에 쓰러진 그녀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왕주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악감정은 없어. 진짜 물이 필요했을 뿐."
"크윽! 그래서 나눠 준다고 했잖아?"
"우린 한시가 급해. 오아시스는 두 번째 이후로 아무 소식도 없으니, 자체적으로 살아날 방도를 마련해야지. 몇 번을 생각해도 이번 시련은 답이 없어 보이거든."
"잠깐만, 너 설마……."
"에이! 7시하고 8시 쪽으로 간 팀은 만나 보지도 못했어. 오해하지 말라고. 우리도 이번이 처음이니까."
털썩!
힘이 다한 모양인지 전시영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상대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작게 주억거렸다.
S급 헌터라고 해도 복부가 관통된 상태로 멀쩡히 움직일 수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극도로 지친 상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문득 왕주안의 눈앞에 열 개의 샛노란 빛무리가 두둥실 떠올랐다.
바로 그 순간, 미동도 없던 전시영이 고개를 번쩍 쳐들며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나도 처음이야. 같은 편을 죽이는 건."
삐이이―! 삐이이―! 삐이이―!
그와 동시에 노란 빛무리들이 분열하며 괴이한 고주파 음을 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