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54화 (55/226)

4화

"갑자기 이게 뭐야? 시련의 조건?"

전시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불현듯 외친 순간, 몇 줄의 글귀가 추가로 더 올라왔다.

[두 번째 시련의 규칙이 공지됩니다.]

[2층의 사막 전역에 오아시스가 발생했습니다.]

[72시간 안에 4개의 오아시스를 발견해야 다음 층으로 가는 게이트가 열립니다.]

[오아시스는 총 10개입니다.]

"오아시스를 찾으면, 모든 게 다 해결되겠네요."

"맞아. 물을 보충하고, 다음 층으로 갈 수 있겠네."

루시아의 말에 전시영이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즈한을 비롯한 S급 헌터들은 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렸다.

물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약간 허탈한 마음도 들었다.

어떻게 이 난관을 돌파해야 할지 막막했는데, 물을 빨리 소진하는 게 해답이었다니.

이럴 줄 알았다면, 일찌감치 물을 풀고 얼른 미션을 받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그럼 40시간이 넘도록 뙤약볕이 작열하는 사막을 헤매면서 체력을 낭비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물론 결과론일 뿐이라, 이 판단으로 천즈한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략대원 중 해답을 미리 알았던 사람은 존재치 않았으니까.

"그나저나 시간제한이 있습니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요?"

"당연히 다음 층으로 가는 게이트를 찾지 못하게 된다는 거겠죠."

천즈한의 질문에 미국의 S급 흑인 헌터, 조나단 잭슨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오아시스가 발생했다는 말을 듣자, 이자는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리 S급 헌터라도 이런 극악한 상황을 버티는 건 힘들기 그지없었으니까.

조나단에 이어 블라드 유진도 핵심을 찌르는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럼 한 가지는 확실하군."

"뭐가 확실하다는 겁니까?"

"팀을 나눠서 수색해야 한다는 거지."

"……그건 참 좋지 않은 소식이군요."

오아시스를 시간 내에 발견하려면, 공략대를 쪼개는 건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다.

사막이 얼마나 빌어먹을 정도로 넓은지는 40시간이 넘게 돌아다닌 끝에 알아낸 유일한 사실이었다.

게다가 사방 천지에 신기루가 가득한 대지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건 엄청나게 어려울 터였다.

멀리서 보고 찾아가는 게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직접 확인하는 방식으로 수색해야 했으니까.

그러다 보면 허상만 좇다가 오아시스는 구경도 못 해 보는 팀도 있을 것이다.

"팀은 S급의 수만큼 나누는 게 좋겠네요. 여덟 팀이면 절반만 오아시스를 찾아도 성공이잖습니까?"

"26, 27명이라……. 한 팀으로 딱 적당한 수준이군요."

"암살자 놈들이 습격해도 그 정도 규모라면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을 겁니다."

그가 화두를 던지자, S급 헌터들은 속속 의견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마치 머리가 트인 것처럼 희망찬 회의가 쭉쭉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다 찬물을 끼얹은 건 가장 먼저 핵심을 찔렀던 유진이었다.

"수색은 일곱 팀으로 진행하는 게 좋겠다."

"그럼 한 팀에는 S급 두 명이 들어가야 하는데, 굳이 그래야 합니까?"

"아니, 나 혼자 활동하겠다는 말인데."

"예?"

천즈한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일사천리로 의견이 모이고 있는데, 난데없이 훼방을 놓는 것처럼 느껴졌으리라.

하지만 상대가 블라드 유진이다 보니, 불쾌한 티는 전혀 내지 못하고 최대한 설득해 보려 했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혼자는 위험합니다. 힐러 지원도 못 받지 않습니까? 여기서 S급마저 잃는다면, 너무도 큰 손실입니다."

"그럴 리가. 보급품도 나눠 줄 필요 없다."

"아니, 굳이 왜……."

"애초에 S급을 주축으로 팀을 구성하는 이유가 뭐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는 천즈한을 향해서 그는 문득 질문을 던졌다.

문제의 해답은 간단한 것이었다.

천즈한은 당연하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야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죠. 그래야 하급 마족 암살자들의 습격에도 대응할 수 있고, 오아시스도 빨리 찾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거지.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다. 더불어 이렇게 하는 게 수색이 훨씬 빨라."

블라드 유진의 답변을 이해하는 데는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설마하니 저런 광오한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그럼 나도 다 말한 거로 치겠다."

그렇게 말한 그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서 있던 S급 헌터들을 지나, 사막을 횡단하기 시작했다.

유진이 혼자서 공략대를 떠나려 하자, 천즈한은 루시아와 전시영을 돌아보았다.

그나마 이 두 사람이 저 오만한 은발의 미남자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뭘 어떻게 해 줄 수는 없었다.

"저 사람이 그렇다면 진짜로 그럴 가능성이 커."

"맞아요. 혼자서도 잘 해내실 분이죠. 그럼 일곱 팀으로 나눠야겠네요. 한 팀당 서른 명씩?"

전시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고, 루시아는 자연스럽게 회의를 이어서 진행했다.

멀어지는 블라드 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천즈한의 눈빛에는 복잡한 심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마치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차 있는데, 차마 저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천즈한의 곁으로 문득 루시아가 다가오더니, 위로의 한마디를 꺼냈다.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마 유진 님은 그냥 걸어서 이동하지 않으실 거예요. 보세요."

두두두두두!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보니, 붉은 화염 갈기를 휘날리는 유령 군마에 탑승한 그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루시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벌써 저 멀리 날아간 유진을 가리켰다.

"저러니 혼자서 가겠다고 하신 걸 겁니다. 이제껏 저기에 누군가를 태우는 걸 본 적이 없거든요."

"제가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닙니다. 탑이 얼마나 높을지도 모르는데, 벌써 이런 분열이라니요."

"분열이 아니라, 팀 분할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죠."

그녀는 천즈한의 말을 정정해 주며 몸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루시아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매우 희미하게 들려왔다.

"힘의 균형을 맞추려면, 공략대가 통째로 움직여도 안 될 거 같은데."

"대체 그게 무슨……."

블라드 유진이라는 사람이 대관절 뭐길래 그런 소리를 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천즈한은 이내 어물거리며 말꼬리를 흐려 버렸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대원 한 명 때문에, 공략대 전체의 분위기를 흩뜨릴 수는 없었으니까.

* * *

두두두두두!

작열하는 태양광이 지면을 후끈 달궜지만, 유진이 달리는 허공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고속으로 비행하는 중이라, 되레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뙤약볕은 그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블라드 유진은 생존을 위해서 물과 식량을 섭취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엄청나게 넓군. 걸어서 오아시스를 찾는 건 상당히 어렵겠는데.’

벌써 수십 킬로미터를 날아왔음에도 오아시스는커녕, 모래 더미가 아닌 지형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이따금 황갈색으로 가득한 지평선에 무언가가 발생하여 유진의 시야를 가리기도 했다.

순식간에 덩치를 키우며 일대를 호령하는 무지막지한 크기의 용권풍(龍卷風)이었다.

쿠콰콰콰콰!

녹턴은 빠르게 회전하며 모래를 빨아들이는 용권풍을 피해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와 유령 군마에게 자연 현상은 별다른 영향을 미칠 수 없지만, 그래도 시야가 극단적으로 차단되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빨리 오아시스를 발견하려면, 이런 괴현상은 그냥 가볍게 넘기는 게 옳은 판단이었다.

그런데 빠르게 용권풍을 지나치던 중, 블라드 유진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잠깐, 이거 뭔가 좀 이상한데.’

이만큼이나 멀리 이동했음에도 그는 오아시스를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 공략대원들의 발걸음으로는 이동 시간을 두 배 이상 쓰고도 여기까지 올 수 없을 터였다.

그들은 상당히 지친 데다가, 하급 마족 암살자의 부패 독에 당한 부상자까지 달고 있었으니까.

만약 한곳에 부상자를 몰아넣고, 비교적 멀쩡한 상태의 여섯 팀을 운용한다 해도 힘들 것 같았다.

그만큼 유진은 어마어마한 거리를 날아온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오아시스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대원 중 몇 명에게 특별한 이동 능력이 있다고 해도 달성할 수 없는 목표다."

1층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탑은 불가능한 미션을 제시하지 않았다.

잘하면 통과할 수 있으나, 상당한 손실을 감수해야만 하는 그런 목표치를 내놓았다.

아마 지금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여기서 더 멀리 가 봐야 의미가 없을 거라는 사실을 뜻했다.

‘차라리 저 용권풍 내부가 의심되는군.’

유진은 용권풍의 위치를 이동 한계선으로 설정하고, 크게 원을 그리며 수색해 보기로 했다.

물론 그러기 전에 가장 의심되는 곳부터 방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가자. 녹턴."

"이히히힝!"

그의 명령에 유령 군마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대한 토네이도를 향해서 돌진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허공에 시뻘건 말발굽 자국을 남기며 녹턴은 거대한 모래 폭풍 속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슉―! 쿠콰콰콰콰!

역시나 용권풍의 내부는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바람에 실린 수많은 모래 알갱이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육신을 마구 두드렸다.

아마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고속으로 날아드는 모래에 맞아 죽을 정도였다.

온몸에 시퍼런 멍이 든 채로 말이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과 녹턴은 아무렇지도 않게 모래 폭풍을 헤치고 들어갔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전진하자, 어느 순간 전신에 가해지던 압박이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다.

퍼엉―! 츠츠츠츠츠!

용권풍의 중심으로 들어간 그는 가볍게 피의 권능을 일으켰다.

그러자 온몸에 달라붙었던 모래 알갱이들이 알아서 빠르게 떨어져 나갔다.

"웬만한 A급 수준으로는 버티기 힘든 곳이로군."

직접 몸으로 겪어 보건대, A급 최상위 탱커쯤은 되어야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래를 떨치고 나자, 유진은 주변을 여유롭게 돌아볼 수 있었다.

외곽으로는 여전히 무시무시한 모래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중심부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방어막이 정확하게 이곳만 지키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뿌연 시야 때문에, 지상의 상황이 영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내려가자.’

그의 명령에 녹턴은 서서히 고도를 낮췄다.

그러자 황갈색 먼지로 인해 잘 보이지 않던 바닥의 모습이 그제야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거의 지면에 가까워지자, 유진의 눈앞에 반가운 홀로그램 글귀가 떠올랐다.

[오아시스를 발견했습니다.]

[앞으로 시련 종료까지 64시간 23분과 세 개의 오아시스가 남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용권풍의 중심에는 그가 그토록 찾던 오아시스가 있었다.

주변에 온통 먼지구름이 가득함에도 오아시스는 신비로운 에메랄드색으로 빛났다.

바닥에 내려선 그는 공간 확장 주머니에서 빈 물통을 꺼내 서둘러 물을 담았다.

블라드 유진은 하등 필요 없지만, 공략대원들에게는 천금과도 같을 터.

그런데 가져온 물통을 가득 채우자, 난데없이 오아시스 중심에서 굉음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쿠르르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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