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짧고 간결한 파공성에 이어 유연하게 휘어지는 협봉검(狹鋒劍)이 바닥을 쓸 듯이 지나갔다.
유진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한국 헌터를 던져 버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자의 발목이 그대로 절단될 뻔했다.
푸스스스!
공격에 실패하자, 모래 속에 숨어 있던 무언가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너덜너덜한 황갈색 피풍의(披風衣)를 걸치고 얼굴에는 백색 가면을 쓴 인형.
암살자치고는 덩치가 상당했지만, 손에 든 기다란 검은 마치 펜싱 경기에 쓰는 것처럼 얇았다.
뭔가를 발라 놓은 듯, 검신은 기이한 암청색으로 번들거렸다.
푸스스스! 푸스스스!
게다가 이곳저곳의 모래가 꿈틀거리더니, 똑같은 옷을 입은 자들이 열 명이나 모습을 드러냈다.
블라드 유진의 시선을 보고 자신들의 위치가 발각되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어, 어후! 깜짝이야."
"모두 이쪽으로 모이세요!"
놈들이 일행을 포위한 형국이 되자, 한국 헌터들은 힐러를 중심으로 방진을 형성했다.
그래 봐야 네 명이 등지고 서서 사방을 경계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적어도 그가 놈들을 상대하는 동안, 방해는 되지 않을 테니까.
스이잉!
슬쩍 일행들의 방진을 돌아본 유진은 오른손에 다섯 줄기의 소수혈인을 뽑아냈다.
그러고는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갔는데, 암살자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단순히 그의 기세에 눌린 게 아니라, 뭔가를 준비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래. 아까 그놈들처럼 무턱대고 덤비면 재미없지.’
1층에서 상대했던 최하급 마족들은 대략 B급 헌터 수준의 신체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독특한 형태의 검을 든 2층 암살자들은 최하급 마족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기민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고도로 훈련된 살수(殺手)를 보는 듯했다.
척! 스팟―!
문득 유진이 발걸음을 멈추자, 암살자들의 태세가 돌변하기 시작했다.
촤좌좌좍!
정면으로 두 마리가 달려들며 협봉검을 내지르는 순간, 양쪽에서 바닥에 붙은 듯한 공격이 들어왔다.
측면의 두 녀석이 지면에 몸을 거의 눕히다시피 한 상태로 발목 베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네 번의 공격을 한꺼번에 막아야 하는 상황.
하지만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살짝 도약하며 양발을 강하게 굴렀다.
터덥!
그러면서 정면으로는 소수혈인을 무신경하게 휘둘러 버렸다.
쑤화아앙! 쩌정!
그러자 목과 명치를 노리고 찔러 들어오던 협봉검이 그대로 부러져 나가는 게 아닌가.
게다가 유진의 양발은 발목을 겨냥하고 휘둘러지던 두 자루의 검신을 사뿐히 지르밟고 있었다.
그저 가볍게 손톱을 휘두르는 동작 하나만으로 네 녀석을 한꺼번에 무력화하는 느낌이었다.
콰칭! 쩌정!
‘잘 막고 있군.’
슬쩍 뒤편을 돌아보니, 한국 헌터들은 암살자들의 공격을 잘 버텨 내는 중이었다.
소수혈인을 아래로 내지르자, 검을 놓고 일어나던 암살자의 목이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푸확!
왼쪽 발목을 노렸던 녀석은 섣불리 몸을 일으키지 않고, 데굴데굴 굴러 유진의 공격 반경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의 손끝에서 튀어나온 다섯 줄기의 붉은 칼날은 생각보다 훨씬 더 길었다.
스잉―! 푸쉭!
소수혈인을 하나로 합쳐서 길이를 대폭 늘린 블라드 유진은 물러나던 암살자의 목을 신속하게 꿰뚫어 버렸다.
그러고는 무기를 잃은 정면의 두 녀석에게 접근하여 양손을 내질렀다.
터덕! 츠츠츠츠츠!
그의 피부는 혈관과 뼈가 다 드러나 보일 정도로 투명하게 변했다.
그러자 거무튀튀한 암청색 혈액이 손을 통해서 유진의 체내로 쭉쭉 빨려 들어왔다.
[하급 마족 암살자의 기억 중 일부를 흡수했습니다.]
[언어가 완전치 않아, 마족어 사용이 불가합니다.]
[온전한 마족어를 사용하려면, 더 높은 등급의 혈액을 흡수하십시오.]
‘아쉽군.’
뭔가 제대로 된 진형 같은 걸 갖추기에, 이 녀석들은 정형화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급 마족들은 수신호와 초음파를 통해서 간단한 의사소통만 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건진 게 없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많다."
놈들의 기억에 의하면, 이 광활한 사막에는 수천에 달하는 하급 마족 암살자들이 숨어 있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삼삼오오 흩어진 공략대원들을 노리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시련을 만나기도 전에 상당한 피해가 있을 것 같았다.
* * *
사태를 파악한 S급 헌터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모든 공략대원들을 구할 수는 없었다.
특히 언어가 너무 달라서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았던 조는 거의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기습 초기에 바로 방진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급 마족 암살자들을 쫓느라 뒤늦게 합류한 천즈한은 침통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피해는 얼마나 되나."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왕주안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사상자를 보고했다.
"전사자 28명, 부상은 21명입니다."
"부상? 힐러들을 투입했는데도 부상이 남아 있을 수가 있나?"
"그게……. 암살자들의 무기에 부패 독이 발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처 부위가 썩어 들어가는 중입니다."
"허!"
하급 마족 암살자들의 부패 독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힐러의 치유 능력으로도 완치가 불가했으나,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온몸이 썩어 들어가 전사자만 늘릴 뿐이었다.
결국에 힐러들은 부패 독의 효과가 다할 때까지 정기적으로 치유 능력을 걸어 줘야만 했다.
"힐러 자원의 소모가 너무 심한데……."
"그렇습니다. 이러다가 힐러들이 먼저 퍼져 버릴 지경입니다."
"암살자들은 얼추 처리했다지만, 정찰은 어떻게 되었나."
"별다른 성과가 없습니다. 사막이 너무 넓은 탓에……."
"그건 뭐 어쩔 수 없겠군."
아직 두 번째 시련을 만나기도 전인데, 사상자가 상당히 많이 발생했다.
천즈한은 침울한 분위기의 공략대원들을 둘러보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어디로 가든 간에 온통 모래뿐이니, 지금부터는 함께 움직이겠습니다."
그렇게 얘기했지만, 실제로 공략대는 이제 인원을 분리할 수가 없게 되었다.
부패 독에 당한 부위가 발목이라서, 부상자들은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돌아가며 부상자를 업고 움직여야 했다.
부상자 한 명당 두 명 이상의 인원이 붙어야 이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순간적으로 천즈한은 21명의 부상자를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세차게 휘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저들을 버리고 이동한다면, 공략대 내부에는 불신이 팽배하게 될 터였다.
앞으로는 더욱 어려운 시련이 닥쳐와 하나로 똘똘 뭉쳐도 통과하기 힘들 텐데, 벌써 분열될 수는 없었다.
결국에 42명의 인원이 돌아가며 부상자를 보살피면서 천천히 이동하기로 했다.
서벅! 서벅!
공략대는 푹푹 빠지는 모래를 밟으며 방위도 모른 채 한쪽으로 주야장천 걸었다.
"와! 더워죽겠네."
전시영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연신 손부채를 흔들었다.
S급 헌터도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을 만큼 사막의 폭염은 지옥을 방불케 했다.
언제 암살자들이 모래 속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헌터들은 방어구를 공간 확장 주머니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저 빌어먹을 뙤약볕에 쪄 죽느니, 차라리 맨몸으로 싸우는 게 나았으니까.
몇몇은 혹시 몰라 챙겨 왔던 판초 우의를 넓게 펼쳐서, 이동식 천막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강렬한 태양광에 공기가 데워져서 이글거리는 아지랑이가 연신 솟구쳐 올랐다.
"어어? 저거 오아시스 아니야?"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가던 전시영이 외치자, 선두의 공략대원들이 동시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온통 황갈색 모래밖에 없는 사막에서 새파란 빛이 출렁이는 표면이라니.
저건 오아시스가 분명했다.
"오오! 맞습니다."
"물이다! 물!"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공략대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발이 푹푹 빠지는 데다가 암살의 위험도 있었지만,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천즈한도 상당히 지친 듯, 대원들의 개인행동을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나게 달려가던 공략대원들은 이윽고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사, 사라졌다."
"젠장할! 신기루였어!"
"책에서만 보던 걸 내가 직접 겪게 될 줄이야. 정말이지 빌어 처먹을 현상이로군."
그들이 목격한 건 열기로 인해서 빛이 굴절되어 푸른 하늘이 바닥에 비쳐 보인 신기루 현상이었다.
드넓은 호수를 상상하고 달려간 대원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무릎을 짚었다.
탈진한 상태에서 미친 듯이 달렸더니, 더욱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이거 전부 말라 죽겠습니다. 슬슬 물을 좀 푸시죠."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물을 벌써 절반 넘게 사용했어. 이대로 가다간……. 파멸뿐이야."
왕주안이 의견을 냈지만, 천즈한은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작 두 번째 시련에 도착하기도 전인데, 벌써 물을 70%나 사용한 상태였다.
아마 천즈한이 사태의 심각성을 미리 파악하고 물을 통제하지 않았다면, 벌써 다 쓰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만큼 사막의 열기는 엄청난 수준이었으니까.
"아직 하루도 안 지났다니, 믿기 힘들군요. 너무 더워서 시간관념도 없어졌나 봅니다."
왕주안이 땀에 젖은 손수건을 짜며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한데, 그 소리를 들은 블라드 유진이 무덤덤하게 답했다.
"이미 이틀이 지났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제껏 해가 진 적도 없는데요."
그의 말에 왕주안 대신 천즈한이 불쑥 끼어들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유진은 공략대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말했다.
"41시간 19분 정도 되었군. 우리가 게이트를 통과한 직후부터 말이야."
"시계도 없는데 어떻게 정확히 아시죠?"
"사소한 능력이라고 해 두지."
"……그게 사실이라면, 물을 좀 풀긴 해야겠군요. 목을 축일 정도만이라도 나눠야겠습니다. 하필이면 후위의 대원들이 물을 많이 갖고 있던 탓에, 이제 정말 얼마 없거든요."
아무리 덥다고 해도 고작 이틀 만에 물을 이만큼이나 소비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범람하던 산성 액체에 공간 확장 주머니를 잃어버려서 물이 조금밖에 남지 않은 탓이었다.
답답한 한숨을 내쉰 천즈한은 공략대원들에게 물을 나눠 주라고 전달했다.
이윽고 왕주안을 비롯한 몇몇 중국의 A급 헌터들이 공간 확장 주머니를 열어서 생수병을 분배해 주었다.
대원들에게 주어진 건 500ml짜리 생수 한 병뿐이었다.
"너무 급하게 마시면 안 됩니다. 앞으로 그거로 이틀을 버텨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천즈한이 직접 돌아다니며 물을 아끼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인내심이 부족한 몇몇 헌터들은 도저히 못 참겠다며 생수를 한 번에 들이켰다.
200명이 넘는 인원이 500ml씩 나눠 가지면, 그것만 해도 대략 100L였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 나눈 물을 거의 소진하자, 공략대원들의 눈앞에 홀로그램 글귀가 떠올랐다.
[보유한 물의 양이 20% 이하로 감소함에 따라 시련의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