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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52화 (53/226)

2화

구름다리의 출렁거림 때문인지, 중국의 여성 헌터 한 명이 넘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공략대원들의 질주로 다리가 흔들리고 있었기에,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발목을 붙잡은 거로 보아, 예사롭지 않은 부상이 발생한 듯했다.

"그대로 가만히! 몸에 힘주세요!"

모두가 깜짝 놀라며 어찌할 바를 몰랐던 그 순간, 누군가가 넘어진 여성 헌터를 들쳐 메는 게 아닌가.

방어구를 붙잡고 번쩍 들었는데, 달리는 속도가 그리 줄어들지도 않았다.

"계속 가십시오! 앞에서 빨리 안 가주면, 병목이 일어날 겁니다!"

"가즈아!"

다행히 그녀의 바로 뒤에서 달리고 있었던 사람은 공략대장 천즈한이었다.

그자는 넘어진 여성 헌터를 짊어진 채로도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천즈한의 기지 덕분에 대형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지만, 아직 시련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일로 인하여 후위의 공략대원들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연쇄 병목 현상으로 번지게 되었다.

잽싸게 수습하긴 했지만, 사실 이건 달리는 페이스를 잃었을 때부터 예견된 결과였다.

타다다닷!

온 힘을 다해 달린 천즈한은 이윽고 반대편 절벽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어서 치료부터 받으세요."

협곡을 건너자마자 옆으로 몸을 날린 그자는 얼른 여성 헌터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공략대원들의 질주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후위를 초조한 표정으로 살폈다.

병목으로 인하여 시간이 지체된다면, 뒤편의 공략대원들이 구름다리를 건널 수 없을 테니까.

"휴! 다행이군."

빠른 대처로 병목을 최대한 막았지만, 시간적 여유는 그리 많지 않았다.

[20, 19, 18…….]

아직 후미가 구름다리에 진입하지도 못했는데, 초읽기는 벌써 17초에 도달한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빠듯하거나 1, 2초 정도가 모자랄 것 같았다.

A급이 건너오는 데는 대략 7초가량 걸리니까, 마지막 사람이 그전에만 진입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작 여성 헌터가 넘어진 것 하나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다리가 무너지지 않는군."

가장 먼저 건너와서 상황을 지켜보던 블라드 유진은 시련의 두 번째 규칙을 상기했다.

이미 100명이 넘게 통과한 상태임에도 구름다리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러네. 아직은 앞뒤 간격이 잘 맞고 있어. 병목만 안 생긴다면, 충분히 성공하겠는데?"

전시영이 그의 말에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세 사람의 눈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순서대로 구름다리에 진입하는 중인데, 점점 행렬 뒤쪽의 간격이 앞쪽보다 훨씬 좁아지는 것이다.

타다다닥!

"어? 저거 좀 위험하지 않나요?"

그 사실을 확인한 루시아가 경고성을 발하던 바로 그 순간.

공략대원들의 눈앞에 아찔한 내용의 홀로그램 글귀가 떠올랐다.

[100명 이상이 한 번에 올라섬으로 인해, 죽음의 구름다리가 끊어집니다.]

[살기 위해서는 달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투두두둑!

"어어?"

최후방의 열댓 명이 아직 진입하지도 못했는데, 구름다리는 그대로 끊어져 버렸다.

하지만 절반 이상 건너온 사람들이 달리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뚝 끊어졌던 구름다리가 느릿하게 꺾이며 어느 정도 시간을 벌어 줬기 때문이었다.

"더 빨리! 아직 안 끝났어!"

대략 스무 명의 인원은 구름다리가 끊어지고도 반대편 절벽에 도달할 수 있었다.

슈우우우! 철썩!

하지만 떨어져 내리던 구름다리는 이내 절벽에 충돌하고 말았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몇몇은 절벽 아래로 추락했지만, 대부분은 판자를 잘 붙잡고 있었다.

천즈한은 절벽에 부딪히고 한동안 출렁거리던 구름다리가 진정되자, 곧바로 구조 작업을 시작했다.

"당겨!"

"으아아아!"

헌터들은 기본적으로 엄청난 근력의 소유자였다.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비정상적으로 강했기에, 수 톤에 달하는 무게도 거뜬히 들 수 있었다.

수십 명이 달라붙자, 백 미터에 달하던 구름다리도 금방 끌어 올리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탑의 시련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쿠르르르르!

협곡의 한쪽 끝에서 강력한 진동이 느껴지더니, 엄청난 양의 물이 마치 댐이라도 터진 것처럼 빠르게 다가왔다.

협곡을 건너지 못한 탈락자들을 그대로 쓸어버릴 듯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이, 이런!"

"더 빨리 당겨!"

공략대 전원이 힘을 모았지만, 급류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구름다리를 절반도 끌어 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물줄기는 절벽에 매달린 공략대원들을 휩쓸었다.

그뿐이랴, 아예 구름다리에 진입하지도 못한 후미의 열댓 명 또한 급류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출발지의 지대가 대략 5m 정도 낮았기에, 물살이 황무지를 완전히 뒤덮은 것이다.

치이이이익!

게다가 이 푸른 액체는 일반적인 물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녹이고 황폐화하는 초강력 산성 액체였다.

"노, 녹고 있어!"

절벽에 매달려 있든, 진입조차 못 했든 가릴 것 없이 탈락자들은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다.

이윽고 산성 액체로 이루어진 급류가 싹 사라지고 나자, 협곡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출발지가 어째서 황무지였는지 알 것 같구나.’

이따금 쏟아지는 산성 액체 때문에, 수림이 이어지지 못했으리라.

"……잔혹하군요."

"되게 허망하다. 싸우다 죽은 것도 아니고, 저따위 함정에 당하다니 말이야. 이 시련을 만든 자도 상당한 악취미군."

"맞아요. 차라리 전투 중에 장렬히 전사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습니다."

루시아와 전시영은 비슷한 감상을 내놓았다.

헌터라면 누구나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공략에 임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미션 실패로 인해 산성 액체에 녹아내리는 건 결단코 겪고 싶지 않은 최후였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잖아!"

"아니, 왜 하필이면 연습 때는 한 번도 안 넘어지다가 실전에서 넘어지냐고!"

착잡한 표정으로 산성 액체가 싹 빠져나간 협곡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료를 잃은 공략대원들이 다리를 건너던 중에 넘어졌던 여자를 향해서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다리가 꼬이는 바람에……."

그녀는 어물거리며 해명을 해 보려 했으나, 이내 포기하고는 고개 숙여 사죄했다.

여기서 더 말해 봤자 변명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비난과 사과 모두가 중국어라, 다른 나라의 헌터들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저 말투만 보더라도 돌아가는 상황 정도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넘어졌던 여자의 앞에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더니, 중국 헌터들을 향해서 외쳤다.

"진정하십시오. 우리끼리 비난할 때가 아닙니다."

멍한 표정으로 협곡 아래를 바라보고 있던 천즈한이었다.

공략대장이 나서서 중재해 보려 했지만, 중국 헌터들의 분노를 잠재우긴 쉽지 않았다.

한국인들의 요청으로 순서를 섞는 과정에서, 후미를 중국 헌터들이 맡았기 때문이었다.

인원이 가장 많아서 어쩔 수 없는 거였지만, 분노한 군중을 논리로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천즈한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욕설을 내뱉던 공략대원들의 소란이 점점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건 대장인 제 실책입니다. 후미를 맡은 대원들의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최후방에 남아서 끝까지 조정했어야 하는 건데……."

그자의 발언에는 책임자로서 통감하는 마음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천즈한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그만큼 신속한 대처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작은 머뭇거림이 스노우 볼이 되어 큰 사고로 나타났지만, 잘잘못을 따질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이번에 전사한 공략대원의 수효는 자그마치 60명이었다.

전체 전력의 20%가 날아간 데다가, 그중 대다수가 중국 출신 헌터였다.

하지만 불만을 잠재운 건 세계적으로 유명한 S급 헌터이자, 최고의 리더로 손꼽히는 천즈한의 사죄 덕분이었다.

자존심마저 구겨 가며 고개 숙인 자국의 인재 앞에서, 계속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누구든 넘어질 수 있었어. 게다가 그걸 직접 해결한 건 대장이야."

"덕분에 전체 전력의 절반 이상이 살았잖아. 거기서 병목이 일어났다면, 우리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일어나십시오. 대장.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계속 우리를 이끌어 주세요."

중국 헌터들은 분노를 가라앉히며 무릎 꿇은 천즈한을 일으켜 세웠다.

아직도 눈물이 펑펑 흐르고 있었으나, 언제까지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황급히 얼굴을 닦은 천즈한은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상태로 공략대를 이끌었다.

"……가시죠."

* * *

스팟―! 스팟―!

게이트를 건너는 느낌은 미궁으로 진입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새파란 구체를 통과하자, 블라드 유진의 눈앞에 끝도 없는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사박! 사박!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모래의 깊이는 엄청났다.

게다가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끝없는 지평선만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탑의 2층은 전체가 사막으로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게이트를 찾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1층에서는 그래도 손쉽게 시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하급 마족들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니, 금방 마주치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방위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사막에서 마족의 흔적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바람에 모래가 휘날리면 바닥에 생겼던 족적은 금방 사라져 버리고 말 테니까.

"일단 날씨부터 쉽지 않네."

전시영의 말대로 선선하던 1층과는 달리, 2층은 무지하게 더웠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건조한 날씨 덕분에, 그늘에 들어가면 버틸 만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사막에서 그늘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지만.

허허벌판에 덜렁 투하된 상황이라, 공략대는 어디로 가야 할지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변화하는 모래 언덕뿐이라, 목표로 잡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피신처부터 찾는 게 어떻습니까? 물의 소비가 너무 많습니다."

S급 헌터들을 소집한 천즈한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글거리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장기 공략이 될 것을 대비하여 공간 확장 주머니에 식수를 꽉꽉 채워 오긴 했다.

하지만 300 아니, 240명이나 되는 사람을 언제고 먹일 수는 없었다.

"어디로든 가 보자고, 이거 원 더워서 도무지 서 있을 수조차 없군."

모스크바 사람인 레프 미하일로비치 알렉세이는 잔뜩 인상을 쓰며 말했다.

거칠고 투박한 러시아식 영어에는 짜증이 가득 묻어 있었다.

"좋습니다. 얼른 움직여 보죠."

천즈한의 의견대로 공략대는 삼삼오오 인원을 나누어, 주변 정찰을 개시했다.

대원들이 본대와 지나치게 멀어지지 않도록 탐색 시간을 제한하는 건 필수였다.

너무 멀리 나갔다가 낙오되기라도 한다면, 찾기가 매우 어려울 테니까.

블라드 유진의 탐색대에는 한국의 A급 헌터 셋과 교황청 힐러 한 명이 배정되었다.

힐러가 딱 50명뿐이었고 S급 헌터를 한곳에만 배치할 수는 없기에, 이런 식으로 인원을 나눈 것이었다.

그런데 문득 한 헌터가 어색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을 붙였다.

"안녕하십니까? 블라드 유진 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날 본 적 있나."

"공략 중에 몇 번 뵌 적 있습니다. 먼발치에서 마주쳤을 뿐이지만요."

한국의 헌터 중에서 유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터였다.

국토에 자리한 대규모 미궁을 정화한 영웅이었으니까.

하지만 의외로 그는 상대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드라코 도무스에서 본 자로군."

"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다. 근데 당신, 자리를 좀 비켜 줘야겠어."

"예? 으억!"

꽈악! 후웅!

블라드 유진은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헌터의 멱살을 잡고 옆으로 던져 버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모래에서 뾰족한 칼날이 불쑥 튀어나와 발목 쪽을 그어 버리는 게 아닌가.

스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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