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51화 (52/226)

1화

"이 다리를 건너야만 다음 층으로 갈 수 있겠군요. 꽤 쉬워 보이는데요?"

천즈한은 밝은 얼굴로 흔들다리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윽고 추가로 떠오른 홀로그램 글귀를 보자마자, 대번에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어느새 긍정적인 평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첫 번째 시련의 규칙이 공지됩니다.]

[죽음의 구름다리는 최초 도전자가 절벽을 떠난 순간부터 1분 후에 끊어집니다.]

[이 다리는 100명 이상 올라갈 수 없습니다.]

"1분 뒤에 끊어진다고? 그럼 다리를 건너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아예 100명을 추려서 건너야 하는 건가? 나머지는 이곳에 남고?"

홀로그램 글귀를 본 공략대원들은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두 번째 문장의 설명이 너무 모호하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직접 겪어 보지 않고서는 의미를 알 수 없게 되어 있군.’

블라드 유진이 보기에도 내용은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어떤 놈이 이런 미션을 만들어 두었는지는 모르지만, 도전자를 혼란스럽게 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물론 이 구름다리 시련을 만든 자의 속셈을 안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다.

주어진 정보는 한정적이고, 공략대가 다리를 건널 기회는 한 번뿐이었으니까.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화하여 구름다리를 건널 방도를 마련해야 했다.

공략대의 S급 헌터들은 절벽 근처에 모여 중지를 모았다.

"거리는 얼추 150미터 정도로 보이는데요. 그보다 더 길 수도 있고요."

"헌터들의 운동 능력이 일반인을 아득히 초월한다고 해도 저만한 거리를 건너는데, 3초는 걸릴 겁니다."

"대략 1미터 간격으로 빽빽하게 달려간다고 치면, 충분히 건널 수 있겠는데요?"

"그러다가 한 명이 넘어지거나 다리에 100명이 넘게 올라가면요?"

"아, 이거 복잡하네."

각자 의견을 하나씩 내놓았지만, 다리를 건널 특별한 방법은 없는 듯했다.

그저 정면 돌파로 빠르게 건너는 수밖에 없었다.

300명이 줄지어 서서 동시에 달려 나간다면, 1분 내로 충분히 건널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런 결과를 낳으려면, 중간에 아무런 사고가 없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그런데 문득 루시아가 공략대원들을 둘러보며 불편한 이야기를 꺼냈다.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그대로 끝입니다. 이거 무조건 우선순위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아니, 다리 건너는 데 무슨 순서가 필요해요?"

"S급 헌터들은 순식간에 다리를 건널 수 있지만, 힐러들이 있잖습니까? 분명 병목 현상이 일어날 거예요."

그녀의 말대로 힐러는 일반적인 헌터보다 신체 능력이 극명하게 부족했다.

그렇다고 아예 전투력이 없지는 않으나, 그래도 낮은 건 사실이었다.

힐러들의 신체 능력은 평균적으로 B급이나 그 이하에 해당한다고 봐야 했다.

현재 공략대에는 50명에 달하는 교황청 힐러들이 있었다.

만약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이들이 가장 먼저 다리를 건너게 해야 했다.

힐러를 배제하고는 아예 공략을 진행할 수조차 없으니까.

"일단 실험을 한번 해 보죠."

"실험이요?"

"흔들다리는 아니지만, 평지에서 연습으로 달려 보는 겁니다."

"오! 그러는 게 좋겠네요."

천즈한은 루시아의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니까, 연습도 없이 무턱대고 도전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공략대원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 아닌가.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소중한 인재들을 잃을 수는 없었다.

헌터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일자로 쭉 늘어서는 동안, 블라드 유진은 절벽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끝도 없다. 떨어지면 아마 무조건 죽겠지.’

문득 반대편 절벽을 바라보니, 새파란 구체가 빛을 내며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물체가 다음 층으로 이동하는 게이트이리라.

그는 불현듯 녹턴을 타고 절벽을 건너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유령 군마는 같은 동반자인 레니를 제외한 그 어떤 인물도 태우기 싫어했다.

가끔은 유진의 명령까지 거부할 정도로 자존심이 특출난 녀석이었다.

‘줄로 묶어서 옮기면, 될 것 같긴 한데.’

편법을 쓴다면, 굳이 녹턴에 태우지 않고도 공략대원을 건너편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녹턴으로 공략대원들을 옮기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문제는 그 문구다. 뭔가 석연치 않아.’

시련의 첫 번째 규칙에는 ‘최초 도전자가 절벽을 떠난 순간’이라는 글귀가 있었다.

아무래도 구름다리 말고 다른 시도 자체를 의미하는 듯했다.

녹턴을 타고 절벽을 건너는 순간부터 1분의 초읽기는 시작되어 버릴 가능성이 컸다.

굳이 그런 무모한 시도를 할 필요는 없었다.

"나름 나쁘지 않은 성적이네. 저거 봤어?"

문득 그의 곁으로 다가온 전시영이 뒷머리에 깍지를 끼며 말을 붙였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자, 300명의 공략대원들이 일자로 우르르 달려가고 있었다.

발을 맞추느라 생각보다 느리긴 했지만, 1분 안에 건너는 건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쭉 나아간다면, 40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으니까.

아마 구름다리의 출렁거림으로 인하여 다소 느려지더라도 오차는 10초 내외일 듯했다.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보이는데."

"S급과 힐러들을 가장 앞에 세우고 본인은 중간쯤에서 뒤편을 확인하면서 뛸 거래."

"본인?"

"우리의 위대하신 공략대장 말이야. 아무래도 후위가 늘어질 수밖에 없으니, 직접 챙겨 보겠다더라고."

전시영의 말에 유진은 열심히 훈련을 주도하는 천즈한을 바라보았다.

적극적으로 공략대원들을 독려하고, 뒤처지는 인원을 살피는 믿음직한 리더의 모습이었다.

상당히 신중한 데다가 동료를 살뜰히 챙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저런 자가 이끌었는데도 리고르 아스페라에서는 헌터가 절반이나 죽어 나갔지. 물론 그때는 헌터들의 수준이 낮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어떨지 모르겠네."

"저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

"아니, 개인적으로는 존경해. 난 다 떠먹여 줘도 절대 저렇게 못 하거든. 뛰어난 사람을 향한 약간의 시기라고 생각하면 되겠네."

"솔직하군."

"그게 내 매력이거든? 물론 남자들은 나 같은 스타일 그닥 안 좋아하겠지만."

전시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슬쩍 그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처음과 다름없는 무표정이었다.

뭔가 기대했던 모양인지, 그녀는 입술을 삐쭉하며 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왠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한 자신의 어설픈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그런데 문득 그때 루시아가 다가와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슬슬 훈련 끝내고 출발한다네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뛰어 보고요."

"다른 말은 없고?"

"계획은 이전과 똑같아요. 우린 그냥 최대한 빠르게 건너가기만 하면 됩니다."

"100명을 추리는 건 아예 고려하지 않나 보네."

"그렇죠. 뭐, 나머지를 뒤에 놔두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아예 배제한 건 아닌 모양이에요. 중요 전력을 앞쪽에 배치했거든요."

S급을 맨 앞에 두는 이유는 간단했다.

공략대원 중에서 가장 빠른 데다가, 보호해야 할 최우선 순위에 속하는 인재였으니까.

이들 없이 A급만으로는 탑 공략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떻게 보면 힐러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S급 헌터였다.

"근데 분위기가 왜 이래요?"

루시아는 전시영 혼자만 느끼던 어색한 공기를 감지한 모양인지, 눈을 가늘게 뜨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역시 이런 상황에서 여자의 직감은 무서우리만치 예리했다.

"부, 분위기가 뭐? 아무 일도 없었거든?"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치고는 너무 당황하시는데요?"

"뭐래? 이상한 소리 할 거면, 저기 가서 연습이나 하시지!"

전시영은 괜히 소리를 빽 지르고는 본인이 먼저 공략대와 합류해 버렸다.

루시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유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첫 주자는 유진 님이에요. 아무래도 우리 중에서 가장 빠르실 것 같아서 제가 추천했습니다. 괜찮으신가요?"

"나쁘지 않은 선택이군."

그는 자신의 그림자에 숨어 있는 레니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다크 엘프 소녀도 탑의 시스템이 한 사람으로 규정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만약 레니가 1인으로 취급된다면, 문제의 소지가 다분했다.

올라간 인원이 100명을 넘기면, 그대로 구름다리가 끊어져 버릴 테니까.

차라리 블라드 유진이 압도적인 기량으로 다리를 건너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동반자들은 꼭 한 가지씩 말을 잘 듣지 않는군.’

녹턴은 동반자 정보창에 얌전히 들어가 주었지만, 그가 아닌 사람을 등에 태우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반면에 레니의 경우에는 동반자 정보창보다 유진의 그림자를 더욱 안락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안으로 들어가라고 명령을 내려도 도무지 들어먹지를 않았다.

애초부터 동반자 정보창에 등록만 되어 있지, 녹턴처럼 아이콘화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런 기행만 빼면, 두 녀석은 정말이지 완벽한 조력자였다.

"자, 출발하겠습니다! 모두 모여 주십시오!"

천즈한의 외침에 공략대원들은 쭉 늘어섰다.

연습할 때와는 달리, 구름다리 앞에 일자진을 형성한 것이다.

그런데 진형의 가장 뒤편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섞어서 서는 것도 아니고 왜 우리만 맨 뒵니까?"

"그렇습니다. 아까랑은 이야기가 다르잖아요. 연습이라서 후위에 보낸 거라 해 놓고, 진짜로 이렇게 하는 게 어디 있어요?"

"공략대장이 중국인이라고 제 식구 감싸는 거야?"

불만 가득한 목소리는 한국의 A급 헌터들로부터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S급 헌터, 힐러 다음에는 국가별로 줄을 선 상태였다.

하필이면 중국 헌터들의 수효가 가장 많아서 앞에 세운 게 화근이 되었다.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한 모양인지, 천즈한은 당황한 표정으로 달려가서 일단 정중하게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제 편의대로 짜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순서는 곧장 다시 수정하겠습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그러자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들이 되레 당황하고 말았다.

이렇게 확실한 사과와 빠른 조치가 연계되니, 볼멘소리는 쏙 들어가 버렸다.

천즈한이 중국어로 지시를 내리자, 중국 헌터들이 사이사이에 알아서 끼어들었다.

그래도 수효가 가장 많다 보니, 최후방은 중국 헌터들이 맡게 되었다.

"역시 인망 두터운 헌터계의 리더답네."

"저런 사람 흔치 않아."

한국 헌터들은 천즈한을 향해서 찬사를 보냈고, 구름다리 통과 작전은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었다.

"연습한 대로만 하면 됩니다. 한 사람의 낙오도 없이 모두 건너갑시다!"

"예!"

천즈한이 크게 외치며 독려하자, 공략대는 순식간에 한마음이 되었다.

이대로라면, 첫 번째 시련은 무리 없이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준비! 출발하십시오!"

출발 명령이 떨어지자, 블라드 유진은 바로 뒤에 붙은 루시아와 전시영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고는 구름다리를 향해서 천천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간격을 맞춘 채 달리다가 진입하면, 병목 현상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서히 가속하던 그는 구름다리 진입 직전부터 최고 속도로 치고 나갔다.

스핑―!

상상했던 것보다 유진의 속도는 훨씬 빨랐지만, 의외로 공략대원들은 무리 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물론 S급 헌터들과 힐러 간의 거리 격차가 상당하긴 했으나, 그래도 이 정도면 무리 없이 성공할 것 같았다.

[51, 50, 49…….]

홀로그램의 초읽기도 아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잘 달리던 행렬의 중간쯤에서 난데없는 비명이 들려왔다.

팍! 털썩!

"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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