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고개를 돌려 보니, 천즈한이 웃는 낯으로 서 있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그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과묵하신 분이로군요. 뭐 괜찮습니다. 잠깐 이야기나 하자는 거니까요."
천즈한은 괜히 주변을 휘휘 둘러보는 척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이곳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궁 내부라고 하기에는 영……."
아이스 브레이크라도 하고 싶은 모양인지, 누구나 다 알 법한 질문이었다.
아직 탐사를 나간 왕주안이 돌아오지 않은 데다가, 공략대는 분지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한 상태.
하늘 말고 보이는 거라고는 구덩이 내부에 드문드문 난 이름 모를 식물뿐이었다.
의견을 낼 것도 없었기에, 그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모르겠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느낌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
"제 생각엔 여기가 지구는 아닌 듯합니다. 미궁이 우리와 인접한 차원이라면, 이곳은 한참 떨어진 느낌이랄까요?"
유진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천즈한은 혼자서 의견을 마구 늘어놓았다.
처음에 그는 그자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는데, 어느새 얼굴을 바라보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의외로 천즈한의 의견에 일리가 있었고, 꽤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미궁보다 더 먼 차원이라……. 의외로 여기가 마계일 수도 있겠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푸른 하늘의 구름과 이곳저곳에 자란 풀꽃들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그런데 문득 구덩이 위쪽으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경사를 타고 빠르게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그자의 정체는 천즈한의 명령에 따라 정찰을 나갔던 왕주안이었다.
"최대한 멀리 떨어지지 않으면서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한데……."
"뭘 발견하긴 했나 보군."
"일단 첫 번째로 이곳은 끝도 없는 대수림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숲이라……. 풀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끝도 없다는 건 무슨 말인가?"
"예, 지평선 저 먼 곳까지 나무가 보였습니다."
"그랬군. 그럼 두 번째는 뭔가?"
"……사람 같은 게 있었습니다."
왕주안의 대답에 천즈한은 잠시 말을 잊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면 사람이지, 사람 같은 건 또 뭐지?"
"뭔가 비슷하긴 하지만, 묘하게 우리와는 생김새가 달랐습니다."
"몬스터 중에도 사람 흉내를 내는 건 있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만, 확실히 이족 보행을 하는 거로 보였습니다."
"일단은 확인이 좀 필요하겠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공략대에서 몇 명을 더 데려가야 할 것 같네. 웬만하면 S급이면 좋겠군. 그래야 신빙성이 더 높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사람을 모아 오죠."
왕주안이 자리를 뜨자, 천즈한은 미간을 좁힌 채 깊은 사색에 잠겼다.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더니,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함께 가서 확인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굳이 내가 가야 할 이유라도 있나?"
"아무래도 최근에 주가를 많이 올리는 분이시니, 가장 공신력이 있을 테지요. 게다가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잖습니까?"
천즈한은 어깨를 으쓱하며 당연하지 않냐는 듯이 되물었다.
그는 그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블라드 유진 또한 왕주안이 발견했다는 ‘사람 같은 것’의 정체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 * *
"이쯤에서 발견했습니다."
천즈한은 왕주안이 찾은 발자국을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족 보행을 하는 존재였고, 결단코 맨발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렇게 인위적으로 우둘투둘한 무늬가 나오지는 않을 테니까.
"확실히 신발 자국 같은 흔적이 있군."
그렇게 말하며 돌아보자, 루시아와 전시영도 조심스럽게 족적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우리가 남긴 건 아닌 모양이군요."
"맞아. 구덩이를 벗어난 건 우리뿐인데, 이런 밑창 무늬의 신발은 아무도 신고 있지 않으니까."
두 사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앞으로 나갔던 왕주안이 수신호를 보냈다.
조용히 하고 자세를 낮추라는 의미였다.
일행은 입을 꾹 다문 채, 다음 수신호를 기다렸다.
"방금 저 앞을 지나갔습니다. 아마 금방 그놈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얼른 가 보세."
"따라오십시오."
교황청의 힐러 둘을 비롯한 총 일곱 명의 일행은 이윽고 왕주안이 발견한 사람 같은 것과 직면할 수 있었다.
원래는 숨어서 은밀하게 살펴볼 계획이었으나, 놈들의 무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예정과는 달리 훨씬 격렬한 첫 만남이 전개된 것이다.
일행의 접근을 놀랍도록 빠르게 알아차린 그들은 다짜고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크롸아아!"
괴성을 지른 뒤로 뭐라고 말을 하는 듯했으나, 당연히 놈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왕주안이 발견한 자들은 사람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이족 보행을 하고 몸통에 머리와 팔다리가 붙어 있다는 것 말고는 인간과 같은 점이 없어, 몬스터거나 전혀 다른 종족 같았다.
일단 덩치는 사람보다 족히 두세 배는 커 보였으며, 팔이 비정상적으로 굵었다.
날카롭게 돋아난 이빨은 결단코 영장류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이놈들은 눈에서 시커먼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탑 내부에서 감지되지 않던 마기가 드디어 나타났군.’
블라드 유진이 느끼기에는 상당히 익숙한 마기였다.
미궁에서 흘러나오는 것과 똑같은 형질의 기운이었으니까.
이곳이 마계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저 괴물들이 미궁과 관련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놈들은 몬스터와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탐색하는 건가.’
헌터와 마주친 몬스터는 매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백이면 백 냅다 달려들게 되어 있었다.
암살에 특화된 개체가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릴 때나 먼저 달려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놈들은 자기들끼리 의사소통을 하며 일행을 포위한 채,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마치 처음 보는 존재와 마주친 육식 동물의 행동 같았다.
아무리 강한 포식자라도 상대가 먹잇감인지, 만만치 않은 놈인지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한 법이니까.
"어떡하죠?"
왕주안도 놈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는지, 공격할 생각은 하지 않고 천즈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 호의적인 녀석들은 아닌 것 같군. 괜히 선수를 내줄 필요는 없지."
천즈한은 일행을 돌아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시작합시다."
"그 말을 기다렸다고. 초열지옥 연쇄역풍(連鎖逆風)."
삐이이―! 삐이이―!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전시영은 앞으로 불쑥 나가더니, 오른손을 쫙 펼치며 내질렀다.
그러자 그녀의 손끝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던 다섯 개의 노란 구체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기를 잠시, 일행을 포위하던 괴물들 사이에서 다섯 번의 대폭발이 일어났다.
쿠콰콰콰쾅!
"갑니다!"
전시영이 일으킨 폭발은 전투의 시발점이 되었다.
일행 중에는 탱커만 전문으로 맡는 헌터가 없었으나, 진형을 짜는 데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루시아도 나름 탱커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인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가장 먼저 앞으로 달려 나가며 창끝에 달린 깃발을 크게 휘둘렀다.
부우우우웅! 치지지지직!
그러자 거대한 뇌전의 막이 루시아의 앞에 불쑥 나타나며 괴물들의 접근을 지연시켰다.
"우리도 시작하지."
"예."
천즈한과 왕주안도 좌우로 갈라지며 공격을 퍼부어 댔다.
블라드 유진은 두 명의 힐러 근처에 서서 전투를 지켜보았다.
그러던 중, 무리에서 갈라져 나온 괴물 몇 마리가 힐러들을 향해서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힐러들이 불편한 표정으로 물러서는 데도 그는 네 마리의 괴물을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놈들을 바로 처치하기보다는 어떤 짓을 하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유진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괴물들은 서로를 향해서 빠르게 눈짓했다.
스슥! 타다다닷!
그러고는 그가 서 있는 곳을 피해 쫙 갈라지며, 뒤편의 힐러들을 향해서 냅다 달려드는 게 아닌가.
"쯧!"
블라드 유진은 짧게 혀를 차더니, 슬쩍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런데 빠른 속도로 쇄도하던 놈들의 신형이 순식간에 분쇄되어 버렸다.
스피이잉―! 처저적!
맹렬하게 달려가던 도중에 도륙되어서 그런지, 힐러들의 온몸에 암청색 혈액과 살점이 튀었다.
"으우욱!"
"웨엑!"
힐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토사물을 쏟아 냈다.
괴물들의 피가 저도 모르게 벌린 입으로 왕창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은 고개를 살짝 모로 꺾은 채, 수십 조각으로 갈라진 괴물을 살펴보았다.
스이잉!
물론 순간적으로 꺼냈던 소수혈인은 취소한 상태였다.
어차피 이제 이쪽으로 달려들 놈들은 없었으니까.
한데, 문득 그런 그의 눈앞에 홀로그램 글귀가 불쑥 떠올랐다.
[북풍의 영지 최하급 마족과 만남으로써 미션이 발생했습니다.]
[최상층에 올라 탑을 정복하고, 건물을 원래 차원으로 돌려보내십시오.]
‘미션이라……. 목표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 * *
"다들 홀로그램은 확인해 보셨습니까?"
"근데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최하급 마족? 그런 몬스터도 있었나?"
"그러게요. 영 처음 보는 놈들이었습니다. 그저 육체적인 능력만으로 공격하는데, 거의 B급 헌터 수준이었어요."
최하급 마족이라는 놈들도 신기했지만, 다수의 의견은 다음 층으로 어떻게 가는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명칭이 탑이라고는 하나, 위에는 천장 대신 푸른 하늘만 보일 뿐이었으니까.
"정보가 너무 부족합니다. 일단 최하급 마족이 온 방향으로 이동하는 게 어떻습니까? 혹시라도 놈들의 본거지를 발견하면, 다음 층으로 가는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천즈한의 의견에 다수의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이곳에서 단서라고는 그것뿐이었기에,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닌 것 같았다.
문제는 300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헛걸음이라도 했다간 보급에 문제가 생길 터였다.
각자 공간 확장 주머니에 필요한 물품을 꽉꽉 채워 왔다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공략이니 보급은 아낄수록 좋은 거니까.
"왕주안, 최하급 마족의 흔적을 역추적하게."
"예."
공략대는 천즈한의 명령대로 최하급 마족의 본거지를 찾아서 움직였다.
그런데 흔적을 따라서 가면 갈수록 푸르른 녹음은 점점 사라지고, 황폐화한 대지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발자국을 따라서 한참을 이동하자, 이번에는 엄청난 넓이의 깎아지른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는 놀랍게도 사람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법한 흔들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그 어이없는 광경에 당황하기 무섭게 문득 홀로그램 글귀가 공략대 전원의 눈앞에 나타났다.
[죽음의 구름다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다리를 건너면 다음 층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만날 수 있습니다.]
[죽음에 저항하고, 당신의 귀중한 목숨을 쟁취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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