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램블러 호텔에서 하루를 머문 공략대는 다음날 곧장 청의남교(青衣南橋)를 건넜다.
서쪽 시가지를 통해서 주룽완에 있는 탑으로 접근할 요량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주룽청(九龍城)입니다. 그 바로 뒤쪽이 주룽완, 우리의 목적지죠."
천즈한은 상당히 유려한 발음의 영어를 구사하며 공략대를 이끌었다.
홍콩 탑 공략대는 S급 8명에 A급 헌터 200명, 힐러 1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드라코 도무스 때보다 13배 이상은 많은 전력이라, 불안한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크웨에엑!"
푸확―! 콰직!
홍콩의 오염 지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이 도시를 점거하고 숨어 있는 사람들을 마구 학살했다.
워낙 전격적으로 탑이 생성되고 오염 지역이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다 보니, 대피할 시간적 여유 따위는 없었다.
"우리의 목적은 한시라도 빨리 탑을 공략하는 겁니다. 하지만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보고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천즈한은 몬스터에게 쫓기는 사람들을 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중국 출신의 헌터들이 우르르 몰려가 구조 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대하는 목소리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장 저들을 구해도 보호해 줄 병력이 없잖습니까?"
왕주안이라는 S급 헌터가 결정에 반박하고 나섰다.
하지만 천즈한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공략대의 뒤편을 가리켰다.
"우리가 탑을 공략하는 동안, 조국의 헌터들은 계속 구조 작업을 벌일 겁니다. 우리가 구한 사람들은 저들에게 맡기면 됩니다."
"으와아!"
"가즈아!"
마치 주선율 영화(主旋律 電影)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이었지만, 중국 헌터들은 크게 감명한 듯했다.
그들은 기세 좋게 앞으로 달려 나가더니, 도시 곳곳에 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을 마구 때려잡았다.
개중에는 중간 보스급 이상의 녀석들도 있었으나, 천즈한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격 명령을 내렸다.
"손발이 좀 오그라들기는 해도 사기를 끌어 올리는 덴 최고네요."
"저런 관종짓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난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못 해."
루시아와 전시영은 천즈한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마치 히어로 영화 속의 주인공이나 할 법한 대사를 당당하게, 그것도 영어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중국 헌터뿐만 아니라, 교황청에서 파견한 힐러와 다른 S급 헌터들도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미국의 흑인 헌터 조나단 잭슨은 천즈한을 바라보며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저런 유치한 선동으로 헌터들을 통제하고 대장 놀음을 하려는 모습이 같잖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원 목표인 탑에 들어가기도 전에 힐러 자원을 소모하다니,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효율을 중시하는 미국에서 저런 짓을 했다간 뒤통수에 12 게이지 탄환이 우수수 박힐 테니까.
‘재미있는 놈이로군.’
블라드 유진도 그런 천즈한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린 나이도 아닌데 저런 영웅심이 박혀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사람들을 구하면서 전진하다 보니, 공략대는 예정보다 12시간 늦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실상 이러는 동안 오염 지대는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천즈한은 중국의 후발대가 퍼져 나가는 안개 속의 몬스터를 막아 내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여러분!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지금부터 진입 방법을 찾을 때까지 진형을 유지하세요. 그리고 후방의 몬스터를 조심하십시오!"
천즈한이 외치기 전에 이미 공략대는 탑을 등지고 서서 방어 진형을 구축했다.
목적지에 근접할수록 온갖 종류의 몬스터가 기어 나와서 이동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콰직―! 퍼버벅!
"몬스터 종류가 너무 많습니다. 보통은 비슷한 놈들끼리 함께 나와야 정상인데요."
안지홍은 레프와 함께 최전선의 방어를 굳건히 다지며 소리쳤다.
일반적으로 성체 미궁의 영역 내에서는 같은 종류의 몬스터만 나오기 마련이었다.
미궁에서 생성되는 몬스터가 보스와 똑같은 종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절대 법칙이 아니라, 예외의 사례도 존재했다.
‘성체 미궁이 분화할 때와 군체를 이룰 때인가.’
블라드 유진은 그 두 경우를 모두 직접 겪어 보았다.
특히 미궁 군체 주변에는 다양한 종류의 보스 몬스터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보통, 놈들 중 세가 약한 쪽이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곤 했다.
서로 간의 서열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서 아예 충돌 자체를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홍콩 탑은 이 두 사례와 전혀 다른 경우였다.
"또 몰려옵니다! 티란누스의 방패!"
스핑―! 촤좌작! 터더더더덩!
안지홍이 녹색 방패를 펼치자,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이 마구 몰려와서 몸통 박치기를 시도했다.
탱커 진형이 제대로 방벽을 쳐 놓은 사이, 나머지 헌터들은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주로 원거리 공격 위주였으나, 루시아 같은 경우는 탱커들의 빈자리를 채우며 맹활약을 펼쳤다.
물론 블라드 유진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폭사.’
스―핑! 쩌저저적!
A급으로 성장한 폭사 스킬은 이제 네 개의 시커먼 투사체를 쏘아 보내고 있었다.
사출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졌으며, 위력도 대폭 증가했다.
폭사 스킬에 당한 몬스터의 두꺼운 갑각이 일격에 박살 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몬스터뿐이로군.’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균열을 정화한 자였다.
그만큼 마주친 몬스터의 종류가 다양할 수밖에 없었는데, 대부분은 한 번 이상 어디선가 등장했던 놈들이었다.
하지만 탑에서 기어 나온 몬스터들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독특한 종이었다.
뭐라고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따로 분류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입구 쪽은 뭘 하는 거지?’
탑을 살펴보러 갔던 천즈한은 아직 감감무소식이었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미궁과는 입장 방식이 좀 다른 모양이었다.
"이, 이런 측면이 뚫린다!"
그러는 사이, 몬스터 무리의 파상공세에 A급 헌터들의 진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제가 커버 들어가겠습니다!"
"왼쪽은 내가 맡을게!"
루시아와 전시영은 좌우로 갈라지며 각자의 방식으로 진형에 생긴 구멍을 메워 버렸다.
스카앙―! 촤좌좌좍! 콰아아앙!
깃발 창을 휘두르며 달려간 루시아는 몬스터를 우악스럽게 도륙했고, 전시영은 대폭발을 일으켜 일거에 모든 걸 쓸어버렸다.
당연히 섬세한 조절을 통해서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예 아무런 영향이 없는 건 아니었다.
폭발에 근접해 있었던 A급 헌터 몇은 꽤 심한 화상을 입고 말았다.
물론 그 정도는 힐러들의 지원으로 금방 회복될 테지만, 육신이 불타는 건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이러다 상황이 더 심각해지겠군. 그렇다고 여기서 전력을 다할 수는 없을 텐데.’
처음 보는 몬스터들이 그야말로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공략대의 수준은 엄청나게 높았다.
탑 내부에서 사용할 여력은 남겨 두기 위해서 수비적인 행태만 보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버티기만 할 수는 없었다.
"애초부터 깡그리 쓸어버리고 입장 방법을 함께 찾는 게 낫지!"
전시영의 말대로 속전속결이 안 된다면, 정공법으로 해결하는 게 훨씬 피해가 덜할 터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찾았다! 모두 이쪽으로!"
뒤편에서 천즈한의 목소리가 전장을 관통하듯 울려 퍼졌다.
공략대는 그제야 벽면을 끼고 후퇴하며 탑의 입구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독특한 빛을 내뿜는 붉은 구멍이 있었다.
"입구가 여기인 줄은 어떻게 아는 겁니까?"
"방금 왕주안이 들어갔습니다. 사라지는 모습이 미궁에 들어갈 때와 흡사했어요."
"좋습니다. 그럼 A급부터 시작해서 힐러, S급, 탱커 순으로 진입하죠."
"네."
천즈한과 루시아는 순식간에 의견 전달을 마치고 각자의 위치로 달려갔다.
그녀의 말대로 오래 버티는 게 가능한 탱커가 마지막에 남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슈욱! 슉!
공략대원들이 하나둘 진입하기 시작하고, 이제 S급 헌터들의 차례였다.
천즈한은 내부 지휘를 위해서 먼저 들어간 상태였다.
"자, 지금부터 단번에 밀어내고 빠질 겁니다. 하나, 둘, 셋!"
"츠하앗!"
콰과과과광!
안지홍의 구호가 끝나자, S급 헌터들은 일제히 스킬을 쏴서 들러붙은 몬스터들을 깡그리 녹여 버렸다.
그러고는 잽싸게 몸을 돌리며 동시에 달려 나갔다.
당연히 그들의 목표는 탑의 최하단 구석에 생성된 붉은 구멍이었다.
슈슈슈슈슝!
* * *
"드, 들어왔다!"
붉은 구멍을 통과한 공략대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골랐다.
기상천외한 형태의 몬스터가 우글거리던 바깥과는 달리, 안쪽은 평화로운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인원 점검을 하겠습니다. 왕주안 자네는 주변을 좀 둘러보게."
"네."
천즈한은 곧장 낙오자가 없는지 확인하며 왕주안을 선발대로 보냈다.
왕주안은 한국에서 만났던 전진우처럼 암살자 계열 딜러였기에, 이런 임무에는 가장 적합한 인재였다.
탑의 입구는 매우 좁았지만, 다행히 낙오한 사람 없이 전원 안으로 잘 들어온 모양이었다.
망설이지 않고 차례대로 붉은 구멍을 향해 몸을 날린 덕분인 듯했다.
"근데 여기 미궁하고는 좀 다르지 않나?"
인원 점검을 하는 사이, 전시영은 그새를 못 참고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목소리에 블라드 유진도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미궁과는 영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늘이……. 맑다.’
미궁은 시커먼 마기로 인하여 먼 곳을 제대로 식별할 수가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자랑했다.
마기에 잠식되어 가는 지구에서 본 것보다 몇 배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1천 년 전에 보았던 청명한 하늘을 떠올렸다.
그때는 지구가 마기에 물들지 않아서 그런 거라지만, 여긴 마기가 연기처럼 뿜어져 나오는 탑의 내부 아닌가.
바스락!
문득 뭔가가 밟히자, 유진은 천천히 옆으로 발을 치워 보았다.
그곳에는 이름 모를 작은 꽃이 짓눌린 채, 녹색 수액을 찔끔 토해 내고 있었다.
본적 없는 형태였지만, 영락없는 식물이었다.
‘지구와 별로 다르지 않은 생태 환경이라……. 이동 과정은 미궁과 비슷하지만, 결과는 극명하군.’
일반적으로 미궁은 시커먼 육각 기둥을 통해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개념이었다.
탑도 어디론가 이동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도착한 장소가 문제였다.
이곳에 마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으니까.
공략대원들은 꽤 깊은 분지의 중간쯤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곳까지 길을 뚫느라 에너지를 상당량 소모했으니, 아무리 최상위 실력의 헌터라도 힘들지 않을 수는 없었다.
유진은 휴식이 필요 없었으나, 굳이 공략대와 멀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누군가가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