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홍콩이라……."
아크웰의 이야기를 들은 블라드 유진은 슬쩍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수코의 인장을 얻은 이상, 교황에게 뭘 더 요구하거나 할 마음은 없었다.
이제 교황청에 그가 원하는 물건이 더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굳이 그런 보상을 받지 않더라도 홍콩에 가면 상당한 이득을 볼 수 있을 터였다.
레니도 예정에 없던 마드리드의 미궁 군체를 처리하면서 얻게 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별다른 보상이 없을 수 있다는 아크웰의 말에도 유진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언제 출발하는 거지?"
"적어도 내일 중으로는 비행기를 타야 합니다."
"녹턴을 타고 가면, 굳이 그런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 없는데 말이야."
"그 유령 군마는 되도록 안 꺼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번에는 드라코 도무스 때처럼 교황청 소속으로 출전하는 거라서요."
"그러지."
그저 신분 때문이라면, 홍콩 인근까지 날아가서 공략대와 합류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루시아와 전시영도 함께 이동해야 해서, 비행기를 타고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연일 스페인 진공 작전에 가담하느라, 두 S급 헌터는 매우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 요청으로 시작된 홍콩 탑 공략에 빠질 수는 없었다.
표면적으로 교황청의 큰 도움을 받은 한국과 스페인이 빠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게다가 무려 블라드 유진이 참여하는 공략 아니었던가.
아마 루시아와 전시영이라면, 협회에서 내려온 명령이 아니더라도 발 벗고 나섰을 터였다.
기이이잉!
"전세기까지 보낼 정도면, 상황이 꽤 급한 모양이네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확산 속도가 정말이지, 파편 방식의 열 배는 넘는 수준이었으니까."
루시아의 말에 전시영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 정부는 공략대원들이 이용할 전세기를 세계 곳곳으로 보냈다.
자국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돈을 왕창 뿌린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홍콩은 경제적으로 중국에 매우 중요한 장소였으니까.
물론 정치적인 속사정은 차치하고서 말이다.
프랑스 리옹에서 출발한 전세기는 곧장 홍콩 국제공항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문득 착륙할 때가 되었는데도, 고도를 낮추기는커녕 공항을 지나서 쭉 비행하는 게 아닌가.
이윽고 기장의 담담한 목소리가 기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발생한 난기류로 인하여 착륙을 취소하고 선회하는 중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띠를 풀지 말고,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전한 비행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상 기장이었습니다.]
전세기가 공항을 지나치는 바람에 일행은 홍콩 주룽완(九龍灣)에 나타난 탑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탑의 크기는 그야말로 엄청난 수준이었다.
대규모 미궁의 입구인 육각 기둥은 상대도 안 될 만큼 거대했다.
착륙을 위해서 고도를 낮추는 전세기가 잘못하면 부딪칠 수도 있을 테니까.
"저게 홍콩의 탑……."
"사진으로 봤을 때는 저렇게 큰 줄 몰랐는데요."
"저기 주변을 봐."
전시영이 가리킨 것은 검은 안개가 넘실거리는 곳이었다.
탑에서 뻗어 나온 시커먼 기운은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빠른 속도로 선전시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었다.
홍콩 국제공항이 있는 츠례자오(赤鱲角) 섬은 아직 괜찮았지만, 다른 곳은 온통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당연하게도 검은 기운이 뻗친 곳은 전부 오염 지역이 된 상태였다.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네. 이러니 그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S급 헌터를 공략대에 초청하고 싶었겠지."
"그래 봤자 S급 참여 인원은 총 여덟 명밖에 되지 않아요."
루시아의 말대로 공략대에 S급은 여덟 명뿐이었다.
그것도 블라드 유진을 포함한 수효였다.
러시아의 리고르 아스페라에서 20명의 S급 헌터가 투입된 걸 생각하면, 적어도 너무 적은 인원이었다.
하지만 전시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뭐가 문제냐는 듯이 대답했다.
"한국에서 대규모 미궁을 공략할 때는 세 명이었어."
"아, 생각해 보니 그건 또 그러네요."
전시영의 말에 루시아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그를 슬쩍 돌아보았다.
리고르 아스페라와 드라코 도무스를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점은 유진의 참여 여부였다.
그 당시와 현재의 S급 수준이 다르다고 하지만, 그래도 20명과 3명의 격차는 너무 컸다.
놀랍게도 블라드 유진은 S급 헌터 18명의 빈자리를 채운 것도 모자라 전사자마저 극단적으로 줄여 버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루시아의 눈에는 그가 더욱 대단한 사람처럼 보였다.
"슬슬 착륙하는군."
루시아가 다소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유진은 담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 * *
전세기에서 내리자마자 보인 건 깔끔하게 비워진 공항이었다.
하긴 인근에서 오염 지대가 엄청난 속도로 번지고 있으니, 이곳으로 운항하는 항공기는 없을 터였다.
그러니 공항을 돌아다니는 인물은 미궁 공략대와 이들을 서포트하기 위한 중국 헌터 협회 사람뿐이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탈리아어 통역을 맡은 저우타오(周涛)입니다."
일행에게 인사를 건넨 사람은 평범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었다.
아무래도 블라드 유진이 최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헌터로 알려진 탓에, 보자마자 알아보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이후로도 스페인어와 한국어 통역사가 루시아와 전시영에게 각각 따라붙었다.
전시영은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았지만, 정확한 정보 전달을 위해서 모국어 전담 통역사를 배정한 것이다.
일행은 통역사와 함께 차를 타고 칭이(青衣) 섬으로 향했다.
섬 동쪽에 있는 램블러 호텔 건물이 바로 미궁 공략대의 비대위가 있는 장소였다.
본토와 가까우면서도 오염 지대가 되지 않은 섬이라, 이곳을 거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공략대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바닥까지 내려온 홀에 잠시 모였다.
많은 인원을 수용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서, 작전 회의 장소를 여기로 정한 듯했다.
다소 열악한 환경이었으나,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머무는 건 잠시고, 홍콩의 심각한 상황을 전세기에서 다 보고 왔기 때문이었다.
"여, 오랜만이로군."
한데, 문득 일행을 향해서 밝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남자가 있었다.
한국 리브라 길드의 마스터, 안지홍이었다.
"아저씨, 일찍 왔네?"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지만, 안지홍은 전시영을 지나쳐 곧장 블라드 유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물론."
"스페인에서도 맹활약하셨다지요? 저도 함께 갔다면, 이 녀석처럼 자그마한 명성이라도 얻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명성이 더 필요하진 않을 텐데."
"그건 그렇죠. 하하!"
마음에도 없는 인사치레라는 걸 알았지만, 그는 인사를 나름 부드럽게 받아 주었다.
그러자 전시영이 옆으로 다가와 안지홍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댔다.
"저기요? 아저씨, 왜 사람을 쌩까고 그래?"
"크흠!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한국의 은인부터 챙겨야 할 거 아냐."
"허! 난 2순위다, 이거지?"
"아니, 넌 3순위야. 반갑습니다. 루시아 씨. 제가 스페인어를 잘 못해서 프랑스어로 인사하는 걸 용서해 주십시오."
안지홍은 이번에도 전시영을 지나치더니, 상당히 느끼하게 불어를 구사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럼에도 루시아는 흔쾌히 안지홍의 손을 잡아 주었다.
슬쩍 전시영을 힐끔거리는 걸 보니,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반가워요."
"와! 이 사람들이 단체로 날 무시하네!"
"자, 오랜만이야. 미치광이 방화광."
안지홍은 마지막으로 전시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암암리에 불리던 그녀의 별명을 거론한 건, 지옥문을 여는 것과 같은 짓이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전시영이 살짝 부아가 치밀어 올랐을 때는 말이다.
화르르륵!
그녀의 손에서 불쑥 시퍼런 화염이 솟아오르자, 안지홍은 대경하며 얼른 블라드 유진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어허! 여기 사람 많아. 진짜 방화광이 될 수도 있어."
"까짓거 아저씨 죽이고 국가 이미지에 먹칠 좀 하면 되지 뭐."
"어어? 은인이 계신 자린데, 진짜 이럴 거야?"
안지홍이 그를 들먹이자, 전시영의 표정은 살짝 풀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유진과 마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왠지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것 같아서 전시영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새빨개졌다.
"시작하는군."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턱짓으로 정면을 가리키며 나직이 말했다.
그러자 일행의 시선이 앞쪽의 단상에 올라간 사람에게로 휙 돌아갔다.
"아저씨, 나중에 두고 봐."
어쩔 수 없이 전시영은 화를 삭이며 브리핑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실상 브리핑은 집중해서 들을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그저 언제 탑을 공략할 것인지와 이후의 보상안에 관해서 열거할 뿐이었다.
물론 꽤 중요한 정보도 있긴 했다.
바로 공략에 참여할 S급 헌터들의 신상에 관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무조건 참전이네."
"리고르 아스페라 때 큰 도움을 받았으니, 안 올 수가 없었겠지."
러시아의 S급 헌터는 레프 미하일로비치 알렉세이.
저돌적인 스타일의 탱커로, 리고르 아스페라에서 안지홍 함께 최전선을 지킨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도 저 사람이 있으니 든든하군요."
안지홍은 레프의 뛰어난 실력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성장했을 테니, 옆자리를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미국에서 온 S급 헌터는 원거리 딜러 스타일로, 조나단 잭슨이라는 흑인 남자였다.
SNS상에서 일명 JJ라고 통하는데, 헌터치고는 상당히 친근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러시아, 미국에 이어 블라드 유진 일행까지 외국인 S급 헌터는 여섯 명.
여기에 중국인 헌터 두 명이 더해져 S급은 총 여덟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공략대는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홍콩에 나타난 탑이 이전과 궤를 달리하고 있었지만, 3대 미궁에는 속하지 않았으니까.
마드리드의 미궁 군체와 비슷할 거라는 전문가들의 분석까지 나온 상태였다.
"오늘 브리핑은 여기까지 하고, 하루 휴식을 취한 뒤 공략에 들어가겠습니다."
브리핑이 끝날 때쯤 중국의 S급 헌터 두 명이 단상으로 올라오더니, 영어로 말을 이었다.
앞서 설명한 대로 공략대의 지휘는 저 중국인 헌터 둘 중 하나가 맡을 예정이었다.
"이번에도 천즈한(陈梓涵)이 공략대장을 맡나 보군요. 저 사람이면 믿을 만하죠."
그 지옥 같던 리고르 아스페라에서도 천즈한은 최선을 다해서 공략대를 이끌었다.
피해가 컸지만, 만약 천즈한이 없었다면, 몰살했을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일 정도였으니까.
공격력도 출중하지만, 빼어난 지휘 능력도 천즈한의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었다.
다만 문제가 좀 있다면, 나머지 하나의 중국 S급 헌터가 이제 갓 A급에서 올라온 자라는 거였다.
"왕주안(王转)이라는 자가 좀 불안하긴 해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전력입니다."
동료가 될 헌터들의 면면을 살펴본 일행은 나름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홍콩 시가지에 자리한 거대한 탑을 한동안 주시했다.
검은 탑의 꼭대기에는 둥그런 주황색 구조물이 있었는데, 생긴 것이 마치 삐져나온 눈알처럼 보였다.
유진은 활기찬 공략대의 분위기보다는 탑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마기에 더 관심이 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왠지 흥미진진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 순조로우면, 거친 반전이 있기 마련인데. 오히려 기대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