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바티칸 시국 교황청 최심부의 기도실.
이곳은 오로지 교황만이 사용하는 장소로 아비규환인 전선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교황은 차분하고 정적인 이미지였지만, 이 기도실은 화려한 장식품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반대로 안드레아 교황은 금박 장식을 좋아했다.
성기사단은 항상 이런 사치스러운 취향을 문제 삼았으나, 별다른 효과를 볼 수는 없었다.
교황청의 최심부를 꾸미는 건 교황의 고유 권한이라, 외부에서 왈가왈부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뭐라고 해 봤자, 괜한 트집을 잡는다며 역풍만 맞을 뿐이었다.
스윽! 쪼르륵!
"멍청한 것들. 능력이나 갖추고 지껄였어야지. 그래야 그나마 먹힐 게 아닌가."
교황은 순금으로 만들어진 잔을 들더니, 적포도주를 가득 따랐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미사에서도 포도주를 사용하지 않는 중인데, 안드레아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주향을 음미하며 내뱉은 욕지거리는 자신을 음해하려던 성기사단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토리노의 수의를 빼돌렸음을 직감하고, 교황은 곧장 블라드 유진을 급파했다.
상징적인 일족의 인장 따위를 달랑 던져 주고 성물을 되찾을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이득이었다.
뱀파이어 로드는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써먹을 수는 없다. 그놈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에 깔끔히 정리해야 해."
최근 안드레아 교황이 얻은 평판은 유진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자가 미궁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자신의 위신도 바닥에 처박히고 말 터였다.
당연히 더 이상 교황직을 유지하지 못하고, 탄핵당할 확률이 높았다.
적절한 순간까지만 써먹고 잘라 내는 절차가 꼭 필요했다.
"마무리는 순진한 외교관 녀석에게 맡겨야겠군. 그런 놈을 제어하는 것 정도야 간단하지. 허울뿐인 직책과 포장만 좀 던져 주면 좋다고 충성을 바칠 테니까."
교황은 머릿속으로 블라드 유진과 아크웰에 관한 큰 그림을 그려 보며 황금 술잔을 기울였다.
"앞으로 하나만 더 모으면 되는군. 아크웰이 일을 제대로 처리해야 할 텐데 말이야."
안드레아는 품속에 고이 넣어 두었던 작은 책자를 꺼냈다.
그것은 블라드 유진이 가진 계시록과 유사한 생김새였다.
교황이 책자를 슬쩍 넘기며 홀로그램에 비추자, 아이템 정보가 불쑥 떠올랐다.
<아이템 정보>
명칭 : ??? 계시록
등급 : EX
내구도 : 파괴 불가, 분량 소실
효과 : 알 수 없는 언어 기록
천상계와 마계, 미궁의 근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음. 책자의 절반이 사라져 전반부 내용을 알 수 없음.
책자의 아이템 정보는 유진이 보유한 계시록과 완벽하게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표지가 있는 전반부가 아니라 후반부 절반만 남았다는 거였다.
계시록은 토리노의 수의와 마찬가지로 교황청에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었다.
교황에게만 비밀리에 전승되는 거라, 대외적으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랬기에 안드레아는 다니엘이 자리를 비웠을 때만 책자를 꺼내야 했다.
"세상을 구하고 교황청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대업이 눈앞에 있음에도 같잖은 파벌 싸움이라니. 그래서 네놈이 내게 안 된다는 거다. 안토니오."
안드레아 교황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일생의 적수, 안토니오 기사단장을 떠올렸다.
안토니오는 교황과 휘하 성자들의 세를 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비위를 찾아내기 위해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이제껏 안드레아는 조금의 빈틈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교황이 ‘위선도 극한에 다다르면 절대 선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을 괜히 버릇처럼 하는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자신의 사악함을 숨겼기에, 노인이 된 지금까지도 안토니오는 안드레아를 끌어내리지 못했다.
"대의를 위해서 희생할 줄도 모르는 놈. 그런 녀석의 뒤를 따르는 자들도 똑같이 아둔하지. 입에 발린 소리나 하는 단장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성기사들이라니. 구제 불능이로군."
현재까지 벌어진 미궁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바로 천상계와 통하는 차원문을 여는 것.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광진의 성배 엘―칼릭스.
안드레아는 얼른 블라드 유진이 3대 미궁을 모두 정화하고 성배를 찾아오길 고대하고 있었다.
물론 성배를 얻게 된다면, 뱀파이어의 존재를 알고 있는 자들을 깔끔하게 제거해 버려야만 했다.
매우 자연스럽게 말이다.
그렇게 독백하던 와중, 문득 누군가가 기도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 똑!
교황은 황급히 계시록을 품속에 집어넣으며 태연하게 황금 술잔을 홀짝였다.
"다니엘입니다. 교황 성하."
"들어와도 좋다."
"예."
안드레아의 허락이 떨어지자, 웬 젊은 남자가 기도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왔다.
약간 긴 검은 머리를 차분하게 내린 평범한 인상이었다.
다니엘은 검은 하드 케이스를 탁자 위에 올려 두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작전 도중 사고가 좀 있었습니다."
"사고?"
"아무래도 그자가 탈환한 물건이 토리노의 수의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입니다. 아크웰 형제 또한 파괴된 하드 케이스를 바꾸면서 물건을 보았다고 합니다."
"음……. 그 둘 말고 수의를 본 자는?"
"없습니다."
"그래도 입단속이 좀 필요하겠군."
"처리……. 하겠습니다."
다니엘은 섬뜩하게 눈을 빛내며 교황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아크웰 페리티노의 목을 날붙이로 쑤실 것만 같았다.
더불어 블라드 유진이라는 자까지도 썰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군. 그저 아크웰에게 주의만 주게.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말일세."
"……예, 알겠습니다."
뭔가 아쉬운 듯한 느낌이 잠깐 들었지만, 다니엘의 얼굴에는 이내 아무런 표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나저나 중요한 물건을 빼앗길 뻔했군."
달칵!
주문을 외워 하드 케이스를 연 안드레아 교황은 서기(瑞氣)가 흐르는 토리노의 수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굳이 아이템 정보를 확인해 보지 않아도 이게 성물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교황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하드 케이스를 닫았다.
"결사단 놈들은 뭘 하고 있던가."
"블라드 유진이 습격했던 놈들은 전원 멀쩡하게 복귀했습니다. 부상이 좀 있기는 하나, 생명에 지장이 있는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놈들이……. 살아 있단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로군."
안드레아는 당연히 토리노의 수의를 탈취했던 결사단원들이 몰살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성기사단의 인원도 줄이고 일거양득의 효과를 볼 테니까.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결사단원들을 그대로 살려 보냈다.
뱀파이어 로드답지 않은 기행에 교황의 미간에는 골이 파였다.
미궁을 거침없이 정화하고 다니는 행보와는 달리, 이번에는 너무도 조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자를 탓할 수는 없었다.
애초부터 내린 임무가 물건의 탈환이지, 결사단의 멸절은 아니었으니까.
"성기사단의 동향은 어떤가."
"현재 낙심한 듯 보이지만, 내부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 합니다."
"까마귀가 아직 들키지 않고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나 보군."
"물론입니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녀석이니……."
안드레아 교황은 의자에 꼿꼿이 앉은 채로 피처럼 붉은 적포도주를 홀짝였다.
화려하게 꾸며진 기도실에 황금 술잔, 보기 드문 최고급 와인까지.
교황답지 않은 사치를 부리고 있었으나, 자세만은 외부에 드러나는 모습과 완전히 똑같았다.
사람의 버릇이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이런 자세를 유지했다.
이자의 인생은 뼛속까지 위선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위선 또한 극한에 다다르면, 절대 선과 다를 바 없는 법이지. 후후."
교황은 무의식중에 그런 자기의 행동을 깨닫고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안드레아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다니엘은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중국에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만. 아는 바가 있으십니까?"
"아직 보고가 올라오지는 않았네. 상황이 어떻다던가."
"이런 요구를 하더군요."
다니엘이 가방에서 편철된 서류를 꺼내서 보여 주자, 교황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중국에서 요구하는 게 살짝 과하다 싶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교황청의 전력을 보내 주는 대가로 받을 것들은 꽤 혹할 만한 수준이었다.
"우리에게 S급 헌터 한 명을 요청했군.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피해가 더 큰 것 같습니다. 고작 하루 만에 홍콩의 절반이 잠식당했다더군요. 이제껏 없었던 엄청난 속도입니다."
"음……."
"누굴 보내시겠습니까?"
원래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티칸의 성검 요한을 보내야만 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중국의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하거나.
하지만 피해 상황을 보아하니,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S급 헌터를 파견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요한은 지금 뭘 하고 있나."
"체코 전선에 나가 있는 상태입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이탈리아는 본토에 미궁 피해가 거의 없는 국가 중 하나였다.
이따금 미궁의 파편이 날아오기는 하지만, 그래 봐야 1년에 몇 번 되지도 않았다.
그 정도는 교황청의 성자들만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바티칸의 성검이라 불리는 S급 헌터 요한은 혼자서 전선을 전전하는 중이었다.
체코와 독일, 프랑스를 가리지 않고 전력이 부족한 곳마다 참전해 주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처사였지만, 그렇다고 그만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교황은 대외적으로 인자한 이미지를 표방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지. 자네는 누굴 보내는 게 좋겠는가."
안드레아가 질문하자, 다니엘은 미간을 좁히며 심각한 얼굴로 고민했다.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금방 쓰고 버릴 카드는 공수표처럼 남발해도 되는 법이지요."
"바로 그것일세. 중립이지만, 영원히 교황청의 편에 서 있을 전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스슥! 슥!
교황은 중국의 요청서에 멋들어진 글씨로 한 줄의 문장을 휘갈겨 적었다.
그러고는 다니엘의 앞으로 쭉 밀며 나직이 말했다.
탁!
"블라드 유진을 보내게. 물론 그 대가는 톡톡히 받아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그리 조처하겠습니다."
요청서를 손에 든 다니엘이 뒷걸음질로 나가자, 안드레아 교황은 피처럼 붉은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는 어둠 속에서 스산하게 눈을 빛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대의. 대의가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