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46화 (47/226)

21화

홍콩에 발생한 거대한 탑으로 인하여 도시의 절반 이상이 순식간에 오염 지대로 변했다.

게다가 확산세가 엄청나서, 각국의 관심이 홍콩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자신들의 영토에도 저런 탑이 생긴다면, 현재 전력으로 버틸 수 없는 곳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걸 제때 멈추지 못할 시, 중국은 물론이고 중동을 거쳐서 유럽까지 번질 수도 있었다.

저 괴상한 안개가 쏟아질 때는 기껏 유지 중인 전선이 와르르 무너져 버리리라.

그렇다 보니, 각국은 빠르게 정상 회담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최근 루시아도 이로 인하여 더욱 바빠진 상태였다.

반면, 홍콩의 탑은 블라드 유진에게로 향하던 관심을 어느 정도 덜어 주었다.

덕분에 그는 마드리드 외곽의 큰 단독 주택에 대놓고 머물면서, 그 누구의 방문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기껏 찾아와 봤자 만나 주지도 않을 테지만.

유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오른손 검지에 끼워진 수코의 인장을 매만졌다.

‘마음에 드는군.’

그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온통 시커멓게 물들어 죽음의 도시가 되어 있던 마드리드는 고작 몇 주 만에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아직 재건 작업이 한창이지만, 곳곳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행복감을 표출했다.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등지로 떠났던 스페인 사람들이 돌아온 결과였다.

도시는 온통 공사 소리로 시끄러웠으나,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오늘을 있게 해 준 블라드 유진이라는 영웅에게 감사할 뿐.

호록.

커피 한 잔을 홀짝인 그는 느긋하게 여유를 만끽했다.

아마 유진만큼 여유로운 오후를 보낼 수 있는 자는 어디에도 없을 터였다.

모두가 은연중 미궁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물론 어딜 가나 예외는 존재했다.

"레니, 레니."

―웅.

"유진 씨는 무슨 음식을 좋아할까?"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그는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쭈그려 앉아 개미와 놀고 있는 레니와 질문을 던지는 전시영이 있었다.

전시영의 질문에 레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새카만 눈을 깜빡거렸다.

―까, 까만 거.

"까만 거? 그게 뭘까? 검은색 음식은 꽤 많잖아. 음……. 초콜릿도 거뭇거뭇하다고 할 수 있으려나?"

―초콜릿?

"응. 달콤한 간식 있잖아."

―맞아. 초콜릿인 거 같아.

"오! 그래? 네가 뭘 좀 아는구나."

전시영은 정원 밖으로 후다닥 달려가더니, 한참 뒤에 꽤 큼지막한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레니의 앞에서 상자를 열더니, 내용물을 하나하나 꺼내서 보여주었다.

"이거 맞아? 자세히 좀 봐 봐."

―우웅. 먹어 봐야 알 거 같아.

"그래? 그럼 자."

전시영은 귀퉁이의 작은 초콜릿 하나를 까서 소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러자 우물거리며 가만히 음미하던 레니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이거야!

"그래. 그래. 이거 맞지?"

―맛있어!

"아니, 보라고 친구. 유진 님이 좋아하는 게 이거 맞냐니까? 확인만 해……."

소녀가 엉뚱한 말만 해 대자, 그녀는 한숨을 쉬며 뭐라고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데,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전시영은 이상함을 감지하고 말았다.

와구와구!

정말 잠깐 눈을 감은 사이, 레니가 상자에 담긴 초콜릿을 입 안에 마구 집어넣고 있었던 것이었다.

"으악! 이걸 네가 다 먹으면 어떡해?"

황급히 상자를 빼앗아 보았으나, 이미 초콜릿은 절반 이상이 사라진 상태였다.

대체 얼마나 손놀림이 빨랐던지, S급 헌터인 전시영조차 제대로 감지할 수가 없었다.

입가에 초콜릿을 묻힌 소녀는 무의식적으로 상자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레니 까만 거 좋아해.

"아니, 너희 주인이 좋아하는 걸 말해 달라고 했잖아."

―맞아. 까만 거야.

"그래! 까만 거."

―이건 레니가 좋아하는 까만 거.

부스럭! 슉! 슉!

방심하는 사이, 레니는 남은 초콜릿을 전부 털어 넣고 볼이 빵빵해진 채로 우물거렸다.

"하……. 내가 이 어린애한테 뭘 기대한 거지."

―언니, 까만 거 더 줘.

"그거 나도 어렵게 구한 거야. 요즘에 기호품 구하기가 쉬운 줄 아니. 특히 이런 열악한 곳에서는 군용 보급품을 쌔벼 오는 것밖에……."

전시영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더는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순간이었다.

문득 정원 입구 쪽에서 청천벽력 같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전시영 씨!"

"으악! 마녀가 쫓아왔다!"

"아니, 얼마 남지 않은 기호품을 다 훔쳐 가시면 어떡합니까? 다음 보급이 오려면 2주나 기다려야 되는데!"

정원으로 들어오며 버럭 소리친 사람은 한창 마드리드 재건에 힘쓰고 있던 루시아였다.

전시영이 보급 부대의 기호품을 다 털어먹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참이었다.

그녀는 레니를 방패 삼아 도망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그럼 2주 동안 초콜릿 말고 다른 거 먹으면 되잖아."

"그 다른 것도 누군가가 깡그리 털어갔다는데요? 좀 맛있다 싶은 식료품은 다 가지고 갔다면서요. 그거 전부 어디 있습니까? 얼른 내놔요!"

"에헹! 난 모르는 일인뒈? 그거 레니가 다 먹었는뒈?"

"말이 돼요? 이 조그마한 애가요?"

"그래. 레니, 방금 이거 한 상자 다 먹었잖아. 그렇지?"

루시아를 향해서 얄밉게 입술을 삐죽거리던 전시영은 레니의 앞에 놓인 상자를 가리켰다.

척 봐도 그게 보급 부대에서 가져온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녀의 대답은 의외였다.

―레니는 안 먹었어.

"어머? 얘가? 너 방금 이 많은 초콜릿을 한꺼번에 다 먹었잖니. 입가에 잔뜩 묻혀 놓고 거짓말하면 못써요."

―그래도 너무 적어서 먹은 것 같지 않은걸. 부족하면 안 먹으니만 못하니까, 레니는 안 먹은 거야.

"와! 얘 궤변 늘어놓는 것 좀 봐. 완전 소름."

전시영이 팔뚝을 손바닥으로 쓸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루시아의 표정은 처음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

그저 숨겨 둔 기호품 꾸러미를 찾으려고만 할 뿐.

"궤변은 전시영 씨가 늘어놓고 계시는 거죠. 잔말 말고 얼른 내놔요."

"아, 잠깐만 있어 봐. 내가 알아볼 게 있어서 그래."

손을 흔들어 루시아를 제지한 전시영은 레니의 앞에 꽃받침을 한 채 앉아서 고개를 갸웃했다.

"레니야. 언니가 뭘 주면 제대로 이야기해 줄래?"

―음……. 사탕?

"오! 그거야 쉬운 일이지. 저 머리카락이 번쩍번쩍한 언니한테서 슬쩍한 게 있거든. 짜잔!"

전시영이 품속에서 꽤 큼지막한 롤리팝 하나를 꺼내 소녀의 입에 물려 주었다.

그러자 레니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사탕을 야금야금 씹어먹었다.

오도독! 오도독!

"자, 그럼 이야기 좀 해 줘 봐. 너희 주인이 뭘 좋아하니?"

―나 알아. 매, 맥…….

"맥심?"

―웅. 그런 거였어.

"오! 역시나 그 사람도 남자긴 남자구나? 맥심 하면 이거쥐!"

전시영은 고풍스러운 갈색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저 조그마한 물건에서 큼직한 책자가 나오다니, 아무래도 공간 확장 주머니가 틀림없었다.

책자의 표지에는 늘씬한 백인 여자가 수영복만 입은 채 야릇한 표정으로 포즈를 잡고 있었다.

얼른 기호품을 내놓으라고 닦달하던 루시아도 관심이 가는 모양인지, 슬그머니 다가와 고개를 내밀었다.

"오! 찾았다! 따끈따끈한 신상은 아니고, 6개월 전 거네. 그래도 전선에서 이 정도면 양품이지. 어디 보자. 영국 출신의 S급 헌터 다이애나 로즈."

"저 이 여자 알아요."

"그래? 나도 대충은 아는데, 직접 본 적은 없어. 리고르 아스페라에 참여하지 않았으니까."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는 헌터죠. 아마 공략으로 얻는 것보다 광고 수익이 훨씬 많을 거예요."

"쩝.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나? 나랑은 영 반대인데."

다이애나 로즈는 자연스러운 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지닌 매력적인 모델이었다.

육감적인 몸매는 물론이고, 아름다운 얼굴에 인성도 훌륭해서 미국인에게 친숙한 셀럽 베스트로 꼽혔다.

작년 타임 100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에 등극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녀는 헌터로서도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소 늦게 S급 헌터에 올라서 리고르 아스페라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그 외에도 혁혁한 공을 많이 세웠다.

특히 강력한 딜을 뽑아냄과 동시에 회복이 가능한 특성 덕분에, 어느 공략대에서도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루시아와 양대 산맥을 이루는 여성 S급 헌터.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신경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SNS 팔로워 수가 10억이래. 이참에 나도 한번 해 볼까?"

"그거 다 비키니 사진 같은 거 올려서 끌어모은 수잖아요. 흥!"

"음……. 우리가 얘처럼 한다고 해서 똑같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은데."

전시영은 저도 모르게 잡지를 놓고, 자신의 가슴팍을 긁적였다.

두 번째 페이지 전체에 박힌 다이애나의 넘칠 듯한 비키니 사진이 괜스레 더 눈에 띄었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루시아가 비슷한 포즈를 취하며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야, 너는 좀 자신 있다. 이거지?"

"저도 그렇게 꿀리지는 않는답니다."

"문제는 얘가 우리보다 여섯 살 어리다는 거야."

"그게 뭐 어때서요."

"유진 님도 웬만하면 어린 친구가 좋지 않을까?"

"……."

솔직히 인정하기 싫었지만, 전시영의 말에 쓸데없는 열패감이 가슴속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루시아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얼른 맥심 잡지를 낚아채려 했다.

타닷!

"차핫! 어딜? 이렇게 중요한 물건을 순순히 넘길 수는 없지. 이거나 가져가라고!"

전시영은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서 루시아에게 던졌다.

겉으로는 작아 보였는데, 주둥이가 풀리는 순간 상당한 양의 물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체 강탈한 기호품을 어디에 숨겼나 했더니, 공간 확장 주머니에 넣어 두고 다닌 모양이었다.

일단 어떻게 받아들고 보니, 주머니 자체도 군용이었다.

"이이! 당장 거기 안 서요? 그거 얼른 내놓으세요!"

"기호품은 이미 네 손에 넘어갔잖아. 난 이 잡지만 있으면 된다고. 디아나인지 다이애나인지 하는 애 스타일을 따라 할 거야!"

"그건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타다다다닷!

난데없이 격렬한 추격전이 시작되었지만, 레니는 천하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롤리팝을 입 속에 다 집어넣은 소녀는 루시아가 떨어뜨린 기호품 물자로 다가갔다.

스윽!

―오와!

주머니를 살짝 열자, 안에서 다양한 종류의 과자가 쏟아져 나왔다.

바닥에 주저앉은 레니는 빠른 속도로 비스킷을 까먹기 시작했다.

"레니, 도와줘!"

그때 정원 저편으로 도망쳤던 전시영이 돌아오며 소녀의 뒤에 쏙 숨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오른손으로 뇌신의 흉장을 붙잡으며 으르렁거렸다.

"숨어 봐야 소용없습니다."

"으왓! 이 여자가 사람 팬다!"

레니를 방패로 세우는 데 실패한 전시영은 황급히 몸을 돌려 주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루시아는 유진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잠깐 멈칫했지만, 그래도 뒤쫓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저 괘씸한 여자를 붙잡아서 기호품을 전부 가지고 돌아가지 못한다면, 오늘 밤 발 뻗고 잘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참 이해하기 어렵군."

2층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블라드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남은 커피를 들이켰다.

호록.

그런 그의 앞에는 두 개의 커피 믹스 봉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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