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아크웰이 떠난 직후, 블라드 유진은 탁자 위에 놓인 수코의 인장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감회가 새로운 눈빛으로 반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착용해 보는 건가."
스윽! 챠작!
오른손 검지에 큼지막한 반지를 끼워 넣자, 자동으로 크기가 줄어들며 손가락에 딱 맞게 변형되었다.
그러자 그저 시커멓기만 하던 수코의 인장에서 붉은빛이 번쩍거렸다.
두 개의 뾰족한 삼각형과 타원에서 마기가 피처럼 흘러나와 기묘한 빛을 번득인 것이다.
반지를 착용하자마자 그의 눈앞에 홀로그램 글귀가 불쑥 떠올랐다.
[수코의 인장 부가 효과로 뱀파이어 로드가 보유한 신격이 강화됩니다.]
<아이템 정보>
명칭 : 수코의 인장
등급 : EX
내구도 : 파괴 불가
효과 : 신성 저항(30%), 마기를 보유한 존재에 한하여 호감도 증가(30%)
특징 : 신격 강화, ???(봉인)
뱀파이어 로드의 증표. 신성력에 저항하는 힘과 일족의 추앙을 받는 권능을 동시에 얻을 수 있음. 부가 효과로 영혼의 격이 한 단계 올라감.
수코의 인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패시브 효과가 있었다.
마기를 지닌 존재에게는 쥐약이나 다름없는 신성력에 무려 30%나 되는 저항을 추가로 올려 주었다.
이미 피의 군주는 어느 정도의 신성 저항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보유한 것이다.
더불어 호감도 30% 증가 효과는 모든 일족으로부터 맹목적인 충성심을 끌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뒤의 부가 효과다.’
기본적인 아이템 능력치도 대단하지만, 수코의 인장은 부가 효과가 더욱 중요했다.
흡혈귀들의 왕을 그저 뱀파이어 로드라 부르지 않고, ‘피의 군주’라 지칭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수코의 인장을 물려받은 로드는 그때부터 종족을 초월하는 강화 효과를 얻기 때문이었다.
블라드 유진은 아이템 정보 옆에 새로운 창을 하나 더 띄웠다.
<능력치 정보>
이름 : 블라드 유진(Vlad Eugene)
레벨 : 834(봉인율 53%)
등급 : S(Lv. 601~900)
종족 : 피의 군주
종족 효과 : 강체, 불로불사, 반신
아니나 다를까, 그의 능력치 정보는 이전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뱀파이어가 아니라 피의 군주라 표기되는 것부터, 종족 효과에 반신(半神)이라는 글귀가 추가되었다.
지금부터 유진은 한낱 마기의 권속이 아닌, 주체적인 대군주가 된 거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제 그런 그를 추앙할 일족은 하나도 남지 않았지만.
"그나저나 슬슬 봉인이 풀릴 때가 되었는데."
능력치 정보를 확인한 유진은 검붉은 반지를 내려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수코의 인장에는 이 외에도 한 가지 기능이 더 있었다.
바로 세 개의 물음표로 표기된 두 번째 부가 효과였다.
잠시 반지를 응시하고 있자, 드디어 반가운 홀로그램 글귀가 번쩍 떠올랐다.
[수코의 인장이 군주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부가 효과에 따라 ‘마신강림’ 스킬이 해방됩니다.]
<스킬 정보>
명칭 : 마신강림(魔神降臨)
등급 : EX 위력 : EX+
지속 시간 : 5초
재사용 대기 시간 : 30일
소모 자원 : 피의 권능
효과 : 지속 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와 이로운 효과가 2배로 적용.
‘이런 스킬이 있었다니. 솔직히 놀랍군.’
1천 년 전에는 수코의 인장을 손에 넣지 못했기에, 유진은 스킬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아이템의 가치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수확이었다.
아마 이러한 힘이 내장된 걸 알았다면, 교황은 결단코 수코의 인장을 내어주지 않았을 터였다.
차라리 다른 걸 넘기고 이 물건은 끝까지 감춰 두었을 터.
마신강림은 피의 군주에게만 허용된 궁극의 강화 스킬이었다.
하지만 아직 유진의 레벨이 S급에 불과해서 그런지, 천계도살검처럼 완벽하게 개방되지는 않았다.
지속 시간이 고작 5초 남짓한 반쪽짜리 스킬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순간에 잘만 사용하면,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 심대한 타격을 줄 수도 있었다.
그는 나름 만족한 표정으로 스킬 정보창을 종료했다.
스슥―!
그런데 문득 블라드 유진의 그림자에서 레니가 고개를 빼꼼 내미는 게 아닌가.
녀석은 평소와 다르게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주인. 오늘 달라 보인다.
"어떻게 달라 보인다는 말이지?"
―원래는 그냥 맛있어 보였는데, 지금은 어어어어엄청 맛있어 보여.
"……뭐가 다르다는 건지 모르겠군."
레니의 황당한 대답에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 순간, 홀로그램 글귀가 불쑥 떠올라 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수코의 인장 효과로 레니의 호감도가 30% 상승합니다.]
[적용 대상이 동반자라 이미 최대치입니다만, 인장의 효과는 계속됩니다.]
[레니의 호감도가 최대치를 초과합니다.]
[대상은 동반자를 넘어 당신의 완벽한 권속이 되었습니다.]
‘제대로 적용되긴 하는군.’
레니 또한 마기를 다루는 다크 엘프이기 때문에, 호감도 효과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레니의 표현력이 부족해서 저런 식으로밖에 말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 * *
토리노의 수의를 전달하러 아크웰이 교황청에 다녀오는 동안, 블라드 유진은 마드리드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적절한 보상을 약속하지 못했던 독일의 요청은 그대로 무시해 버렸다.
이후로 베른트 폰 마이어 총리가 몇 번 더 연락을 해 왔으나, 그는 아예 만나 주지도 않았다.
다만, 희귀한 금속을 대가로 제시했던 포르투갈의 요청은 아직 고민 중이었다.
적어도 그들은 유진이 원하는 걸 대가로 주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전과 같은 제안이라면 별 의미 없지.’
천상계의 금속 덩어리가 뭔가 신기해 보이기는 해도 그뿐이었다.
그걸 얻어서 대체 어디에 쓸 것인가 생각하면, 딱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은 아니었다.
마기가 흐르는 물건도 아니고, 신성력이 내포된 걸 피의 군주가 쓸 일은 없을 테니까.
"무료하니 딱 좋군."
그는 요즘 커피를 비롯하여 다양한 차를 마시거나, 재건되는 중인 마드리드를 돌아보며 휴식을 즐겼다.
정윤규 교수의 기억을 얻었다지만, 직접 체험하는 건 또 색다른 느낌이었다.
어디까지나 유진은 10세기경까지만 경험한 자였으니까.
‘알력 싸움에 정신이 팔려 다른 곳에 눈 돌릴 시간이 없겠지.’
그가 이런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교황청 내부의 주도권 싸움 덕분이었다.
베네딕토의 기억에 따르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황은 빠르게 신망을 잃어 가던 중이었다.
은밀하게 이루어졌던 몇 가지 비리 의혹이 터지면서 성자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성기사단이 우위를 점하던 중, 난데없이 블라드 유진이라는 인물이 툭 튀어나왔다.
놀랍게도 교황이 발탁한 인재는 대규모 미궁 공략에 스페인 진공 작전까지 성공해 버렸다.
이 일로 돌아섰던 성자 일부가 복귀하게 되자, 교황과 성기사단의 전력은 비슷해졌다.
교황청 내부의 여론도 딱 반반이었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토리노의 수의 사건이 터진다면, 교황이 몰락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교황청이 하나가 되게 둘 수는 없다.’
만약 성기사단에 의해 새로운 교황이 등극한다면, 예전처럼 귀찮게 달라붙을지도 몰랐다.
당장 교황청 전체와 맞붙을 상황은 되지 않으니, 유진의 입장에서는 교황이 자신의 정체를 숨겨 주는 편이 좋았다.
적어도 봉인을 모두 풀고, 과거의 힘을 완전히 되찾을 때까지는 말이다.
똑똑!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을 보아하니, 아크웰이 돌아온 것 같았다.
"들어와."
"다녀왔습니다. 유진 님."
아니나 다를까, 깔끔한 옷차림의 아크웰 페리티노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교황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몰라도 더 이상 불손한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녀석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 크게 상관은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여 버리고, 교황에게 새로운 대리인을 요청하면 되는 거니까.
이제 그의 필요성이 엄청나게 커진 교황으로서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는 못 배길 터였다.
"교황이 뭐라던가."
"별말씀은 없으셨는데요? 임무는 그대로 쭉 이어서 하랍니다. 슬슬 다음 대규모 미궁을 공략하러 가셔야죠."
"그래야겠군. 물론 내가 내킬 때 말이야."
"에……. 너무 성과가 없으면, 안 될 텐데요."
"지금까지 이룬 것만 해도 성과는 차고 넘칠 텐데."
"그, 그건 그렇죠. 하하."
유진의 은근한 압박에 녀석은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덜컥! 퉁!
바로 그때, 누군가가 허락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아크웰을 펄쩍 뛰어넘었다.
그러고는 블라드 유진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아크웰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기만 했다.
"어우! 놀라라……. 방금 그건 뭐죠?"
녀석이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툭!
"여, 교황청 외교관 친구. 왔어?"
전시영이 뒤따라 들어오며 아크웰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뒤를 돌아본 녀석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인사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점점 날이 더워지는데 에어컨을 틀만큼 전력 공급이 넉넉하지 못하다 보니, 사람들의 옷차림은 가벼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런 현지의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여름에는 지옥처럼 덥고 습하기까지 한 한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런 듯했다.
문제는 전시영의 옷차림이 과해도 너무 과한 것이었다.
그녀는 속이 비치는 흰 크롭티에 속옷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짧은 핫팬츠를 입고 있었다.
글래머는 아니지만, 탄탄하고 균형 잡힌 몸매를 그대로 드러낸 모습이었다.
"레니, 아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자. 응?"
전시영은 블라드 유진의 주변을 요리조리 돌아다니며, 그림자를 향해서 말을 걸었다.
하지만 한 번 몸을 숨긴 레니는 묵묵부답이었다.
"쳇! 너 자꾸 그러면 과자 안 줄 거야."
그러다가 전시영이 과자 이야기를 꺼내자 그제야 레니는 그림자 밖으로 머리만 살짝 내밀었다.
―루시아 언니가 많이 줘서 괜찮아.
"걔가 주는 건 먹지 말라고 했지! 그거 몸에 안 좋은 거라고."
―맛있으면 좋은 거야.
"언니랑 약속했잖아. 거래하기로. 기억 안 나?"
―과자가 적어. 협상 결렬.
"와! 결렬? 너 그런 어려운 말 어디서 배웠어? 루시아 걔가 이렇게 하라고 시켰지!"
쑥!
잠깐 머리를 내밀고 전시영과 대화하던 레니는 이내 그림자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나라 잃은 표정으로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물론 그런다고 유진에게서 긍정적인 답변이 나오지는 않았다.
"나가."
"아, 아니야. 오늘은 이거 때문에 온 거 아니라고."
띡!
축객령을 받은 전시영은 재빨리 변명하며 TV 리모컨을 찾아 눌렀다.
[엘 파이스 뉴스입니다. 현 시각 홍콩 주룽청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면이 갈라지며 거대한 탑이 솟아올랐는데, 매우 빠른 속도로 오염 지역을 확산하는 중입니다. 현지 전문가는 4대 미궁에 버금가는 대규모 사태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홍콩에 있는 특파원 연결하겠습니다.]
스페인어가 엄청난 속도로 쏟아져 나왔지만, 이 자리에서 못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면에는 온통 흑색인 거대한 탑과 빠르게 확산하는 검은 안개가 보도되고 있었다.
아크웰은 사건에만 집중한 채 멍하니 TV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머지 두 사람의 관점은 달랐다.
탑의 출현보다 오염 지역에 집중한 것이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확산 방식이 다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