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강제로 잠금장치를 풀자마자 안에서 강렬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이게 여기서 나오다니.’
뜻밖의 수확이었지만, 유진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했다.
그다지 달갑지 않은 기운이라,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복부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져 있던 베네딕토가 바닥을 기며 외쳤다.
입으로 내장을 토하기라도 할 것처럼 처절한 절규였다.
"아, 아이의 얼굴을 하고 기습하다니……. 이 악독한 놈들! 그 물건이 뭔 줄 알고 눈독을 들이는가."
고개를 돌린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베네딕토를 내려다보았다.
"알지, 왜 모르겠나."
"아, 알면서도 이런 짓을 한다고? 정말이지 무모한 작자로군. 교황청의 응징이 두렵지도 않으냐?"
"응징이라. 네놈은 내가 왜 교황청의 공격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지?"
"당연히 그 물건은 교황청의……."
베네딕토는 말을 하다 말고 눈을 크게 치켜떴다.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블라드 유진의 은발을 이제야 발견한 모양이었다.
"교황의 주구, 미궁 박멸자인가. 그랬군. 맞아. 그래서 우리가 습격당한 거였어."
그가 한 말의 의미를 뒤늦게 이해한 베네딕토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자신들이 교황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유진이 시선을 거두자, 레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던졌다.
―이거 시끄러워. 죽일까?
"아니."
목소리는 달콤하지만, 내용은 살벌한 질문에 그는 살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저 성기사들을 죽여 봤자, 상대적으로 교황의 위세만 높여 줄 뿐이었다.
블라드 유진의 입장에서는 교황청 내부의 알력이 지금처럼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이 물건은 생각을 좀 해 봐야겠군.’
그는 홀로그램을 켜서 하드 케이스에 담긴 흰 천의 정보를 허공에 띄웠다.
<아이템 정보>
명칭 : 토리노의 수의
등급 : EX
내구도 : 일회용
효과 : 차원문 개방, 마기 축출
특징 : 세트 아이템
내부에 엄청난 신성력을 품고 있는 성물. 광진의 성배 엘―칼릭스와 함께 사용 가능. 차원문을 열어 천상계의 존재를 끌어들임.
유진의 손에 들어온 물건은 EX급 아이템 토리노의 수의였다.
원래는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 성당에 고이 잠들어 있어야 할 성물이었다.
자세한 뒷배경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결사단은 이 아이템을 탈취하여 교황에 대적하려 했으리라.
대충 교황청 내부의 상황이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어 보는 게 좋겠지.’
그는 바닥에 엎어진 베네딕토의 앞으로 유령처럼 걸어갔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문득 눈앞에 검은 구두가 나타나자 놈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죽여라. 교황의 주구여."
"그럴 마음은 전혀 없는데. 내가 왜 너희를 죽여야 하지?"
"위선 떨지 마라. 그러려고 온 게 아니었더냐?"
"난 그저 정보가 좀 필요할 뿐이다. 그래야 이걸 어떻게 할지 판단이 설 것 같거든."
유진이 토리노의 수의가 담긴 하드 케이스를 가리키며 말하자, 베네딕토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형제를 팔아넘기면 물건을 돌려주겠다는 말로 곡해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토리노의 수의가 필요하다지만, 신의를 저버릴 수는 없다. 나의 의리와 신앙심을 시험할 생각 따윈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스윽!
그러면서 녀석은 은밀하게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베네딕토의 의도를 확인한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가톨릭교회에서 자살은 대죄 아니었던가."
"……내가 죽어 지옥에 가더라도 형제들은 지킬 것이다."
의도를 간파당하자, 놈은 아예 대놓고 단검을 빼 들었다.
여차하면 자신의 목에다가 날카로운 쇠붙이를 쑤셔 박을 것처럼 역수로 쥐고 블라드 유진을 주시했다.
하지만 그는 베네딕토를 고문하거나 강제로 정보를 빼낼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내려놓아라."
유진의 눈이 검붉은색으로 빛나자, 녀석은 멍한 표정으로 단검을 바닥에 떨궜다.
그러고는 언제 자살 기도를 했냐는 듯이 태연한 얼굴로 무릎을 꿇은 채 가만히 있었다.
혈성쇄혼술로 잠시 베네딕토의 정신을 제압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내가 인간에게 관용을 베풀 줄이야. 이 또한 재밌구나."
그는 그런 놈을 향해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츠츠츠츠츠!
새하얗다 못해 투명하게 변한 유진의 손을 타고 시뻘건 혈액이 꿀렁꿀렁 넘어갔다.
스윽!
입술을 살짝 핥은 그는 불쾌한 표정으로 흡혈 스킬을 중단했다.
"역시 성기사의 피는 역겹군."
성기사의 체내에 자리한 신성력 때문에, 흡혈 도중 미세한 타격을 받은 것이다.
딱 원하는 정보만 얻고 유진은 슬그머니 물러났다.
"가자."
―웅.
필요한 것을 모두 얻은 그는 검은 하드 케이스를 복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
스슥!
그러자 레니는 유진의 그림자로 녹아들었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녹턴이 투레질하며 다가왔다.
잠깐 널브러진 성기사들을 돌아보던 그는 유령 군마의 등에 타고 밤하늘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대략 감이 잡힐 듯하네.’
* * *
마드리드로 돌아온 유진은 곧장 아크웰을 소환했다.
―너 오래.
"으악!"
우당탕!
방에 누워 빈둥대다가 느닷없이 레니의 방문을 받은 녀석은 깜짝 놀라며 침대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문이 다 닫혀 있었는데도 웬 소녀가 불쑥 들어와 말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대, 대체 언제 들어온 겁니까?"
―방금.
"어떻게요?"
―걸어서?
"……."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던 아크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겉옷을 걸쳤다.
블라드 유진도 이해하기 어려운 자였지만, 새로 얻었다는 부하는 더욱 생소한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언어 능력이 조금 부족해 보이는 여자아이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숨을 쉬며 방을 나선 녀석은 그를 찾아서 2층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부르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이번 임무는 보상이 없더군. 이전에는 확실한 대가가 있었는데 말이야."
"보상 말씀입니까?"
아크웰은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이미 그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아는 상태.
교황과의 거래에서 대규모 미궁을 공략해 주고, 자유를 약속받았다는 내용까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일에 보상이 없다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블라드 유진을 옭아맨 목줄을 교황이 틀어쥐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다 보니, 절로 당혹스러운 얼굴이 튀어나온 것이다.
"애초부터 약속된 건 하나도 없나 보군."
"그……. 따로 연락해 보겠습니다."
"최대한 빨리하는 게 좋을 거야. 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니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마음이 바뀌다뇨?"
"교황이 원하는 물건을 영영 얻지 못할 수도 있단 말이지."
"……일단은 알겠습니다."
순간적으로 아크웰의 표정이 불손하게 변하는 것을 확인한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녀석의 착각이 유진에게는 사소한 유희 거리로 다가왔으니까.
아마 아크웰 페리티노는 금제를 가해서 눈앞의 고대 뱀파이어를 굴복하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천계도살검을 얻은 그에게는 금제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도 모르고.
‘착각 속에 사는 놈들을 갖고 노는 것도 재밌겠구나.’
녀석은 주택에 설치된 유선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돌아온 아크웰은 어깨를 으쓱하며 교황이 내건 조건을 알려주었다.
"유진 님이 혹할 만한 물건을 돌려주겠답니다."
"교황에게 그런 게 있었나?"
"저야 잘 모르죠. 수코의 인장이라고 하던데요."
"……."
그러자 항상 무표정하던 유진의 얼굴에 실금이 생겼다.
교황이 보상으로 자유를 내걸었을 때만큼 확실한 감정 표현이었다.
수코(Succo)의 인장은 고대로부터 뱀파이어 로드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상징이었다.
계시록의 표지 안쪽에 찍힌 것과 똑같이 두 개의 삼각형과 붉은 타원이 각인된 일족의 인장.
물론 그냥 상징으로만 존재하는 물건은 아니었다.
수코의 인장은 뱀파이어에게 마기를 제공하는 능력을 지녔으며, 로드의 권능 강화에 꼭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재밌군."
"이걸로 타협하시겠어요?"
"인장을 가져오면 물건을 내주지. 가 봐."
"알겠습니다."
아크웰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더니,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아까 잠시 보였던 불손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교황에게서 뭔가 지시를 받았기에, 마음에도 없는 저런 행동을 보인 것이리라.
굳이 흡혈하지 않고도, 거기까지 추측한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언제 본색을 드러낼지 궁금하군. 되도록 늦었으면 좋겠는데."
블라드 유진은 교황의 착각이 오래가길 바랐다.
하늘 높은 곳을 날고 있을 때 떨어뜨려야 추락의 충격이 더욱 클 테니까.
‘그나저나 수코의 인장이라…….’
수코의 인장은 뱀파이어 로드의 반지였다.
1천 년 전에 그가 피의 군주로 등극하면서 받았어야 정상인 유산이지만, 봉인됨으로 인해 얻지 못한 물건.
교황이 낼 수 있는 패 중에 가장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 * *
교황과의 거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바티칸 시국으로 이동했던 아크웰은 곧장 묵직한 하드 케이스를 가지고 돌아왔다.
인장의 크기를 생각하면, 저렇게 큰 가방은 전혀 필요가 없었다.
토리노의 수의를 담은 것과 똑같은 걸 보니, 교황청에서 중요한 물품을 운송할 때 쓰는 케이스인 모양이었다.
"받아 왔습니다."
"의외로 깔끔한 거래로군."
"교황청이 굳이 수작을 부릴 이유는 없으니까요. 뭐 하러 그러겠어요?"
"너무 맹신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아크웰의 태연한 대답에 유진은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미궁 사태 이후의 교황청은 거대한 무력 집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기 있습니다. 아스타 켈라그라스."
척! 척! 덜컥!
녀석이 탁자 위에 케이스를 올려놓고 주문을 외자, 잠금장치가 자동으로 풀리며 뚜껑이 열렸다.
비밀번호가 아니라 주문으로 해제하는 아이템인 모양이었다.
케이스 안에는 검은색 두꺼운 반지가 붉은 벨벳 위에 놓여 있었다.
"물건은 확실하군."
거기서 느껴지는 미약한 마기에 유진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수코의 인장임을 알아보았으니까.
그는 소파 뒤에서 반쯤 열린 하드 케이스를 꺼내서 아크웰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뚜껑이 덜렁거리며 안쪽의 내용물이 흘러나오려 했다.
녀석은 재빨리 가방에 손을 올려놓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이걸 어떻게 여셨어요?"
"그냥 부쉈지."
"웬만큼 강한 힘에도 안 부서진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보다 더 강한 힘이 작용했나 보지."
"음……. 뭐 어찌 되었든 물건만 멀쩡하면 되니까요. 그럼 제가 이 케이스를 가지고 가도 될까요?"
"좋을 대로."
아크웰은 수코의 인장을 빼낸 뒤, 블라드 유진이 내민 하드 케이스를 열었다.
그러자 녀석의 눈이 절로 크게 치켜 떠졌다.
바티칸 시국의 교황청 외교관답게 토리노의 수의를 바로 알아본 것이다.
"이, 이건……."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아크웰 페리티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임무를 진행 중인 그에게 교황이 또 다른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달칵!
잠금장치를 닫은 녀석은 환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깔끔하게 임무를 완수한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