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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43화 (44/226)

18화

결사단 요원들의 앞에 불쑥 나타난 인물은 검은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소녀였다.

조막만 한 손에는 온통 암청색으로 빛나는 검이 들려 있었고, 그것은 금방이라도 목을 꿰뚫을 것처럼 번들거렸다.

소녀는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든 베네딕토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살벌한 상황과는 달리, 놀랍도록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미소였다.

거기서 뭔가 희망을 보았을까?

베네딕토는 저도 모르게 상대의 정체를 물어보았다.

"다, 당신은 누구지?"

허리 어림밖에 오지 않을 것 같은 여자아이에게 할 만한 질문은 아니었다.

하나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는 암청색 검 때문인지, 성기사의 물음은 꽤 적절해 보였다.

그러자 소녀는 대체 그딴 걸 왜 묻는지 궁금한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난 레니야.

의외로 상대는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이름을 알려 준다는 건, 살인멸구하겠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베네딕토는 꽤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걸 좀 치워 주지 않겠니? 우린 나쁜 사람들이 아니란다."

―누군지 알아.

"아, 안다고?"

―응. 주인님이 그랬어.

"주인?"

―처리하고 그거 가져오래.

레니가 턱짓으로 검은 하드 케이스를 가리키자, 베네딕토의 눈빛이 돌변했다.

상대가 임무 목표를 노리는 이상, 어린아이의 모습이라도 살려 둘 수가 없었다.

"형제들이여. 때가 도래했도다."

"결사단을 위하여!"

처저저적!

열다섯 명의 결사단 요원들은 베네딕토와 적당히 떨어진 곳에 줄지어 섰다.

그러고는 양손을 마주 잡더니, 눈을 감고 머리를 푹 숙이는 게 아닌가.

그들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레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미안하지만, 아이라고 봐줄 수는 없단다."

베네딕토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오른손을 들어 목에 드리워진 암청색 칼날을 붙잡았다.

치이이이익!

그러자 놀랍게도 레니의 델레오 아르마(délĕo arma)가 신성한 백광에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고농축 마기로 이루어진 칼날은 제멋대로 이지러지며 기능을 상실했다.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은 레니는 몸을 뒤로 빼며 암청색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쓰이이잉―!

하지만 베네딕토의 손에서 일어난 신성력에 의해 절반 이상이 뚝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그러는 바람에 방금의 신속한 공격은 허무하게 허공만 가르고 지나갔다.

―불쾌해.

소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신성한 기운에 휩싸인 베네딕토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상대는 최종 보스급의 몬스터도 간단히 때려잡는 레니를 물러서게 했다.

마기를 다루는 다크 엘프가 상성에서 밀릴 수밖에 없지만, 둘의 실력 격차는 그와 상관없이 너무도 컸다.

레니는 S급 최상위인데, 베네딕토는 이제 막 A급에 들어선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뭔가 이상함을 느낀 소녀는 암청색 무기를 생성하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델레오 아르마가 큼지막한 장궁으로 변하여 빛무리에 휩싸인 베네딕토를 조준했다.

장궁의 길이가 족히 신장의 두 배는 더 커 보였지만, 레니는 손쉽게 시위를 잡아당겼다.

스윽! 피―잉!

간결한 동작으로 오른손을 놓자, 암청색 화살이 은밀하게 쏘아졌다.

저 정도 속도면 파공성이 들릴 법도 한데, 날아드는 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암살에 최적화된 궁시(弓矢)였다.

지척까지 화살이 날아들었음에도 베네딕토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소리를 죽이고 맹렬하게 날아들던 화살은 놀랍도록 강렬한 백광에 사그라졌으니까.

치이이이―!

괴상한 소리와 함께 레니의 델레오 아르마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소녀는 상당히 놀란 표정으로 베네딕토를 쳐다보고 가만히 서 있었다.

회심의 일격이 이토록 간단하게 막힐 줄은 몰랐기에, 나름대로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눈을 감았다가 번쩍 뜬 베네딕토는 그런 레니를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용기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그분의 검. 계시대로 휘두르겠나이다."

즈이이잉!

기도하듯 맞잡은 손아귀에서 눈부신 광채가 튀어나오더니, 이윽고 반듯한 모양의 검이 되었다.

베네딕토는 검을 가슴께로 끌어당기며 비장하게 외쳤다.

"사탄은 달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법. 결사단은 이에 현혹되지 않고 단호하게 처단할지어다!"

* * *

"얄팍한 술수로군."

블라드 유진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레니와 베네딕토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새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신성력과 암청색 마기의 싸움은 꽤 볼 만한 장면이었다.

고작 A급 하위 수준에 불과하던 베네딕토가 순식간에 레니와 자웅을 겨룰 만큼 성장했으니까.

이런 박빙의 승부가 가능했던 건 뒤편에 줄지어 선 성기사들의 희생 덕분이었다.

그들은 힘을 모아서 베네딕토에게 막대한 신성력을 전달하고 있었다.

실상을 파헤쳐 보면 레니는 A급 헌터 열여섯과 동시에 싸우는 중이었다.

그것도 신성력을 단 한 명에 집중하여 일대일 전투 효율을 높인 자를 상대로 말이다.

‘놀랍도록 은밀하다. 신성력으로 저런 짓을 할 수도 있다니, 성기사들이 하는 짓은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정의를 표방하고 뭇 사람들에게 반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성기사들은 그저 교황청의 무력 단체에 불과했다.

놈들은 뱀파이어를 잡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낮에만 의심 지역을 급습하고, 밤에는 항상 수십 명씩 모여 신성력의 방진을 형성했다.

일부러 상처 입힌 어린아이들로 미끼를 놓거나, 성기사단의 비위를 알아챈 사람들을 몰살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뿐이랴, 그들에게 정정당당한 싸움은 없었다.

효율을 위해서 대부분의 전투는 기습에 이은 학살로 점철되었다.

지금도 겉으로는 일대일 싸움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결단코 그렇지 않았다.

"싸움이 길어지면 좀 위험하겠는데."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베네딕토와 결사단 사이에 존재하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위험하다는 말은 레니에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뒤에서 신성력을 하나로 모아 베네딕토에게 전달하는 결사단 요원들을 보고 내뱉은 말이었다.

‘함께 전달하고 있다.’

신성력 전이술은 사기적인 기술이었지만, 상당한 페널티가 있었다.

인간의 생명력도 대상자에게 같이 간다는 사실이었다.

고도로 민감한 감각을 지닌 그에게는 신성력과 함께 이동하는 생명력이 훤히 보였다.

아마 저대로 전투가 오래 지속된다면, 약한 놈들부터 하나씩 나가떨어지고 말 것이다.

물론 생명력을 모조리 빨려 수명이 몇 시간도 남지 않은 노인이 되어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싸움에 끼어들 마음은 없었다.

오늘은 전투력을 시험해 보려고 레니를 내보낸 거였으니까.

"레니, 얼른 처리해라. 죽이지는 말고."

―웅. 주인님.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소녀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궁극의 은신 기술인 사령보를 펼친 것이다.

죽은 영혼이 움직이는 것처럼 레니의 육신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베네딕토는 당황한 얼굴로 살짝 뒷걸음질 쳤다.

혹시나 사라진 소녀가 동료들을 공격할까 싶어서 그런 행동을 했지만, 오히려 그게 패착이었다.

상대의 행동에 위화감을 느낀 레니가 신성력 전이술의 비밀을 어렴풋이 파악해 버리고 만 것이다.

스슥―!

어느새 검은 머리 소녀는 베네딕토의 뒤편으로 돌아가 결사단을 향해서 질주하고 있었다.

"이런!"

그 모습을 확인한 베네딕토는 대경하며 잽싸게 반대편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형제들에게 쇄도하던 레니의 신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얘들이 약점. 맞지?

봉인의 후유증으로 기억과 사고 능력에 제한이 걸렸지만, 전투 지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싸우는 데 있어서 레니는 웬만한 헌터들을 아득히 뛰어넘는 감각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베네딕토의 발걸음만 보고도 어떤 약점이 있는지 파악해 버렸다.

놀랍도록 예민한 감각과 엄청난 재능이었다.

쉬쉭―!

"헉!"

베네딕토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발걸음을 멈추는 순간, 레니는 결사단의 뒤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재빠른 움직임으로 성기사의 하복부를 간결하게 찔렀다.

그녀의 손속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죽이지 말라고만 했지, 상처를 입히는 것까지 금하지는 않았으니까.

"멈춰라!"

분노한 베네딕토가 맹렬하게 달려오는 동안, 레니는 여섯 명의 결사단을 더 쓰러뜨렸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후우웅!

가까이 다가온 베네딕토가 백광을 흩뿌리는 검을 휘둘렀으나, 이미 그녀는 그곳에서 빠져나간 뒤였다.

다크 엘프 최후의 암살자답게 놀랍도록 빠르고 정교한 유격전이었다.

―역시 느리네.

"크윽!"

원래 있던 자리에 불쑥 나타난 레니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베네딕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모욕을 당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게 신성력을 몰아주느라 희생한 동료들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생명력까지 받고도 지켜 줄 수 없었던 현실에서 오는 자괴감이 뇌리를 덮쳐왔다.

하지만 베네딕토는 금방 마음을 다잡고 검을 고쳐 쥐었다.

결사단에 가담하여 신성력 전이술을 익히면서 얼마나 많은 번뇌를 겪었던가.

대의를 위해서 이 정도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베네딕토 자신도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목숨을 내놓고 임무에 임하는 중이었으니까.

"봐주지 않겠다. 정정당당하게 덤벼라!"

―그래.

쉬이이익! 카강!

동료들을 먼저 노리던 레니는 난데없이 정면 대결을 시도했다.

그러자 베네딕토는 반색하며 빛나는 검을 자신 있게 휘둘렀다.

하지만 그녀의 암청색 무기를 손쉽게 무력화할 수 있었던 이전과는 달리,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푸―캉!

"크으윽!"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빛의 검이 레니의 무기와 만나는 순간, 베네딕토는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뒤로 튕겨 나갔다.

"이, 이럴 수가……."

원인은 간단했다.

총 일곱 명의 결사단이 쓰러져서 자신에게 전달되던 신성력이 4할가량이나 줄어든 탓이었다.

베네딕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부러진 검을 바라보았다.

단 한 번의 격돌이었지만, 9인의 결사단은 레니를 넘어설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런 녀석을 천진난만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본 순간, 베네딕토는 상대가 방심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푹 떨군 채, 눈을 치켜떴던 녀석은 레니가 다가오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다가 그녀가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번개처럼 검을 위로 강하게 올려 쳤다.

스윽! 푸욱―!

하지만 비열함을 탑재한 회심의 일격은 레니의 간단한 움직임에 무력화되고 말았다.

살짝 고개를 틀어서 공격을 피한 그녀는 무심하게 암청색 무기를 들이밀었다.

어느새 레니의 델레오 아르마는 길쭉한 장창으로 변해 베네딕토의 복부에 쑤셔박히고 있었다.

털썩! 투두두둑!

그러자 작게 기도문을 읊던 8인의 결사단 요원들이 베네딕토와 함께 우르르 쓰러져 버렸다.

이윽고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쫄래쫄래 걸어가더니, 검은 하드 케이스를 유진의 앞으로 가져왔다.

―다했어.

"잘했다. 일 처리가 마음에 드는구나."

부스럭!

레니가 전시영에게서 받은 초콜릿을 까먹는 동안, 그는 하드 케이스의 잠금장치로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치지지직!

아니나 다를까, 손끝이 금속에 닿자마자 강력한 뇌전이 흘러서 접근을 방해했다.

가방에 별다른 전기 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 거로 봐선 이것도 아이템인 것 같았다.

‘확실하군.’

아크웰이 말했던 가방임을 확신한 블라드 유진은 곧장 소수혈인을 일으켰다.

콰칭―!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는 모르나, 고작 이런 조잡한 아이템으로 마기의 결정체를 버틸 수는 없었다.

손쉽게 잠금장치를 갈라 버린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가방을 열었다.

한데, 공허하기만 하던 유진의 눈에 순간적으로 이채가 흘렀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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