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독일 총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던 블라드 유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드리드에 머물렀다.
그렇게 사흘이 흐르자, 아크웰은 점점 더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알아서 한다는 그를 독촉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녀석은 발만 동동 구르며 교황청의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문득 그런 아크웰의 귓가로 절제된 미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키가 큰 백금발의 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죠?"
"아! 루시아 님. 반갑습니다. 저는 그냥 뭐, 기다릴 뿐이죠."
"교황청에서 명령이 내려왔는데, 유진 님께서 안 가고 계신다고요?"
"예. 이제껏 명령을 거부한 적이 없으신데, 이상한 일이네요."
녀석의 말대로 블라드 유진은 파죽지세로 대규모 미궁과 대성체 미궁, 미궁 군체를 빠르게 정화했다.
길을 뚫느라 하루에 서너 개의 미궁을 정화할 정도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면서, 단 한 번도 쉬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보여 주었다.
그런 그가 일주일이 넘도록 교황의 명령을 뭉개고 있다는 건,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여기서 무한정 대기만 하는 건가요?"
"네, 제가 뭐 힘이 있나요."
"그냥 교황청에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보시죠.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나을 텐데요."
"아하하!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자리를 비우는 건 힘듭니다."
아크웰은 대충 대답을 얼버무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고대 뱀파이어를 감시하고 제어하기 위해서 이곳에 머무른다는 사실을 발설할 수는 없었으니까.
루시아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녀석을 지나쳐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곧장 2층으로 올라가서 방문을 두드리자, 감정 없는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가니, 블라드 유진이 소파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탁자에 펼쳐진 건 얼마 전 프랑스에서 발간된 주간 신문이었다.
스페인 진공 작전에 관해서 자신의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음에도 그의 표정은 별 변화가 없었다.
그저 슬쩍 훑어보고는 다음 장으로 넘길 뿐이었다.
"잘 지내셨나요? 유진 님."
"바쁘지 않나?"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네 보았지만, 돌아온 건 왜 찾아왔냐는 듯한 질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시아는 마드리드를 정상화하고 주변의 성체 미궁을 정화하느라 바빠 죽을 지경이었다.
힘에 부치는 정화 작업은 유진이 도와주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거의 공략대를 운용하는 편이었다.
이제 미궁 군체가 사라짐으로써 마기의 영향력이 확 꺾였으니까.
전시영의 도움만으로도 마드리드 주변의 정리는 충분했다.
"바쁘긴 하지만, 저도 사람이라 쉬는 날이 필요합니다."
"쉬는 날? 그러고 보니 오늘은 옷이 좀 다르군."
루시아는 뇌신의 흉장 대신, 단정한 느낌의 밝은 재킷에 바이크 쇼츠를 입고 있었다.
상의는 언뜻 정장 같긴 한데, 하의는 딱 달라붙는 재질이라 몸매의 굴곡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런 믹스 매치가 묘한 매력을 불러일으켰다.
유진이 옷에 관해서 이야기하자, 그녀는 살포시 웃으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잘 어울리나요?"
재킷이 뒤로 빠지며 탄탄한 몸매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지만, 그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런 듯하군."
"에이. 자세히 좀 봐 봐요."
괜히 포즈를 잡으며 재킷을 살짝 털자, 묘한 꽃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답답한 은빛 갑옷에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돌아다니던 평소와는 달리, 어디서 구했는지 오늘은 향수까지 뿌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대답은 유진에게서가 아니라,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슉!
―별로야.
소파 그림자에서 뭔가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뇌리에 시무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령보로 그의 근처에 숨어 있던 레니가 갑자기 말을 건 것이다.
루시아는 이 검은 머리 소녀가 블라드 유진의 동반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는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어색하게 대답했다.
"하하. 레니, 스킬 해방석 고마워."
―언니, 별로야.
"내가 왜 별로일까?"
―안 왔어.
"아……. 그건 내가 좀 바빠서 말이지."
―흥.
스윽!
과장스럽게 콧방귀를 뀐 레니는 곧장 그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 버렸다.
루시아로서는 소녀의 종적을 따라잡을 수가 없기에, 입만 벙끗하며 머쓱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그러자 유진은 그런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질문을 던졌다.
삐친 레니를 풀어 주는 일에 도움을 줄 마음은 전혀 없어 보였다.
"찾아온 이유나 좀 들어보지. 그냥 쉬러 온 건 아닌 듯한데."
"아, 네. 포르투갈에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에스파냐 임정을 통해서 유진 님과 접촉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요즘 찾는 사람이 많군. 독일에서도 왔던데."
"그럴 수밖에요. 다들 에스파냐처럼 국토를 되찾고 싶어 하니까요. 그런데 벌써 누군가가 접촉했나요?"
"일주일 전에. 독일 총리."
"베른트 폰 마이어로군요. 에스파냐 진공 작전을 보고 한창 달아올랐을 겁니다. 독일도 일주일 전의 프랑스처럼 나라 절반이 오염 지대거든요."
독일 북부와 동부에 두 개의 전선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미량의 흡혈로 총리의 기억을 일부분 훔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독일을 도와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베른트 폰 마이어는 그가 혹할 만한 조건을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것은 그저 돈.
뱀파이어에게 하등 쓸모없는 것을 제시하기에, 그는 베른트를 가차 없이 돌려보냈다.
아마 그자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를 터였다.
"포르투갈은 뭘 줄 수 있다고 하던가."
"거기도 저희랑 비슷한 상황이라, 금전적 지원은 거의 해 줄 수가 없대요. 대신에 이런 걸 가져왔어요."
루시아는 매우 오래되어 보이는 납작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보라색 벨벳에 휩싸인 상자에서는 희미한 라벤더 향이 났다.
정확하게는 낡은 상자가 아니라, 벨벳에 뿌린 탈취제의 냄새였다.
유진은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하며 무신경하게 상자를 열어 보았다.
달칵!
그 안에는 정체불명의 금속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것이 독특하기는 했어도 그렇게 가치 있는 물건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굳이 그녀에게 되묻지 않고 말없이 쇳덩이를 들어 올렸다.
이 물건의 가치는 홀로그램 글귀가 알아서 알려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이템 정보>
명칭 : 천상계 금속 덩어리
등급 : ???
내구도 : SS
효과 : ???
모종의 이유로 천상계에서 떨어진 금속 덩어리. 어디에 쓰는지 전혀 알 수 없으며, 미약하게 마기를 밀어내는 성질을 지님.
"천상계?"
이 단어가 순간적으로 유진의 시선을 잡아끌었지만, 사실 그 외에 별달리 쓸 만한 정보는 없었다.
오히려 베일에 싸인 계시록보다도 더욱 불친절한 설명이었다.
잘 쳐줘 봐야 제작 재료로밖에 안 보여서, 그리 엄청난 물건은 아닌 듯했다.
제작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닌 데다가, 그는 사실상 아이템이 크게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독일 총리처럼 천편일률적인 제안보다는 이게 훨씬 나아 보였다.
"네가 조언해 줬나?"
"예?"
"변명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얼굴에 다 써 있으니까."
"사실……. 돈은 별로 필요치 않은 분이니, 희귀한 아이템이 있으면 내놓으라고 하긴 했습니다. 이런 걸 가져올 줄은 몰랐지만요."
"그래도 나름 흥미로운 제안이었어."
"그럼 수락하시는 건가요?"
루시아가 약간 기대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유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거로는 부족하군요."
"그렇기도 하지만, 지금은 일이 좀 있어서. 슬슬 먹잇감들이 도착할 때가 되었거든."
"예?"
"레니와 함께 한 바퀴 돌고 오지."
블라드 유진은 그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가 버렸다.
절반쯤 남은 식은 커피만이 탁자에 루시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문득 그녀는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스타일은 별로인가 보네."
루시아는 그가 탁자에 남겨 둔 커피잔을 치우려고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휙!
잽싸게 옆으로 몸을 피하자, 난데없이 시퍼런 물체가 허공을 휩쓸고 지나갔다.
쿠화아아아!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전시영이 양손에서 시퍼런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루시아는 그런 전시영을 향해서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윽! 뭐 하는 겁니까?"
"그러는 너는 그런 차림으로 여기서 뭐 하는 건데?"
"아, 이건 그냥 패션이죠. 옷도 내 마음대로 못 입나요?"
"흐흐흐."
덜컥!
전시영은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방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모로 한 번씩 꺾어서 섬뜩한 뼈 소리를 냈다.
뚝! 뚝!
"제대로 해명 안 하면, 너 여기서 못 나가."
아무래도 이 여자가 정말로 미친 것 같았다.
전시영이 이러는 이유를 잘 알았기에, 루시아는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양손을 펼쳐 보일 뿐이었다.
"타임."
"개소리하네!"
쿠화아아아!
* * *
로마 피우미치노에서 오르베텔로까지는 대략 130km.
결사단은 이 거리를 오직 도보로만 이동해야 했다.
교황의 명령으로 이탈리아 교외의 모든 도로에 검문소와 성자들이 쫙 깔렸기 때문이었다.
형제들은 오로지 야간에만, 그것도 멀쩡한 도로를 놔두고 최대한 으슥한 곳만 찾아서 조심조심 걸었다.
"휴! 거의 다 왔습니다."
"오늘이 접선 날짜 맞습니까? 베네딕토 형제."
"그렇습니다. 정확히 열흘 걸렸군요."
도로를 따라 쉬지 않고 걸으면 28시간 정도 되는 거리를 결사단은 10일에 걸쳐서 이동했다.
그만큼 철저한 기밀을 요구하는 작전이기 때문이었다.
오르베텔로 동쪽의 넓은 숲에서 숨죽이고 기다리자, 일정한 리듬의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퉁퉁! 투두둥!
다섯 번의 울림 뒤에는 한참 동안 적막만이 밤하늘을 채웠다.
수풀에 은신한 결사단 형제들은 다음번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한 10분쯤 지나자 예의 그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퉁퉁! 투두둥!
결사단은 그제야 형제들이 도착했음을 확신하고, 수풀에서 일어나며 모습을 드러냈다.
"베네딕토 형제!"
"정말 오랜만이군. 도미니코."
도미니코라 불린 남자는 허름한 차림을 하고 등에 큼지막한 더플백을 메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집시 정도로만 보일 뿐이지, 결사단의 요원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베네딕토는 곧장 더플백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물건은 어떻게 되었나?"
"보자마자 물건부터 찾다니, 조금 섭섭하군. 하긴 이게 그만큼 중요한 일이긴 하지. 잘 가져왔다네. 확인해 보게."
도미니코라 불린 매부리코의 남자는 더플백은 내리지 않고 슬쩍 옆으로 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반대쪽 수풀이 흔들리더니, 덩치가 작은 남자가 슬그머니 나오는 게 아닌가.
"혹시나 걸릴 것을 대비하여 위장해 두었지. 우린 그냥 미끼일세."
"잘했군. 그럼 이게 그 물건인가?"
"그렇다네."
왜소한 체구의 남자는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검은색 하드 케이스를 꺼냈다.
베네딕토는 정교한 금색 십자가를 확인하고, 손으로 잠금장치를 만져 보았다.
찌릿!
그러자 짜릿한 느낌과 함께 잠금장치에서 손이 절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뭔가 특별한 함정이라도 설치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확실하군. 그럼 우린 여기서……."
하드 케이스를 들고 몸을 일으키려던 베네딕토는 순간적으로 굳고 말았다.
자신의 눈앞에 암청색 칼날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응이 느리네.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