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블라드 유진의 눈앞에는 아크웰이 서 있었다.
녀석의 뒤편으로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도 보였는데, 그를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스페인 임정에서 붙여 준 기사입니다. 프랑스 전선에서 이곳까지 데리고 와 주셨죠."
"의외로 빨리 찾아왔군."
"그럴 수밖에 없었거든요."
"왜지?"
"그야……. 유진 님께서 또 엄청난 일을 해내셨으니까요. 아주 그냥 난리가 났습니다."
스페인 진공 작전이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두자, 각국의 정상들은 유진과 접촉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오염 지역을 넘나드는 그와 직접 대면할 수는 없었으니, 차선책을 써야만 했다.
"교황청을 공략하기 시작했겠군."
"당연히 온갖 로비를…….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미 공공연한 비밀 아닌가. 한국에서도 그렇게 알고 있을 텐데."
"하긴 드라코 도무스가 공략된 이후로 관심도가 무지하게 증가했죠."
"교황청에서 내려온 명령은?"
블라드 유진은 계시록으로 시선을 돌리며 무심하게 말했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에 아크웰은 속으로 뜨끔하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이 마드리드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이유가 바로 교황청의 명령 때문이었으니까.
"짐작만으로 다 알고 계시니, 맥이 다 풀리는군요."
"잡설이 길다."
"아, 넵!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 하실 일은 물건 탈환입니다."
"물건 탈환?"
"네, 교황청에서 관리하는 중요한 물건 하나가 탈취당했습니다. 바티칸 시국으로 이동하던 중 페루자 인근에서 사건이 벌어졌다네요."
그는 고개를 살짝 모로 돌리며 아크웰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매우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녀석도 그 사실을 아는 모양인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말을 이었다.
"저도 어떤 물건인지는 모릅니다. 대신 특징을 좀 받아 왔죠."
아크웰은 품속에서 두 장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
꽤 큼지막한 검은색 하드 케이스의 위아래를 찍은 사진이었다.
상판에는 교황청의 물건임을 나타내듯, 금색 십자가가 양각되어 있었다.
케이스의 양쪽 측면에는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형태의 잠금장치가 보였다.
물론 이 시대에 저런 방식은 별로 신뢰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저 정도는 웬만한 헌터라면 맨손으로 부숴 버릴 수 있을 테니까.
"내용물은 상관없이 이렇게 생긴 하드 케이스만 가져오면 됩니다."
"똑같은 게 여러 개면 어떡하지?"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라던데요. 이 케이스는 보호받고 있어서 함부로 열 수가 없답니다."
"힘으로 열리지 않는 걸 가져다주면 되는 건가. 간단하군."
블라드 유진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왠지 조롱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신의 힘으로 열리지 않는 가방 따위는 존재치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눈치 빠르게도 그 사실을 알아챈 아크웰은 얼른 바꾸어 말했다.
"물론 못 여는 가방 같은 게 있겠습니까? 다른 가방보다 좀 더 열기 힘들다는 거겠죠. 하하!"
"임무 하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음 걸 가져오는군."
"그, 그렇네요?"
아직 대규모 미궁을 정화하라는 명령은 절반도 완수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교황은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바티칸 시국 근처에 왔을 때 어떻게든 써먹을 작정인 모양이었다.
‘최근에는 교황의 목소리가 커졌을 텐데, 이런 일에까지 날 불러들여야 하는 이유가 있나?’
유진이 한국과 스페인에서 승승장구함에 따라, 교황의 위상도 함께 높아지는 추세였다.
그가 안드레아 교황의 명을 받아서 움직이는 자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는 직접 명령서를 받은 교황청 외교관 아크웰이 따라붙은 거로 정확하게 증명되었다.
그런데도 이리도 급한 임무 전달이라니,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 건 확실했다.
‘내부에서 무슨 문제라도 생긴 모양이로군. 이참에 좀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블라드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추적 방법은?"
"이건 습격자들의 예상 도주 경로입니다. 이탈리아에 요청하여 도로를 봉쇄해 두었으니, 도보로밖에 이동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럼 시간은 넉넉하겠군."
"그래도 일찍 찾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교황을 직접 만났나?"
"아뇨. 그냥 전언을 들었습니다만."
"그렇군."
거기까지 말을 마친 아크웰은 품속에서 또 종이를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출발지와 도착지가 적힌 네모난 비행기 표였다.
"리옹에서 레오나르도다빈치 공항까지 가는 비행기입니다. 내일 출발이니, 지금 차를 타고 올라가면 딱 맞을 겁니다."
"아직은 출발할 마음이 없는데."
"예?"
"임무는 받아들이겠지만, 이동 수단은 알아서 구할 거야. 할 말 끝났으면 가 봐."
탁! 팔랑!
유진은 비행기 표를 손가락으로 튕겨서 다시 되돌려 보냈다.
그러자 놀랍게도 종이가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 녀석의 손에 정확히 떨어졌다.
소름 끼치도록 놀라운 힘 조절이었지만, 아크웰의 관심은 비행기 표에 있지 않았다.
"그, 그럼 출발은 언제 하실 건데요?"
"내가 가고 싶을 때."
"이러다 영영 물건을 못 찾으면 어떡합니까?"
"그거야 교황 사정이지. 오늘따라 잡설이 참 길군."
그가 스산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녀석은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어느새 아크웰은 유진을 향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교황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공포를 잊어버리고야 말았다.
"죄, 죄송합니다."
"넌 가고 저기서 쭈뼛거리는 사람이나 불러와."
"아……. 알고 계셨습니까?"
"저렇게 인기척을 내는데 모를 리가 있나."
"그럼 불러오겠습니다."
녀석은 잽싸게 달려가서 자신이 타고 온 차량 뒤에서 어슬렁거리던 사람을 데려왔다.
그러고는 곧장 운전기사 근처로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콧수염을 깔끔하게 모양낸 중년 신사는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실로 오랜만에 들어 보는 독일어였다.
‘내가 알고 있는 게 너무 구식이라, 알아듣기가 좀 힘들군.’
블라드 유진은 오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을 세우기 이전, 독일 왕국에서도 활동한 적이 있었다.
그때가 대략 10세기 초였으니, 그가 알고 있는 건 고(古)고지 독일어에 해당했다.
현대와 무려 세 번에 걸친 시대 변화가 있었기에, 아예 다른 언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반갑군."
유진은 영어로 답하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중년 신사도 웃으며 손을 가볍게 붙잡고 흔들어 주었다.
어느새 그의 손이 투명할 정도로 새하얗게 변한 줄도 모르고.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을 테고, 소개나 하지."
"독일어가 상당히 유창하시군요. 하하! 의사소통이 쉽겠습니다. 저는 베른트 폰 마이어입니다. 현직 독일 총리를 맡고 있죠."
찰나의 순간 블라드 유진은 상대의 혈액 일부를 뽑아내어 언어와 관련된 기억을 읽어 냈다.
덕분에 현대 독일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블라드 유진."
"허허! 세계에서 유진 님의 위명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혼자서 그 많은 미궁을 정화한 분이신데요."
베른트 총리는 독일인답지 않게 시종일관 유쾌한 웃음을 흘렸다.
눈치채지 못하게 피를 극미량만 흡수했으나, 그는 언어뿐만 아니라 상대의 기억 일부도 읽은 상태였다.
‘정치인의 가면인가. 웃음과 농담 속에 자신을 감추는 자라……. 재밌군.’
독일 정세와 베른트의 속내를 얼추 간파한 유진은 팔짱을 낀 채, 흔들의자를 살짝 밀었다.
일국의 총리가 단신으로 찾아왔건만, 자리 따위는 권하지 않았다.
대신에 나직한 목소리로 상대가 가지고 온 요구 사항을 까발려 버렸다.
"원하는 게 북부인가, 동부인가."
"……."
정곡을 찔린 모양인지, 베른트 총리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이윽고 베른트의 입에서 한숨과 같은 대답이 나왔다.
"동부……. 입니다."
"대가는?"
"뭘 원하십니까?"
힘겹게 기어 나온 말에 블라드 유진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건 앞으로 당신이 알아 와야겠군.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거든."
* * *
어두컴컴한 밀실, 회색 갑옷을 입은 남자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비장한 표정을 하고는 양손을 탁자 위에 올려 둔 상태였다.
원탁의 분위기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중 머리카락과 수염이 전부 하얗게 센 노인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아직도 소식이 없소?"
"예, 단장님."
노인의 정체는 교황청 성기사단장 안토니오.
원탁회의를 관장하는 최고 책임자이자, 교황과의 대립각을 세우는 성기사 무리의 영수(領袖)였다.
아무래도 바티칸 시국 내부에서 모이는 건 불가능했기에, 성기사단은 이탈리아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로마 남부 교외의 어촌인 피우미치노에 은신처를 마련한 안토니오는 굳은 표정으로 손등을 두드렸다.
틱! 틱!
건틀릿의 금속이 부딪치며 청명한 소리가 나자, 기사단원들의 초조함이 더욱 깊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좀 더 둔탁한 금속음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둥! 두둥!
누군가가 은신처 입구의 문고리를 살짝 들었다가 놓는 소리였다.
성기사 한 명이 입구로 나가서 문을 열어 주자, 회색 갑옷을 검은 로브로 가린 남자가 들어왔다.
척!
남자는 원탁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나직이 말했다.
"임무……. 완수했습니다."
"물건은 어디에 있나. 베네딕토 형제여."
"페루자에서 이곳으로 오는 중입니다. 1차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교황청 성자들을 피해서 오르베텔로 쪽으로 우회하고 있습니다."
"오! 잘했군. 고생이 많았다."
안토니오는 드디어 긴장한 표정을 풀고 웃으며 베네딕토의 손을 잡아 주었다.
"대업을 위해서 움직였을 뿐입니다. 이제 시작이지요."
"그렇지. 첫걸음을 뗀 거로 너무 기뻐해서는 안 될 말이야. 그래도 마음이 좀 놓이는 건 어쩔 수 없구먼. 다음 작전도 잘 부탁하네."
"예."
성기사단은 교황청이 운송 중인 물건을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멀쩡히 잘 있던 바티칸 시국의 물건을 옮기라고 지시한 교황은 역풍을 면치 못할 터였다.
이로써 안드레아 교황의 이미지에 흠집을 내고, 입지를 축소하기 위한 사전 준비가 모두 끝났다.
"이제 다음 계획을 실행할 때로군."
"명령만 내려 주시면, 형제들이 움직일 겁니다."
"한데, 스페인을 탈환했다던 자는 어떻게 되었지?"
"일단은 마드리드에 머무르는 중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심히 거슬리는군."
안토니오 기사단장은 미간을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톡! 톡!
교황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는 대규모 미궁 박멸자.
내부의 알력 싸움에서 그자는 엄청난 변수가 되고 있었다.
대중에게는 마치 안드레아 교황이 진공 작전을 주도한 것처럼 비추어졌기 때문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교황의 입지가 상승하고 있었기에, 안토니오의 근심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베네딕토가 고생을 해 줘야겠군. 오르베텔로로 가서 형제들을 지원하게."
"물론입니다. 결사단 중에서 알려지지 않은 인사는 저뿐이니까요."
"매번 위험한 임무만 시켜서 미안하구먼."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항상 고맙네."
"별말씀을."
반듯하게 생긴 흑발의 청년 베네딕토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안토니오는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꼭 살아서 돌아오길 빌지."
"결사단을 위하여!"
가슴에 손을 얹은 베네딕토가 은신처를 나서자, 기사단장의 표정이 다시금 굳어졌다.
이윽고 안토니오의 입에서 용암처럼 끓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드레아 교황, 우리도 이제 당신의 방식대로 싸우기로 했소. 결단코 뜻대로 교황청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을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