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40화 (41/226)

15화

"이게 최종 보스라고? 그냥 애잖아?"

전시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레니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귀만 뾰족할 뿐이지 예쁘장한 소녀의 모습이라, 미궁의 최종 보스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루시아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마기가 느껴집니다. 안전하다는 말씀, 확실한 겁니까?"

꿈틀거리는 미세한 마기를 느낀 듯, 루시아는 상당히 경계하는 행태를 보였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레니는 엄청난 덩치의 최종 보스들이 미궁을 버리고 도망치게 한 장본인이었으니까.

체내에 존재하는 마기 때문에,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연결된 대성체 미궁에서 이 소녀가 최종 보스를 죽이고 다녔기에 그 난리가 일어난 거 아닌가.

결과론적이지만, 레니는 마드리드를 이 꼴로 만든 원흉이나 다름없었다.

"생각해 보니까 좀 무섭긴 하네. 얘, 은신 능력이 엄청나던데……."

신출귀몰한 암살자가 사람들을 죽이고 다닐 걸 생각하니, 전시영 또한 절로 몸서리를 치고 말았다.

하지만 유진은 레니가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동반자 정보에 올라왔다는 건, 녹턴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배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뜻하니까.

"그럴 리는 없다. 내가 거뒀으니까."

"거뒀다는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해할 필요가 있나?"

"……."

간혹 미궁의 보상 중에서는 동반자를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 존재했다.

그가 연옥 입장권을 통해서 유령 군마를 얻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최종 보스를 직접 동반자로 만드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거뒀다는 말을 한 자는 다름 아닌 블라드 유진이었다.

혼자서 마드리드까지 길을 뚫고 미궁 군체를 정화한 세계 최고의 헌터가 아니었던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을 성공시킨 그라면, 최종 보스를 동반자로 만드는 것쯤은 쉬울 것 같았다.

전시영과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필요가 없음은 물론이고, 유진에게 해명을 요구할 자격조차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좀 쉬고 싶군."

"적당한 장소를 알아보겠습니다."

그다지 휴식이 필요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혼자만의 시간을 원했다.

이제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 계시록도 살펴보고, 앞으로의 행보도 고심할 요량이었다.

그러자 루시아는 마드리드 전 지역을 뒤져서 가장 멀쩡한 건물을 찾아냈다.

물론 이곳까지 밀고 들어온 후발대를 동원하여 순식간에 정리까지 마쳤다.

무려 10년이 넘도록 버려진 채 마기에 노출되었지만, 2층짜리 단독 주택은 새것처럼 깔끔해 보였다.

"와! 고작 반나절 만에 이게 돼?"

전시영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주택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삭아 버린 가구는 다 버렸으나, 군용 비품을 채워 넣자 얼추 사람 사는 느낌이 나기는 했다.

자신을 최우선으로 신경 써 주는 루시아의 모습에 유진은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무릇 사람이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른 법인데, 이전의 절박함을 잊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건물이 어떻게 되었든 아늑한 관 하나만 있으면 만족했지만.

어쨌거나 이런 호사를 누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그 꼬마는 어디 갔어? 아까는 분명히 이 근처에 있었는데?"

집을 한 바퀴 구경하고 온 전시영은 어느새 사라져 버린 레니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굳이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루시아는 불안한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자신이 앉아 있는 흔들의자의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그림자밖에 없었던지라,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데, 문득 블라드 유진의 그림자 속에서 뭔가가 고개를 내미는 게 아닌가.

어느샌가 작은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의 소녀가 불쑥 나타나 있었다.

"오! 그림자 속에 숨을 수 있다니, 대단한 능력이네."

전시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수줍게 살짝 튀어나온 레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경계하던 소녀의 표정이 사르르 풀리는 게 아닌가.

―나 대단해?

"얘 말도 할 줄 아는데?"

전시영은 미묘한 불신을 떨치지 못한 루시아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 소녀가 진짜로 위험한 몬스터라면, 인간과 소통할 리가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루시아도 레니의 텔레파시를 받은 모양인지, 그래도 살짝 표정이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자리를 좀 비워 줬으면 좋겠군. 읽는 데 방해돼."

그러거나 말거나 블라드 유진은 계시록을 살짝 흔들며 축객령을 내렸다.

그의 마음을 읽은 레니는 곧장 그림자에서 빠져나와 전시영의 뒤를 따랐다.

먼저 호의를 보여 준 그녀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루시아는 유진을 향해서 살짝 고개를 숙인 뒤, 정원을 비워 주었다.

"이거 먹어 볼래?"

―그게 뭔데?

"파운드케이크라고 빵이야. 음……. 이건 군용이네."

―줘.

집으로 들어온 전시영은 스페인 임시 정부에서 지원해 준 식량을 뜯어서 레니에게 먹여 주었다.

단순한 언어 전달밖에 못 해서 그런지, 겉보기보다 더 어리게 느껴졌다.

루시아가 탐탁지 않아 해서, 괜히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당신은 참 속도 좋네요. 한국이 아니라서 밑질 거 없다 이겁니까?"

"뭐 어때? 어쨌거나 그냥 애잖아. 지금은 별로 위험하지도 않은 것 같고."

"걸레짝이 되어서 돌아다니던 최종 보스들을 보고도 그래요?"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게다가 유진이 괜찮다고 했으면 끝 아니야?"

"……."

전시영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일침을 가하자, 루시아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으니까.

그런데 문득 발걸음을 옮긴 레니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손에 쥔 파운드케이크를 내밀었다.

―먹으면 행복해.

"필요 없습니다."

나름 화해하자는 의미로 손을 내민 것일 텐데, 루시아의 입에서는 딱딱한 대답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말을 해 놓고 보니,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민망함이 몰려왔다.

작달막한 소녀가 오히려 어른스러웠고, 자신은 마음속의 불편함을 참지 못한 어린아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거 가져.

스윽!

그러나 레니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품속에서 작고 예쁜 돌멩이를 꺼내 루시아의 손에 쥐여 주었다.

손에 분홍빛 돌멩이가 닿자, 문득 홀로그램 글귀가 불쑥 떠올라 그녀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블라드 유진의 동반자 ‘다크 엘프 최후의 암살자 레니’가 처치 보상을 증여합니다.]

[성체 미궁의 최종 보스 ‘죽음을 몰고 다니는 괴인 투르피스’의 처치 보상을 획득했습니다.]

<아이템 정보>

명칭 : 스킬 해방석

등급 : S

내구도 : 일회용

효과 : 불굴의 광기 스킬 획득

‘죽음을 몰고 다니는 괴인 투르피스’의 시그니처 스킬을 익힐 수 있음.

"이게 대체 무슨……."

레니가 루시아에게 준 것은 스킬 해방석이라는 아이템이었다.

헌터들은 대부분 각성할 때 무작위로 스킬을 얻게 되어 있었다.

스킬마다 효과와 등급이 제각각이었기에, 시작하자마자 우열은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타인보다 부족한 스킬로 출발선에 섰다고 해서, 영원히 뒤처지는 건 아니었다.

스킬 해방석을 통해서 새로운 스킬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이건 왜 주는 거지?"

―선물.

"그러니까 선물을 왜……."

―필요해 보여.

그 말을 남긴 레니는 그대로 전시영에게로 돌아가며 파운드케이크를 한입 가득 집어넣었다.

조막만 한 얼굴에서 볼만 빵빵하게 부풀어 있자, 루시아의 입에서 웃음이 절로 비집고 나오려 했다.

분홍빛 스킬 해방석을 든 채 그러고 있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전시영이 썩은 미소를 지었다.

"와 이거 봐. 뭘 주고 나니까 마음이 확 풀리네. 완전 속물이야. 큭큭!"

"그런 거 아니거든요?"

소리를 빽 지른 루시아는 금방이라도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진 채, 황급히 현관을 통해 나가 버렸다.

전시영은 그런 그녀의 뒤에 대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야! 어디가?"

"사태 수습해야 해서 바쁩니다!"

어른들의 속사정이 어떻든 레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군용 간식을 마음껏 집어 먹었다.

여전히 볼이 빵빵하게 튀어나온 채로 오물거리는 모습은 귀엽기 그지없었다.

* * *

두 S급 헌터와 다크 엘프 하나가 아웅다웅하는 동안, 유진은 정원의 흔들의자에 앉아 계시록을 읽고 있었다.

‘몇 번을 봐도 흥미롭군.’

스페인 진공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그는 계시록을 틈날 때마다 정독했다.

그래서 내용은 이미 전부 꿰고 있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다시 한번 의미를 곱씹으며 책자에 새겨진 글귀를 되뇌어 보았다.

‘미궁을 일으킨 건 마족이다. 침략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구로 넘어오기 위한 발판을 만들기 위해서 마기를 거의 무한대로 투사하고 있다.’

계시록에 따르면 마족은 미궁의 몬스터보다 훨씬 상위의 종족.

인간 각성자의 힘만으로는 결단코 막을 수가 없다고 되어 있었다.

트리 페 디타스 같은 초월적인 괴물을 부릴 정도면, 엄청나게 강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놈들이 무수히 몰려든다면, 지구상의 생명체는 깡그리 지워질 터였다.

당연히 혈액을 주식으로 삼는 뱀파이어 또한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침공을 결심한 마족들이 마기를 다룬다는 이유로 그를 가만히 놔둘 리는 없었다.

‘계시록에 적힌 대로라면, 이것들을 막아 낼 방법은 천상계와 통하는 차원문을 여는 수밖에 없나.’

물론 거기까지 적혀 있지는 않았다.

천상계 파트에 해당하는 부분은 찢겨 나간 후반부였으니까.

하지만 유진은 뒤의 내용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다.

차원문을 열 수 있는 열쇠인 성배가 이미 그의 손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상계로 통하는 차원문을 열 생각은 아직 없었다.

이제껏 이 땅에서 신성력을 갖춘 존재는 뱀파이어를 말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일족의 모든 권능을 얻게 된 블라드 유진만은 도무지 죽일 수가 없어서 교황청 지하에 봉인했지만.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1천 년 전의 성기사단은 그를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렸을 터였다.

그들보다 더욱 강한 신성력을 지녔을 천상계의 존재는 유진에게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일단은 대규모 미궁이 먼저인가.’

유진의 봉인율은 53%에 달했다.

그 많은 대성체 미궁을 정화했음에도 이제는 더 이상 낮아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미국과 중국에 있다는 나머지 2대 미궁을 노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봉쇄 조치가 이루어진 두 나라에 접근하기란 쉽지 않다는 거였다.

혼자라면 녹턴을 타고 이동할 수 있겠지만, 대규모 미궁 공략을 단독으로 진행할 수는 없었다.

S급인 지금 상태로 삼두마룡 정도의 최종 보스를 단신으로 쓰러뜨리기는 어려울 테니까.

지금부터는 2대 미궁에 접근할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인 듯했다.

한창 사색에 빠져 있는데, 문득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여기 계셨군요. 찾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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