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39화 (40/226)

14화

‘말을 해?’

상대가 자신을 보며 이상한 소리를 했지만, 유진은 그보다 말을 했다는 것 자체에 관심을 두었다.

이곳은 마드리드 중심부의 미궁 군체 내부.

상식적으로 몬스터가 아닌 어떤 존재가 머무를 수 없는 장소였다.

더욱 놀라운 건 이 소녀가 최종 보스급 몬스터를 간단하게 때려잡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엄청난 수준의 암흑화를 선보이기까지 했다.

―말 안 통해. 이 방법 최고.

점입가경으로 초고도로 발달한 뱀파이어 로드의 정신 방어까지 뚫고 생각을 읽어 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아예 의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저 생각을 전하는 것 외에 다른 조작은 불가능했다.

그가 혈성쇄혼술을 쓰기만 해도 소녀와 연결된 가느다란 끈은 그대로 끊어져 버릴 터였다.

‘네가 최종 보스들을 죽이고 미궁 밖으로 쫓아냈나?’

―맛없는 거 치우고 맛있는 거 먹는다. 배고파.

그녀는 언어적 지능이 상당히 낮은 듯했다.

텔레파시 같은 거로 의지가 연결되어 있다면, 언어가 달라도 충분히 소통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소녀는 단편적인 단어의 조합만으로 문장을 만들었다.

게다가 몬스터를 먹는다는 둥,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보통의 생명체는 마기에 물든 몬스터 고기를 소화할 수 없으니, 적어도 인간은 아닌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군. 내가 맛있어 보인다는 놈이 없진 않았는데…….’

―맛있겠다.

쉬쉭!

다시 한번 맛있겠다는 말을 한 소녀는 좌우로 갈라지듯 불쑥 사라지더니, 그대로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정말이지 놀랍도록 은밀하고 빠른 움직임이라, 어둠의 군주라 불리는 그조차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정도였다.

스이잉! 카아앙!

순식간에 소수혈인을 뽑아낸 블라드 유진은 지척까지 다가온 무언가를 쳐 냈다.

그러자 그림자에서 불쑥 튀어나온 암청색 칼날이 소름 돋는 빛을 발하며 눈앞에 딱 멈췄다.

키기긱! 키기기긱!

소수혈인과 암청색 칼날은 한동안 힘겨루기하며 멈춘 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기 위해서 이글거렸다.

다섯 줄기의 핏빛 칼날이 강하게 압박했으나, 힘과 위력에서 우위를 점할 수는 없었다.

그저 백중세를 유지하며 각자 에너지를 소모하기만 할 뿐.

치잉―!

암청색 기운을 도무지 뚫을 수 없자, 그는 소수혈인을 하나로 합쳐서 위력을 강화했다.

그러자 팽팽한 각축전을 벌이던 기 싸움에 드디어 변화가 생겼다.

치지직! 치지지직!

하나가 된 붉은 칼날이 점점 우세를 점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데, 상대의 칼날을 절반 이상 잘랐을 때 블라드 유진의 눈에 살짝 이채가 서렸다.

스핑!

대뜸 왼손을 옆으로 펼친 소녀가 암청색 기운을 뽑아내더니, 그대로 복부를 찔러 왔기 때문이었다.

스치이잉! 쩌어엉!

기습적인 공격이었지만, 상대는 방어를 뚫지 못했다.

한 손이 자유로운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는 초장부터 소수혈인을 하나로 합쳐서 공격에 대응했다.

소녀의 체구는 상당히 작았고 팔은 가녀렸으나, 놀랍게도 완력은 웬만한 최종 보스 못지않았다.

유진과 마찬가지로 보유한 근육량을 뛰어넘는 뭔가가 체내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종족이 다르다든지.’

불꽃 튀는 접전 중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상대의 검은 머리칼 사이로 삐죽 나온 귓바퀴로 향했다.

독특한 모양새가 앞에서 아른거리니, 눈길이 안 갈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방심 따위는 하지 않았다.

치지직―!

소녀가 암청색 칼날을 비틀며 빈틈을 만들어 보려 했으나, 도무지 역부족이었다.

블라드 유진은 서릿발 같은 무표정을 유지한 채, 상대의 변칙 공격을 모조리 차단해 버렸다.

―이것도 막아? 그럴 리가 없는데……. 한 대 맞으면 다 죽었어. 그러니까 너도 얼른 밥이 돼.

‘싫다면?’

―어쩔 수 없어. 나 배고파.

콰―칭!

그녀는 양손의 칼날을 놓으며 뒤로 물러나더니, 그림자 속에서 새로운 암청색 기운을 뽑아냈다.

이번에는 칼날이 아니라, 큼지막한 낫의 형태였다.

상대에 따라서 무기의 모양을 바꿔 가며 활로를 모색하는 스타일인 듯했다.

쿠후우우웅!

큼지막한 암청색 낫이 휘둘러져 오는 모습은 사뭇 위협적이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원심력까지 더해졌기에 함부로 손을 댈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하나, 움직임이 크면 그만큼 빈틈도 많은 법.

그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는 순간, 소수혈인이 번득이며 나아가 의표를 찔렀다.

퍼석―!

그런데 붉은 칼날이 몸에 닿기 직전, 소녀의 모습이 이전처럼 좌우로 갈라지며 사라져 버렸다.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외통수에 걸렸다는 것을 깨닫고, 공격을 포기한 것이었다.

저 놀랍도록 빠르고 은밀한 암흑화를 써서 말이다.

‘암흑화와 발동 방식은 비슷하지만, 뭔가 다르다.’

블라드 유진은 혈성쇄혼술을 시전하여 상대와의 연결을 끊어 버렸다.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는 데다, 직관적인 움직임이 많아서 텔레파시가 전투에는 별 영향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생각이 소녀에게 흘러 들어가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어쨌거나 상대의 암흑화가 현재 자신의 것보다 미묘하게 뛰어난 건 사실이니까.

굳이 약점을 알려 주긴 싫었기에 이런 조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스슥―!

유진이 피의 권능을 끌어 올리며 주변을 살펴보는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상대가 불쑥 나타났다.

확실히 능동적으로 소녀의 위치를 파악하는 건 힘들 듯했다.

괜히 뒤쫓다가 역습을 당할 수도 있어서, 그는 되레 여유로운 표정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척! 움찔!

유진이 무심하게 발을 내딛자, 문득 상대의 동요가 느껴졌다.

어떤 식으로 공격하든 다 받아 내거나, 숨어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는 듯한 자신감의 발로(發露).

그의 생각까지 읽히지 않자, 소녀의 표정에 불안함이 역력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걸려들었다.’

상대가 자신의 허장성세에 말렸다는 사실을 알아챈 블라드 유진은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불현듯 멈춰 섰다.

그러고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피잉―!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자, 그의 손목에서 순간적으로 뭔가가 번득이는 게 아닌가.

그 빛은 소녀의 가슴팍에도 아주 잠깐 생성되었다.

[‘레이스 트래킹(B)’ 대상 지정에 성공했습니다.]

[앞으로 1시간 30분 동안 대상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종적을 완전히 놓쳤을 때 흔적 감별이 가능한 시간은 2분입니다.]

정확히 30m 거리에서 유진이 멈춰 선 이유는 상대에게 레이스 트래킹 스킬을 걸기 위해서였다.

대상을 지정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리고, 시전 중에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상대의 움직임을 묶어 두기 위해서 방금과 같은 허장성세를 보인 것이었다.

레이스 트래킹은 아직 B급 스킬에 불과해서 숨어 버린 상대를 정확히 찾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뱀파이어 로드의 예리한 감각이 더해진다면, 스킬 등급이 낮은 것쯤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느껴진다.’

종적조차 찾을 수 없던 소녀의 암흑화가 이제 어느 정도 기척을 감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왔다.

겉으로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전술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스슥!

유진은 이제까지의 수동적인 태도를 완전히 버리고, 드디어 선제공격을 날렸다.

암흑화를 시전함과 동시에 상대가 숨은 곳으로 이동하여 소수혈인을 거칠게 쑤셔 박았다.

쩌어어엉!

너무도 날카로운 공격에 상대는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그저 암청색 낫을 붉은 칼날과 맞부딪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콰아아아―!

하나로 합쳐진 소수혈인과 정면충돌한 대가는 썼다.

무시무시한 에너지의 파편이 휘날리며 주변의 미궁 구조물들을 그야말로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다.

한참을 뒤로 밀려나 잔뜩 일그러진 낫을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당연히 그런 강력한 공격을 직접 받아 낸 소녀의 손아귀가 정상일 리는 없었다.

주륵! 뚝! 뚝!

피부가 갈라지고 터진 곳에서 붉은 혈액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혈성쇄혼술로 인해서 끊어졌던 블라드 유진과의 텔레파시가 다시 연결되는 게 아닌가.

살짝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는데, 의외의 말소리가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너도 맛있겠구나.’

―에?

쉬쉭!

어느새 저만치 멀었던 유진의 신형은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소녀는 일그러진 낫을 버리고 황급히 암청색 기운을 뽑아냈다.

이번에는 짤막한 두 자루의 글라디우스가 튀어나와 그의 복부를 노렸다.

푸푹!

한데, 놀랍게도 블라드 유진은 상대의 공격에 전혀 방어하지 않았다.

복부는 그저 내어준 채로 투명한 양손을 뻗어서 맨살이 드러난 그녀의 팔뚝을 붙잡았다.

‘일족인지 아닌지는 확인해 보면 될 터.’

츠츠츠츠츠!

흡혈 스킬을 발동한 그는 흑요석처럼 새카만 눈을 번들거리며 체내로 들어온 혈액을 감별했다.

그러자 소녀의 내부에 잠들어 있던 거대한 마기가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정신 봉인을 유지하고 있던 정체불명의 마기를 흡수했습니다.]

[봉인 해제 효과로 흡혈 대상의 호감도가 극도로 증진됩니다.]

[상대를 동반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일정 이상의 혈액과 마기를 흡수하자, 이제껏 보지 못했던 글귀가 유진의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살짝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상대의 손아귀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복부에 박혀 있던 짤막한 암청색 칼날이 저절로 밖으로 빠져나왔다.

극도로 상승한 육신의 회복 능력 때문에, 체내 이물질이 순식간에 제거된 것이다.

털썩!

소녀의 몸이 기울어지며 유진의 품에 안김과 동시에, 두 자루의 글라디우스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상대의 어깨를 붙잡고 가만히 서 있던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정을 요구하는 홀로그램의 버튼을 가볍게 눌렀다.

[성체 미궁의 최종 보스 ‘다크 엘프 최후의 암살자 레니’가 동반자로 등록되었습니다.]

[봉인 후유증으로 레니의 기억과 사고 능력이 일부 제한됩니다.]

<동반자 정보>

명칭 : 레니

등급 : S+

효과 : 사령보(死靈步), 델레오 아르마(délĕo arma), 수납

다크 엘프 최후의 암살자. 그림자에 녹아들 듯 은신하는 게 가능하고, 동반자 정보창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음.

‘동반자로 받아들일 수 있다니, 일반적인 최종 보스와는 다른 녀석이다. 기억은……. 단편적이군.’

홀로그램 글귀에 나온 것처럼 레니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았다.

흡혈로 기억의 편린을 찾아보려 했으나, 어딘가에 숨겨진 것처럼 아무것도 건질 수가 없었다.

설명대로 봉인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었다.

쿠구구구구구!

아무래도 미궁 군체의 최종 보스는 이 소녀인 듯했다.

다른 녀석들을 잡았을 때와는 달리, 저 멀리서부터 미궁이 붕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스럭!

그런데 차원이 무너지는 굉음 사이에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자, 멀찍이 떨어져 있었던 전시영과 루시아가 다가와 있었다.

두 사람은 웬 소녀를 안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난 못 본 척할게. 하던 거 계속해."

"저, 저도요."

말하는 바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쓸데없는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물론 유진은 그들이 그러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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