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38화 (39/226)

13화

스윽! 척!

블라드 유진과 전시영, 루시아는 한곳에 뭉쳐 있는 육각 기둥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가장 중심의 미궁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아무래도 군체 외곽의 출입구로 들어가는 것보다 이편이 최종 보스와 더 가까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행의 기대와 결과는 정반대였다.

‘최종 보스의 마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어디로 들어오든 외곽에서 시작하는 모양이군.’

양산의 드라코 도무스 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희미한 마기만을 느낀 그는 살짝 실망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유진의 속내를 알 리 없는 두 S급 헌터는 긴장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근처에서 최종 보스가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적당한 긴장감은 전투에 유익하기에 그는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한데, 일행의 눈앞에 듣도 보도 못한 현상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쿨럭!"

털썩! 철푸덕!

상당한 덩치의 몬스터가 비틀거리며 걸어오더니, 피를 왈칵 토하고는 바닥에 쓰러졌다.

잠시 그렇게 쉬면서 육신을 회복하던 녀석은 일행이 들어왔던 육각 기둥을 통해서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물론 유진이 그런 몬스터를 가만히 놔둘 리는 없었다.

스이잉―! 슈칵! 푸확!

"크르르륵!"

암흑화로 놈의 뒤를 잡은 그는 곧장 붉은 칼날을 뽑아내서 뒷덜미를 연속으로 갈라 버렸다.

몬스터의 목이 워낙 두꺼웠기에, S급 소수혈인의 길이로는 두 번의 칼질을 해야만 했다.

최종 보스급의 육신은 엄청나게 질기고 강인할 터였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의 공격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마치 무슨 종이를 자르는 것처럼 몬스터의 육신을 간단히 썰어 버린 것이다.

쿵―!

[성체 미궁의 최종 보스 ‘혼돈의 트롤 군주 칼―곤’ 처치!]

[보상이 주어집니다.]

엉망진창인 녀석의 숨통을 그대로 끊어 버린 그는 순간적으로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분명 마드리드까지 길을 뚫은 건 유진이 최초였다.

전시영과 루시아를 비롯한 후발대가 오기 전까지는 이곳에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누가 최종 보스급 몬스터에게 이런 짓을 해 놓았단 말인가.

몬스터끼리는 서로를 공격하지 않으니, 헌터가 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상당히 이상하군요. 상식적으로 이런 일이 가능한가요?"

"그러게. 최종 보스가 만신창이가 된 채로 알아서 기어 나오다니 말이야."

"게다가 저놈을 죽였음에도 미궁은 아직 그대로예요."

루시아의 말대로 최종 보스를 쓰러뜨렸지만, 미궁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해답을 구하려는 듯이 유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수많은 미궁을 혼자서 정화한 그로서도 당장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지난번과는 달라.’

그는 파베레그에서 대성체 미궁이 분화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바 있었다.

그때는 분화한 개체가 곧장 마기를 고치처럼 둘러 새로운 성체 미궁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마치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최종 보스가 입구까지 기어 나왔다.

파베레그의 경우가 일반적인 분화라면, 아마도 미궁 군체는 뭔가 비정상적인 듯했다.

"일단 더 진행해 보는 수밖에 없겠군."

"잠시만요."

덜그럭! 척!

루시아는 빠르게 녹아드는 중인 칼―곤의 사체에서 보상을 찾아냈다.

그러나 뭔가를 손에 든 그녀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최종 보스를 잡은 보상이라는 게 고작 A급 에너지 코어 하나뿐이기 때문이었다.

"보상이 너무 적네요. 이상하지 않나요?"

"애걔? 고작 그것뿐이야? 미궁의 보상이 공헌도를 따지는 것도 아닐 텐데."

보상을 얻지 못한다면, 헌터들이 이 지옥 같은 미궁에 들어올 이유가 별로 없었다.

미궁 내부에서는 몬스터 부산물을 챙기는 게 여의치 않으니, 보상만이 거의 유일한 돈벌이였으니까.

"유진 님, 혹시 바깥의 최종 보스급 몬스터에게서도 보상이 거의 나오지 않았나요?"

루시아의 질문에 유진은 품속에 들어 있던 복주머니를 꺼내 내부를 확인해 보았다.

보상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서 그냥 잡히는 대로 집어넣었는데, 좋은 아이템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이 에너지 코어로군."

"그럼 이 미궁 군체에 보상이 극단적으로 적다는 말이 되는군요. 그전에는 어땠나요?"

"마드리드로 들어오면서부터 보상이 줄어든 것 같다. 이전에는 꼬박꼬박 아이템이 나왔으니까."

그의 대답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너지 코어를 내밀었다.

거의 다 죽어 가는 걸 막타만 쳤다지만, 블라드 유진이 잡은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필요 없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루시아의 곁을 지나쳤다.

"복주머니가 가득 찰 지경이다."

"그럼 이건……."

"알아서 처분해."

"가, 감사합니다."

세 사람은 곧장 트롤 군주의 사체를 뒤로한 채, 미궁의 더욱 깊숙한 곳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 * *

"잔뜩 긴장했는데, 이게 뭐야. 좀 허무하네."

전시영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거대한 몬스터를 손으로 짚으며 투덜거렸다.

S급 에너지 코어라도 얻어 볼 마음으로 전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미궁 군체 내부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대신에 미궁의 이곳저곳에는 최종 보스급 몬스터 사체가 즐비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죠."

"뭐가 잘 돼? 이러면 보상을 하나도 못 얻잖아."

"미궁이 무너지지 않았잖아요. 그럼 아직 최종 보스가 살아 있다는 거예요. 마지막 보상만 쟁취해도 모든 걸 얻은 거나 다름없지 않나요?"

"그건 또 그러네."

미궁은 보스가 부하 몬스터 전부를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보상을 주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만약 저 최종 보스급 녀석들이 죄다 부하 몬스터에 불과하다면?

뭔가 엄청난 것이 미궁 군체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대체 자기들끼리 싸우는 이유가 뭐지?"

"그러게요. 보통 같은 미궁에서 나온 몬스터는 서로 무관심하지 않나요?"

루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유진의 뒤를 바짝 따랐다.

정말이지 아무렇게나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가 향하는 곳에는 항상 탈진했거나 죽은 몬스터가 있었다.

마기가 흘러나오는 방향으로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망치던 최종 보스급 몬스터와 마주친 것이다.

대부분이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으로 다친 상태였다.

거대한 바실리스크를 목격한 블라드 유진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녀석은 무언가에 몸의 왼쪽이 대부분 잘려 나간 상태로 비칠비칠 이동하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문득 전방의 어둠 속에서 뭔가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바실리스크의 뒤통수를 꿰뚫었다.

푸확―!

"크레에에엑!"

제대로 좇을 수도 없을 만큼 빠른 움직임에 전시영과 루시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얼른 자세를 낮추며 싸울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유진은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정체불명의 상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유, 유진 님……."

"쉿! 조용히 해. 뭔가 생각이 있겠지."

전시영은 다급하게 그를 부르려던 루시아를 황급히 붙잡았으나, 걱정스러운 눈빛만은 거두지 못했다.

상대는 최종 보스급의 몬스터를 손쉽게 처죽이는 데다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이동하는 존재.

그러나 이쪽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 다가가는 중이었다.

이제껏 보여 왔던 블라드 유진의 초월적인 무력을 떠올리며 전시영과 루시아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알아서 양쪽으로 갈라져서는 그를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기대했던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바실리스크의 머리통을 꿰뚫은 존재에게 다가간 유진이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느낌이다. 마치……. 동족인 것 같아.’

놀랍게도 그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그 어떤 위기에 처했어도 이처럼 심각한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미간까지 잔뜩 찌푸린 상태였다.

쉬쉭―!

한데, 그런 유진의 고개가 왼쪽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바실리스크의 뒤통수에 뚫린 구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엄청난 속도로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이전보다 더 빠른 움직임에 아예 기척까지 느껴지지 않았지만, 뒤쫓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에 그를 내심 당황하게 한 사실이 있었다.

‘암흑화? 설마 진짜 뱀파이어 일족인가?’

바실리스크를 죽이고 사라진 존재가 사용한 기술은 분명히 암흑화였다.

신체를 검은 안개로 바꾸어 초고속으로 이동할 수 있는 스킬은 그것뿐이었으니까.

초월적인 감각으로도 감지할 수 없을 지경이었으나, 블라드 유진은 정확히 상대를 따라 움직였다.

물론 그도 암흑화를 시전하여 육신을 검은 안개로 바꾼 상태였다.

스으윽!

"어어? 어디 가는 거야?"

유진의 신형이 갑작스럽게 사라져 버리자, 전시영은 당황하며 고개를 휙휙 돌렸다.

거리가 꽤 먼 탓에 그녀는 그의 종적을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쪽입니다. 얼른 따라오세요!"

하지만 루시아는 유진이 이동한 방향을 느낀 모양인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잘 따라오고 있군.’

그런 두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한 그는 앞쪽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상대의 속도가 워낙 빨라서 암흑화에 피의 권능을 왕창 밀어 넣지 않으면, 놓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맹렬하게 도망치던 녀석이 문득 암흑화를 해제하더니, 어떤 최종 보스의 사체 앞에서 멈췄다.

블라드 유진은 적당히 거리를 둔 채로 속도를 줄이며 상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까만 머리칼, 작은 체구에 머리카락 사이로 뾰족 튀어나온 귀.

‘……귀?’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소녀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만약 흡혈 능력으로 몬스터의 피를 빨아들인다면, 확실한 동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귀의 모양이 사람과는 영 딴판이었으나, 뱀파이어의 존재는 외모가 아니라 혈액에 깃든 권능으로 판별하는 거였다.

그런데 오거나 사이클롭스처럼 생긴 몬스터의 사체 앞으로 다가간 소녀는 유진의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냠!"

대뜸 손톱으로 사체의 가죽을 찢어발기더니, 살코기를 뜯어 크게 베어 무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우적우적 씹어서 먹었다.

뱀파이어는 혈액 외에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음식 맛을 느끼는 건 인간과 비슷하나, 피가 수만 배는 달콤하게 느껴지니까.

저렇듯 생존을 위해서 고기 따위를 먹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

스윽!

유진은 상대를 향해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암흑화를 사용한 상태였기에, 소녀는 아직 그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지척까지 다가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검은 머리의 소녀가 고개를 돌려 블라드 유진을 바라보았다.

마치 암흑화한 그가 확실히 보이는 듯, 시선은 정확히 눈을 향하고 있었다.

입술에 피 칠갑한 소녀는 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맛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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