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삐이이이이―! 콰아앙!
간질간질한 느낌의 고주파 음이 들린 직후, 귀청을 찢을 듯한 폭음과 함께 큼지막한 몬스터의 몸통이 터져 나갔다.
후두두둑!
체내에서 강한 폭발이 일면서 뜨거운 열이 마구 발산되자, 혈액의 수분이 급속도로 날아갔다.
바닥에 떨어진 몬스터의 살점에는 질척거리는 혈전만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척! 철퍽!
"후! 이 짓도 이제 질리네."
팔이 여덟 개나 달린 괴물을 터트린 전시영은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발밑의 살덩이를 밀어 버렸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다음 목표를 찾았다.
연신 지겹다는 말을 내뱉었지만, 후발대를 이끄는 S급 헌터로서의 일은 제대로 하고 있었다.
"초열지옥 역풍(逆風)."
삐이이이이―!
그녀의 손에서 빠르게 회전하던 노란색 구체가 사라지는 순간, 어딘가에서 또 무지막지한 폭발이 시작되었다.
콰아아아앙!
얼추 대성체 미궁의 중간 보스급으로 보이는 몬스터가 전시영의 손짓 한 방에 쓰러지고 말았다.
체내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는데, 제아무리 육신이 단단한 놈이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던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기우뚱하며 쓰러지던 녀석이 대뜸 고개를 모로 틀면서 그녀를 노려보는 게 아닌가.
전시영은 콧방귀를 뀌며 손에서 시퍼런 화염을 피워 올렸다.
"뭘 봐?"
"퀘에에엑!"
쏴아아아!
그런데 팔비(八臂) 오거의 입에서 대뜸 시커먼 액체가 쏘아지는 게 아닌가.
연옥의 숨결을 날려서 머리통을 구워 버리려던 그녀는 깜짝 놀라며 옆으로 몸을 굴렸다.
하지만 넓게 퍼지며 날아오는 액체 세례를 피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늦었음을 인지한 전시영은 연옥의 숨결을 발사하여 심상치 않은 액체를 날려 버리려 했다.
한데, 문득 하늘에서 큼지막한 무언가가 그녀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쉬익―! 콰직! 츠츠츠츠츠!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바닥에 꽂힌 물체는 흰 천이 달린 은빛 장창이었다.
바람이 조금도 불지 않는데, 창날 바로 아래에 달린 깃발이 쫙 펼쳐지며 나부꼈다.
게다가 그 천에서는 강력한 백색 뇌전이 마구 뿜어지는 중이었다.
치이이익! 치익!
팔비 오거가 내뱉었던 액체가 깃발 창의 뇌전 역장에 닿자, 엄청난 속도로 튕겨 나갔다.
대부분은 그대로 증발되었고, 일부는 목적을 완수하지 못한 채 바닥에 떨어졌다.
이윽고 누군가가 무너진 빌딩을 박차며 도약하더니, 전시영의 앞에 착지했다.
"저런 너절한 것의 기습에 당하다니요. S급 헌터치고는 감각이 좀 둔하시네요. 멀리서 불만 뻥뻥 쏴 대서 실력이 퇴화한 겁니까?"
은빛 갑옷을 걸친 백금발의 여인, 스페인의 잔 다르크라 불리는 루시아였다.
그녀는 아스팔트에 깊숙이 박힌 깃발 창을 한 손으로 뽑아 들고 멋들어지게 휘둘러 겨드랑이에 끼웠다.
척!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전시영은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부라렸다.
"뭐라고?"
아웅다웅 입씨름하는 거야 800km가 넘도록 길을 뚫으며 수도 없이 한 거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장창을 휘돌리며 멋진 척, 예쁜 척하는 꼴은 도저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까짓 독액 따위 맨몸으로 맞아도 돼!"
"어디 그럼 맞아 보시든가요. 그나마 깨끗한 피부가 녹아내리면, 더 이상 당신을 봐 줄 사람은 없을 텐데요."
"야! 그건 어차피 지금도 없……. 아니, 이게 아니지. 냄새나니까 저리 가."
"허! 피차 제대로 못 씻는 건 같은 처지인데, 당신 얼굴에 먹칠하는 겁니까?"
"어휴! 한국인도 아니면서 그런 표현은 대체 어디서 배우는 거야? 아주 그냥 돌겠네. 돌겠어."
"미쳐도 일은 똑바로 하십시오. 칠칠치 못하게 이런 수준 낮은 놈들한테 좀 당하지 말고요."
"와! 어떻게 한 마디를 안 지냐?"
서로 독설을 뿜어 대며 티격태격하고 있었지만, 지난 한 달간 두 사람의 사이는 상당히 가까워져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최전방에서 몬스터와 싸우다 보니, 전우애가 싹틀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마지막 팔비 오거를 처치한 전시영과 루시아는 잠시 바닥에 주저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절그럭!
가죽 주머니에서 수통을 꺼낸 루시아는 전시영에게 내밀었다.
자신은 괜찮으니, 먼저 마시라는 의미였다.
전시영은 살짝 눈을 흘기면서도 수통을 받아들었다.
"안 힘드냐? 이딴 일 한다고 돈 주는 거도 아니잖아. 여기서 얻은 전리품은 죄다 스페인 임정에서 가져가고 말이야."
퉁명스러운 목소리였지만, 모두 루시아의 처지를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S급 헌터쯤 되면, 돈 없어서 못 산다는 말은 절대로 나오지 않았다.
적당히 수준에 맞는 몬스터 몇 마리만 잡아도 수백만 유로 정도야 손쉽게 벌 수 있을 테니까.
전시영의 질문에 루시아는 아련한 눈빛으로 도로 저편을 바라보았다.
"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선봉에 서서 큼직한 녀석들을 처치하면, 한참 뒤에 후발대가 밀고 들어왔다.
오염 지역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
후발대를 이루는 대부분은 헌터가 아닌 군인이고, 장비마저도 열악하기 그지없었으니까.
만약 블라드 유진이라는 초월적인 존재가 없었다면, 시도조차 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게 기회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어. 내 말은 정당하게 받아야 할 것을 왜 요구하지 않느냐는 거지."
"만약 S급 헌터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면, 절 내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에스파냐 임정에는 돈이 없으니까요."
"참 대단한 애국자 나셨군."
"전 저들의 행복한 미소만 봐도 족한 사람입니다."
루시아가 가리킨 곳에는 대부분이 스페인 사람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진군하고 있었다.
"크웨에에엑!"
투타타타타탕!
이따금 몬스터가 군인들을 향해서 달려들었으나, 순식간에 처리되고 말았다.
오염 지역이 아닌 곳에서는 일반인도 충분히 싸울 수 있었으니까.
달려들던 몬스터 몇 마리가 수백 발의 총알에 벌집이 되어 쓰러지자,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다 뒈져라! 이 개자식들아!"
"승전보다! 매일매일 승전보야!"
"박멸자! 박멸자께서 우리 앞에 서 계신다!"
승리에 도취해 있었으나, 누구도 그런 군인들을 말리는 이는 없었다.
아마도 저들의 마음은 메마른 땅과 같을 터였다.
지독한 가뭄이 이어지다가 이제야 단비가 내리는데, 그런 분위기를 깰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어느새 군인들은 몬스터 사체를 해체하면서 욕지거리를 마구 쏟아 내고 있었다.
"욕설이 엄청나네."
"에스파냐어에서 욕설을 빼면, 의사소통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넌 안 쓰잖아."
"지금은 한국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에스파냐어를 쓸 때는 욕을 한다는 거네?"
"사회적 위치가 있는데 그럴 리가 있겠어요? 당신도 평소에 체면을 좀 차리는 게 어떻습니까? 에스파냐보다는 한국이 그런 거로 엄격하다고 들었는데요."
"아, 씨……."
"어어? 이것 보세요. S급 헌터나 되는 사람이 언행을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어차피 아무도 듣는 사람 없잖아? 거참 되게 빡빡하네. 사람이."
전시영은 툴툴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조금만 더 진격하면 마드리드로 입성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엄청나네. 어떻게 저리 빠를 수가 있는 거지?"
그녀는 문득 미궁을 파죽지세로 정화하며 가장 앞서 나아가고 있을 블라드 유진을 떠올렸다.
아무리 속도를 올려 봐도 두 사람은 그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하고 있었다.
몬스터로부터 감지되지 않는 스킬이 있다고 해도, 최종 보스는 직접 잡아야 할 것 아닌가.
상식을 넘어서는 속도에 전시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조만간 미궁 군체가 보이겠군요."
"그나저나 큰일이군. 그 많은 최종 보스가 한꺼번에 달려들면 어떡하지?"
"최대한 각개 격파를 해 봐야죠. 이제 출발해요. 후발대가 거의 다 왔습니다."
루시아의 말대로 병사들이 벨라 차오를 부르는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질리지도 않는지 군인들은 새로운 지역을 점령할 때마다 소리 높여 저 노래를 불렀다.
"질리지도 않나 보네. 아! 잠깐만."
문득 그런 후발대를 바라보던 전시영은 황급히 수통에 남은 물을 얼굴에 바르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전투를 벌이느라 잔뜩 묻은 거뭇거뭇한 흙먼지를 씻어 내려는 행위였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루시아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깃발 창을 집어 들었다.
"그런다고 그 목석같은 분이 쳐다나 볼 것 같습니까?"
"야, 내 순정을 무시하냐?"
"왠지 안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것 같아? 어림도 없지!"
얼마 남지 않은 물로 고양이 세수를 한 전시영은 가슴을 쫙 펴고 당당한 걸음으로 언덕을 올라갔다.
이 언덕만 넘어가면 블라드 유진이 고군분투하고 있을 미궁 군체에 다다를 수 있을 터였다.
루시아도 벅찬 가슴을 진정시키며 전시영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언덕 위에서 본 마드리드의 전경은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었다.
여러 대성체 미궁이 겹친 곳 주변으로 수많은 최종 보스급 몬스터 사체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놈들은 하나같이 모가지가 잘린 상태였다.
마치 압도적인 실력 격차 때문에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학살당한 것 같았다.
"아……."
"이, 이게 대체 무슨……."
전시영과 루시아는 눈앞의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상식적으로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블라드 유진 혼자서 이 많은 몬스터를 죽인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이것들은 전부 대성체 미궁의 최종 보스가 아니었던가.
후발대를 이끄는 두 사람이 이곳에 당도한 시일을 계산하면, 고작 사흘 만에 저놈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말도 안 돼. 시간상 그랬을 리가 없어."
전시영은 저도 모르게 자신을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사체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살점이 떨어져 내렸다.
후두둑! 철퍽!
그러자 이제 막 전투를 끝낸 듯, 오른손에 시뻘건 칼날을 쥔 유진의 모습이 드러났다.
츠리리릿!
손을 가볍게 털자, 섬뜩한 빛을 발하던 소수혈인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문득 고개를 돌린 그가 눈만 깜빡거리고 있던 두 사람을 향해서 천천히 걸어왔다.
그런데 그때 언덕 위로 올라온 후발대 병사들이 유진을 발견하고 대뜸 멈춰 서는 게 아닌가.
"정지! 에스파냐의 위대한 정복 군주, 미궁 박멸자님을 향하여 경례!"
처저저저적!
수천 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마치 사전에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경례를 붙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맨 앞에서 진두지휘하던 장교는 희한한 미사여구까지 집어넣었다.
"뭐, 뭔 군주?"
전시영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자 병사들이 소총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환호성을 질러 댔다.
뭐 어쨌거나 블라드 유진이 피와 어둠의 군주인 건 확실했으니까.
그는 얼빠진 표정의 두 S급 헌터를 돌아보더니, 언덕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지. 이제 끝낼 시간이다."
언덕 아래쪽은 오염 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미궁 군체를 정화하지 못하면, 아마 마드리드는 영원히 이 상태일 것이다.
고지가 눈앞에 다가오자, 루시아는 밝은 표정으로 유진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아직도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전시영을 향해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뭐 합니까? 얼른 에스파냐의 위대한 정복 군주를 따르지 않고요."
"다들 좀 미친 거 같은데, 죽여주는 별명이란 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
그녀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언덕 아래로 내려가, 미궁 군체로 들어가는 중인 블라드 유진을 뒤쫓았다.
드디어 마드리드에 안착한 이 괴상한 미궁을 정화할 때가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