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파베레그의 대성체 미궁은 분화하기 직전이었다.
일정 규모 이상이 된 대성체 미궁은 두 개로 나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나눌 공간이 없거나 마기가 너무 많이 축적되면, 대규모 미궁으로 진화하기도 했다.
물론 미궁은 대체로 이러한 모습을 보여 왔지만, 항상 같은 방향으로 성장하는 건 아니었다.
단적인 예로 제주도의 대성체 미궁에서 관측된 ‘이주’ 현상이 있었다.
인간들은 헌터를 앞세워 끊임없이 마기와 미궁 연구를 거듭했으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점이 훨씬 많았다.
‘마기의 농도가 엄청나다. 조금만 늦었다면, 몽펠리에가 그대로 날아갔겠어.’
쓰스스스!
블라드 유진은 검붉은 색으로 변한 육각 기둥 속으로 몸을 집어넣으며 마기를 빨아들였다.
전신을 조여 오는 강력한 마기를 흡수하자, 따로 흡혈하지 않아도 피의 권능이 넘쳐났다.
이렇게 먹을 것이 넘쳐나니, 사실상 21세기는 뱀파이어가 살기에 가장 좋은 시절인 것 같았다.
물론 이제 일족이라고는 혼자밖에 없었지만.
"퀴이이익!"
"키킥! 키기기긱!"
생각에 잠겨서 걷고 있는데, 문득 그런 그의 곁으로 문어를 닮은 몬스터가 지나갔다.
마치 맹독을 지닌 파란고리문어를 크게 확대한 듯한 모습이었다.
놈들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주변으로 연신 시퍼런 가스를 퍼뜨려 대고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올라오는 걸 보니, 이건 맹독이 확실했다.
게다가 놀랍게도 이 녀석들은 맹독을 멀리 발사하는 기관까지 갖추고 있었다.
‘인간들이 상대하기에 굉장히 까다롭겠군.’
파주 북쪽에 있었던 래틀 스네이크처럼 헌터들조차도 꺼리는 몬스터인 듯했다.
상대하기 까다롭고 돈도 안 되는 녀석들이니, 몽펠리에 남쪽 전선에 헌터가 거의 없을 수밖에.
미궁 밖으로 줄지어 나가는 파란고리문어들을 지나친 유진은 마기의 흐름을 따라서 이동했다.
암흑화가 S급에 오른 덕분에, 그의 행보는 전혀 거침이 없었다.
이제 조심하지 않아도 기척을 알아채는 몬스터가 아예 존재치 않았으니까.
최종 보스가 위치한 곳까지 이동하고 있는데, 문득 미궁의 전경이 눈에 띄었다.
‘지상에 산호라니, 재미있네.’
문어를 닮은 몬스터가 서식하는 곳답게 내부는 시커먼 산호 모양의 기암괴석으로 가득했다.
녀석들은 비좁은 산호의 틈새를 유연하게 지나다녔다.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자유로운 움직임이었다.
한동안 마기의 흐름을 따라서 이동하자, 드디어 대성체 미궁의 최종 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체 미궁의 최종 보스 ‘풀파족 최고 지도자 렌투루스’가 분화를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최종 보스 ‘산왕(山王) 메가 스밀로돈 엔시스’가 나타났습니다.]
[분화된 개체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미궁의 파편에 실려 떠날 예정입니다.]
부하 몬스터와 마찬가지로 이 미궁의 최종 보스는 거대한 문어 모양이었다.
다리는 좀 더 길쭉하고, 머리와 다리를 연결하는 부위에는 맹독 발사 기관이 무려 여덟 개나 달려 있었다.
다리마다 각각 따로 조준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녀석의 볼록 튀어나온 눈은 검푸른 몸체와는 달리, 선명한 황금빛이었다.
불쑥 나타난 홀로그램 글귀를 다 읽기도 전에, 최종 보스의 분화는 완전히 이루어졌다.
‘이렇게 나뉘는 거였군. 사이클롭스 로드 형제의 이주하고는 좀 다른데?’
유진이 직접 목격한 것처럼 대성체 미궁의 분화는 파편 분출로 이루어졌다.
최종 보스가 미궁 밖으로 기어 나와서 육각 기둥을 옮기는 방식은 전혀 아니었다.
게다가 사이클롭스 로드와는 달리, 분화된 개체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나는 집채만 한 파란고리문어였고, 새로 나타난 최종 보스는 송곳니가 마치 칼처럼 날카로운 스밀로돈이었다.
호랑이와는 전혀 관련이 없지만, 엔시스는 일명 검치호로 불리는 녀석과 매우 닮았다.
쿠구구구구!
잠깐 놈들의 분화를 바라보는 사이, 미궁 내부의 끈적끈적한 마기가 새로운 최종 보스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엔시스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던 마기의 구름은 점차 검은 광택을 발하는 육각 기둥의 형태로 바뀌었다.
저렇게 최종 보스를 감싸서 어디론가 날려 보내면, 거기서 새로운 성체 미궁이 발생하는 모양이었다.
‘한 번에 두 마리를 처치할 기회인데, 저대로 둘 수는 없지.’
쓰스스스스!
암흑화를 최고조로 끌어 올린 블라드 유진은 메가 스밀로돈을 향해서 빠르게 나아갔다.
그러고 육각 기둥의 형태로 굳어 가는 마기에 시뻘건 칼날을 쑤셔 박았다.
스이잉! 콰칭!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소수혈인은 차오르던 마기의 움직임을 저지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적어도 일격에 찢어발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상당히 의외의 결과였다.
S급 스킬로 진화하면서 소수혈인의 위력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으니까.
"꽤 단단하군."
하긴 앞으로 이 육중한 물체를 저 멀리 날려서 지면에 떨어뜨릴 텐데, 어지간한 강도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유진은 미묘하게 입꼬리만 살짝 움직였을 뿐, 동요하지 않고 다섯 개의 칼날을 하나로 합쳤다.
츠츠츠츠츠!
그 상태로 다시 한번 소수혈인을 내리긋자, 육각 기둥의 마기에서 드디어 원하던 반응이 일었다.
사이클롭스 로드의 목뼈를 자르는 것처럼 느리지만 착실하게 칼날이 파고들어 간 것이다.
파치지직! 치직!
마치 루시아의 깃발 창을 상대할 때와 같이, 칼날과 마기 사이에서 스파크가 강렬하게 튀었다.
그러나 소수혈인의 움직임은 결단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육각 기둥의 바닥까지 마기를 완전히 잘라 내 버렸다.
슈콰아앙―!
새로운 최종 보스의 육신을 감싸던 고치가 찢어지자, 굉음과 함께 마기가 좌우로 쫙 갈라졌다.
풀파족 최고 지도자 렌투루스와 메가 스밀로돈 엔시스는 그제야 유진의 존재를 감지했다.
분화를 마치고 쉬던 중이라, 그의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루루루!"
"크르르릉!"
두 녀석은 괴성을 지르며 침입자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분화로 인해 체력을 상당 부분 소진했으나, 그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코앞까지 들이닥친 적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푸슈우우우우!
렌투루스는 곧장 여덟 개의 발사 기관을 움직여 보랏빛 독액을 마구 뿜어냈다.
그와 동시에 엔시스도 숨겨 두었던 날카로운 발톱을 뽑아내며 냅다 달려들었다.
스슥!
한데, 분명 방금까지 눈앞에 있던 블라드 유진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게 아닌가.
치이이익!
"크륵?"
바닥에 맹독이 흩뿌려지고, 메가 스밀로돈이 공격을 멈춘 순간이었다.
쉬익―! 쑤컹!
어디선가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려오더니, 엔시스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녀석의 머리 위에 나타난 그가 시뻘건 칼날을 휘둘러 목덜미를 일격에 끊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그 일격에 산왕이라 불리는 메가 스밀로돈의 머리통이 뚝 떨어져 나와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쿵! 구그그그!
집채만 한 머리가 굉음과 함께 잘려 나가자, 몸통 또한 산호 더미를 마구 부수며 널브러지고 말았다.
꽤 지쳤다고는 하나, 대성체 미궁의 최종 보스가 단 한 번의 칼질에 쓰러지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당연히 풀파족 최고 지도자 렌투루스 또한 이런 건 처음이었다.
녀석은 유연한 몸체가 딱딱하게 굳은 채로 한동안 유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윽고 괴성을 지르며 독액을 맹렬하게 뿜어 대기 시작했다.
발악하지 않으면 자신도 저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크뤠에에에에!"
치이이익! 치이익!
보라색 액체가 마구 쏟아져 나옴과 동시에 사방에서 부하 몬스터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직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던 녀석들이 부름에 응한 것이다.
족히 수백 마리는 될 법한 파란고리문어가 주변을 포위했지만, 그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녀석과 마찬가지로 나지막하게 누군가를 부를 뿐이었다.
"한바탕 날뛸 시간이다. 녹턴."
* * *
척! 척!
시커멓게 죽은 황량한 폐허, 그 주변으로 무수히 세워진 거대한 육각 기둥.
마드리드는 이제 지옥 그 자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빽빽이 들어선 대성체 미궁에서는 끊임없이 최종 보스급의 몬스터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놈들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은 뒤, 마기를 발산하며 새로운 육각 기둥을 만들어 냈다.
파베레그의 대성체 미궁에서 봤던 분화 과정과는 달리, 최종 보스가 자신의 몸을 단단한 마기로 둘러싸는 것이다.
‘마치 새로운 미궁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군.’
블라드 유진은 마드리드 외곽의 높은 빌딩 옥상에 올라서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페베레그로부터 직선으로 720km에 해당하는 거리를 그는 단신으로 돌파한 상태였다.
고작 한 달 만에 이룬 쾌거였는데, 한국에서보다 공략 속도가 두 배 이상 빨랐다.
물론 일반적인 S급 헌터라면, 단신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위업을 달성할 수가 없었다.
이게 다 유진의 능력이 상식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서기 때문이었다.
물론 암흑화로 인해 자잘한 부하 몬스터와의 전투를 회피한 덕분이기도 했다.
이제 SS급에 오르기만 하면, 지금보다 속도가 훨씬 빨라질 터였다.
투두두둑!
문득 유진의 발을 받치고 있던 콘크리트 일부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스러졌다.
그는 슬쩍 오른쪽으로 한 걸음 옮겨서 부서진 벽면 사이로 보이는 철골에 발을 올렸다.
다 쓰러져 가는 건물이라 약간 불안하긴 했지만, 사람 한 명 정도가 올라갔다고 해서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놈들을 지켜보고 있자, 이윽고 중앙의 육각 기둥에서 또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크워어억!"
온몸이 시퍼렇게 빛나는 거대한 오거였다.
상당히 먼 탓에 홀로그램 글귀가 뜨지 않아서 녀석의 이름을 알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최종 보스급인 것만은 확실했다.
육각 기둥에서 튀어나온 놈이 주변의 다른 최종 보스를 마구 밀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서열이 다른 건가?’
놀랍게도 녀석들은 싸우지 않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고는 다시 자리 잡고 앉아서 거대한 육각 기둥 고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못해도 그런 놈들이 수백이나 되는 걸 보니, 여길 뚫으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놈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가장 안쪽의 미궁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마드리드 근처에서 새로운 육각 기둥을 만드는 최종 보스들은 엄청나게 수준이 높았으니까.
상대적으로 서열이 낮아 보이는 외곽의 최종 보스가 그랬으니, 안쪽은 더 빠르게 그의 기척을 눈치챌 터였다.
아무래도 몰래 들어가기보다는 하나하나 끝장을 내고 나서, 중심으로 접근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것들이 마기로 고치를 만드는 데만 집중하고, 누가 공격을 받든 말든 신경을 안 쓴다는 거였다.
눈앞을 가득 메운 최종 보스를 보며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문득 동북쪽에서 작은 소란이 이는 게 느껴졌다.
드드드드드!
상당히 멀어서 그렇게 느껴졌을 뿐, 가까이 가면 아마 사방 천지에 굉음이 울려 퍼졌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시영과 루시아가 이끄는 후발대가 몬스터와 싸우면서 일으키는 소란이었으니까.
위치를 보아하니, 며칠 내로 마드리드에 당도할 듯했다.
‘저들이 도착하기 전에 얼른 끝내야겠군.’
동북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허공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빌딩 아래로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슈우우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