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35화 (36/226)

10화

"그러니까 수십 개의 대성체 미궁이 한 곳에 생성되었고, 안에서 최종 보스급 몬스터가 우르르 기어 나왔다. 원인은 모르지만, 마드리드가 위험해졌다고 해석하면 되나?"

하비에르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약하자면 그렇지요."

"일단 이 최종 보스들을 처리하기 전에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 있겠군."

그녀는 블라드 유진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몽펠리에에서 마드리드까지는 비행기로 4시간 20분, 차로 8시간 30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직선으로만 따져도 720km에 해당하는 먼 거리였다.

그 혼자라면 얼마든지 넘나들 수 있었으나, 전시영과 루시아를 달고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S급 헌터라지만 이 둘은 인간이라, 몬스터의 감각을 완전히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짙은 마기 속에서 무한정 버티는 건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

아마 며칠 지나지 않아서 제대로 된 S급 헌터의 힘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녹턴의 등에 태우고 가자니,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일단 탈 공간도 부족할뿐더러, 녀석이 유진 외에 다른 사람을 태우는 걸 불쾌해했기 때문이었다.

전시영의 말대로 한국에서처럼 길을 뚫는 게 우선일 것 같았다.

짝짝!

"그래도 그 유명한 대규모 미궁 박멸자께서 오셨으니, 희망이 없지는 않습니다. 제가 짠 작전 경로를 좀 봐 주시겠습니까?"

침울한 분위기가 계속되자, 하비에르는 박수를 두 번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스페인 지도와 자석을 꺼내더니, 화이트보드에 붙였다.

지도에는 몽펠리에부터 마드리드까지 성체 미궁을 최단 거리로 연결한 선이 그려져 있었다.

보급은 어떻게 할 거며, 헌터 지원은 얼마나 될 건지까지 수치를 상세히 적어 두었다.

스페인 임정에서 정말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일행의 관심은 지도가 아니라, 하비에르 대통령이 지칭한 단어로 쏠렸다.

"그나저나 박멸자(Eradicator)라고요?"

"네, 유진 님에게 그런 별명이 붙었습니다. 다들 그렇게 부르더군요."

아크웰이 묻자 하비에르가 살짝 유진의 눈치를 보며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라도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서 최대한 조심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나쁘지 않은 별명이군."

그가 괜찮은 반응을 보이자, 하비에르 대통령은 안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으려 했다.

그런데 문득 유진이 손을 들어 발언을 제지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직이 말했다.

"병력 지원은 필요 없다."

"예?"

"대신 일행이 먹고 마실 보급을 부탁하지."

"저, 정말 그렇게만 해도 되겠습니까?"

툭!

하비에르는 말까지 더듬으며 손에 들고 있던 동그란 자석을 떨어뜨렸다.

스페인은 이번 진공 작전에 사활을 걸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 퍼져 있던 헌터들이 속속 모여드는 중이었다.

병력이 확충되면 블라드 유진을 선봉으로 한꺼번에 밀고 들어가서 국토를 회복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병력 지원 없이 단독으로 작전을 하겠다니,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었다.

만약 그가 무너진다면, 스페인의 마지막 희망 또한 함께 침몰하는 거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유유히 임정 건물을 나서는 유진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럼 저희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그러시게."

아크웰과 루시아는 하비에르 대통령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얼른 유진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프랑스 남부 전선이로군요."

일행은 몽펠리에 남쪽 해안을 기점으로 서북쪽으로 쭉 이어진 전선에 도착한 상태였다.

놀랍게도 스페인 임시 정부와 프랑스 남부 전선은 걸어서 30분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만큼 스페인 임정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고, 어떻게든 전선을 남쪽으로 내리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의미였다.

프랑스의 본토 레지옹인 옥시타니에 해당하는 지역이지만, 이곳에는 스페인 사람이 훨씬 많았다.

아무래도 임정이 있는 곳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참 다르네. 마구 뒤섞여 있는데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 바로 알겠어."

군복을 입은 스페인 사람들은 한곳에 우르르 몰려 앉아 대화를 나누는 거로 시간을 보냈다.

반면에 프랑스 사람들은 혼자서 신문이나 책을 보는 걸 즐겼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는 탓에 외모만 봐서는 구분하기 힘들지만, 행동으로 알 수 있었다.

"에스파뇰은 열정적이죠. 우린 서로에게 스스럼없이 사랑을 표현해요. 물론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지만요."

루시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휴식 중인 군인들을 바라보았다.

스페인 사람들은 단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목소리를 높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매일같이 몬스터와 싸우며 꿈도 희망도 없는 삶을 이어 나가고 있으니, 제아무리 열정적인 스페인 사람이라고 해도 축 처질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패배감과 회의가 저 사람들을 지배하는 느낌이었다.

잠시 전선을 유지하는 군인들을 바라보는 사이, 자리를 비웠던 아크웰이 돌아왔다.

녀석은 짬을 내서 주변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한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며칠 전에 미궁의 파편이 날아온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얼추 사흘가량은 쉴 수 있을 거라고 하네요."

헌터는 거의 없고 각종 무기를 든 군인들만 있는 거로 봐선 여기까지 성체 미궁이 번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 예전의 양수역처럼 간헐적으로 미궁의 파편만 날아오는 듯했다.

"저기서 날아왔겠군."

블라드 유진은 전선 너머로 보이는 큼지막한 육각 기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커먼 마기에 둘러싸인 미궁은 언제든 파편을 쏘아 낼 것처럼 음산하게 꿈틀거렸다.

"꽤 크네. 분화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전시영의 말대로 몽펠리에 남서쪽 파베레그의 대성체 미궁은 상당히 덩치를 키운 상태였다.

문득 그의 뇌리에 하비에르 대통령이 화이트보드에 걸었던 지도가 떠올랐다.

스페인 임시 정부에서도 그 사실을 인지한 모양인지, 파베레그를 첫 번째 목표지로 잡았다.

꼭 임정의 루트를 따를 필요는 없지만, 전선에서 바로 보이는 미궁은 얼른 공략하는 게 좋아 보였다.

"아크웰."

"아, 넵."

"넌 여기 남아서 임정의 보급 지원을 기다려라. 최대한 빨리 따라와."

"알겠습니다!"

혹시나 자신도 진공 작전에 따라가야 하나 불안한 표정을 짓던 아크웰은 유진의 말에 즉시 대답했다.

혹시라도 그의 마음이 바뀌어서 같이 가자고 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블라드 유진은 그런 녀석을 지나친 채, 전선 밖으로 몸을 휙 날렸다.

"어어? 지나가면 안 됩니다! 거기 뭐 하는 겁니까?"

꽤 높은 방벽을 훌쩍 넘어가자, 기관총 포대를 지키고 있던 군인이 대경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그런 외침을 깡그리 무시한 채, 짧은 풀이 무성한 곳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런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병사들의 입은 쩍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저, 저 사람 그냥 보내도 되는 겁니까? 저긴 대(對) 몬스터용 지뢰가 잔뜩 깔린 곳인데요."

"그런데 이미 밟지 않았나? 왜 안 터지는 거지?"

유진은 암흑화를 시전한 상태라, 아무리 지뢰를 밟아도 터지지 않았다.

스페인 출신 군인들은 유진을 보고도 도무지 저지할 수가 없었다.

암흑화가 완전히 전개되어 이제는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병사들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할 필요 없네."

"어? 루, 루시아 님?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스페인 사람들 사이에서 루시아는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었다.

S급 헌터라 어딜 가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음에도, 국토를 되찾기 위해서 임정에 투신한 의인이었으니까.

전선에서 그녀의 희생정신을 모르는 사람은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었다.

군인들은 마치 사령관이라도 만난 것처럼 루시아를 향해 경례를 붙였다.

"앞으로 에스파냐의 미래는 찬란하게 빛날 걸세. 자네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고국으로 돌아간다니요?"

그녀가 손을 슬쩍 흔들며 말하자, 병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러자 루시아는 익히 보여 주지 않았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스파냐에 대규모 미궁 박멸자가 왔거든."

블라드 유진이 지뢰밭을 건너서 파베레그의 성체 미궁으로 향한 지 대략 30분 정도 흘렀을 무렵.

루시아와 함께 서 있던 군인들은 놀라운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쿠구구구구!

큼지막한 육각 기둥 주변의 마기가 엄청난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굉음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그러자 이윽고 성체 미궁이 한 점으로 수축하듯 급격하게 쭈그러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5년이 넘도록 파베레그에 틀어박혀서 마기를 뿜어내던 육각 기둥이 완벽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미궁 정화를 실시간으로 보게 된 병사들은 입을 쩍 벌린 채, 딱딱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그런 군인들의 곁에서 자신만만한 루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그럼 진공 작전을 시작해 볼까?"

"혼자 할 거도 아니면서 갖은 폼은 다 잡아요. 어휴!"

"불만 있으면 오지 말든지요. 전 먼저 유진 님께 따라붙겠습니다."

타닥! 쉬이이익!

루시아가 먼저 지뢰밭을 건너서 달려 나가자, 전시영도 뒤늦게 몸을 날렸다.

말은 퉁명스럽게 했지만, 이 머나먼 타국에서 혼자 떨어질 마음은 없는 듯했다.

쿠웅! 쿠구궁!

이윽고 두 사람이 몬스터를 때려잡는 굉음이 전선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아……."

"이건 진군이다. 진군이야!"

"박멸자 만세! 만세!"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군인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새 그들은 전선을 박차고 나가서 쭉쭉 남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에서는 자유를 갈구하는 노래, 벨라 차오(Bella Ciao)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파르티잔의 꽃이라 말해 주오. 자유를 위해 죽은 파르티잔의 꽃이라고!"

이탈리아 민요이자 파시즘에 대한 저항 정신이 깃든 노래였으나, 첫 소절은 스페인 군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게다가 모든 일에 문제를 제기하고 저항하려는 프랑스 사람이 거기에 동조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이 빌어먹을 현세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었으니까.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블라드 유진이 일으킨 작은 파문은 프랑스 전선 전체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이거 이대로 그냥 둬서는 안 되겠는데?"

전시영은 무턱대고 전선을 밀어 버리려는 군인들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전선에 배치된 헌터는 극히 소수였다.

미궁이 정화되었다지만, 고작 소총에 수류탄 몇 발로만 무장한 병사들이 몬스터를 향해 진격하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팍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붙잡았다.

"당연히 우리가 앞장을 서야지요. 뇌신의 흉장. 전투 모드 전개."

철컥! 드르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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