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34화 (35/226)

9화

"힌트?"

"네, 계시록의 아이템 정보를 봐 주십시오."

블라드 유진은 루시아의 말대로 다시 한번 계시록의 아이템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이름에 세 개의 물음표가 있고, 분량 소실이라는 글귀 외에는 그리 특별한 내용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이어지자, 그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EX급 아이템입니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지금껏 미궁에서 EX급 아이템이나 스킬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

드라코 도무스에서 얻었던 광진의 성배 엘―칼릭스가 EX급 아이템이었다.

스킬은 일족의 궁극기라 할 수 있는 천계도살검이 거기에 해당했다.

그래서 그런지 유진에게는 EX급이라는 게 그리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봉인되기 전, 그의 레벨 또한 그 정도 경지에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EX급은 아이템, 스킬, 레벨을 가리지 않고 너무도 높은 수준이었다.

"없진 않지."

"유진 님이라면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지구상에 돌아다니는 EX급 아이템과 스킬은 전부 리고르 아스페라와 드라코 도무스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대규모 미궁이 아니면, EX급 아이템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로군."

"제 추측으로는 그렇습니다."

블라드 유진은 기억을 더듬어 드라코 도무스의 보물 창고를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금은보화와 아이템만 있었을 뿐, 이런 책자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는 말은 남은 2대 미궁에서 나머지 절반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대규모 미궁이라……."

"리고르 아스페라와 같은 시기에 생성된 곳은 4대 미궁뿐입니다. 지금은 2대 미궁으로 불러야겠지만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슬쩍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천년 금제로 인한 봉인율을 낮추기 위해서는 어차피 높은 수준의 미궁을 공략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가는 김에 겸사겸사 계시록의 후반부도 찾으면 좋을 것 같았다.

"나쁘지 않군."

"물론 그 전에 스페인 진공 작전에 참여해 주셔야 합니다."

"내가 고작 이런 아이템 때문에, 약속을 어길 자로 보이나?"

"그건 아닙니다만……."

"출발하지."

"가, 감사합니다!"

블라드 유진이 최종 결정을 내리자, 그녀는 환하게 밝아진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문득 어디선가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어어? 블라드 유진, 이적 행위 멈춰!"

멀찍이 떨어져서 대련을 지켜보던 전시영이 불쑥 끼어들며 외친 것이었다.

"이적 행위라니요? 유진 님께서 한국 헌터 협회에 소속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루시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독설을 내뿜기 시작했다.

중간에 톡 튀어나와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형국이었으니, 좋은 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전시영은 그게 뭐가 상관이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한국에도 제주도만큼 거대한 대성체 미궁은 산적해 있는데."

"제 제안이 마음에 드셔서 간다는데, 당신이 뭐라고 끼어드는 거죠?"

"우리? 우린 전우라고. 함께 싸운 전우!"

"고작 몇 번 함께 싸웠다고 전우가 되는 겁니까? 그렇게 따지면, 당신과 저도 전우겠네요."

"에잇! 개판 오 분 전이었던 10년 전 공략을 왜 지금 꺼내는 거야? 그때도 너희들이 마음대로 하는 바람에 일이 다 꼬였잖아."

"그게 왜 저희 잘못이죠? 먼저 단독 행동을 한 건 동양 측 헌터들이었습니다만."

"와! 중국 애들이 이상한 짓 한 거를 동양이라고 싸잡아서 이야기하네."

리고르 아스페라에서 입었던 큰 피해는 헌터들의 미숙함으로 인한 거였지만, 사실상 지휘 체계의 부재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때 공략에 참여한 헌터들은 동양과 서양으로 나뉘어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하긴 온갖 국적의 사람들을 모아 놓았으니, 불협화음이 없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씩씩거리며 서로에게 거침없는 일침을 날려 댔다.

옆에서 보면 마치 시뻘건 화염과 백색 뇌전이 힘겨루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동안 서로를 비방하며 열을 올리던 전시영과 루시아는 어느 순간 심각한 허전함을 느꼈다.

"어? 그러고 보니, 어디 갔지?"

"브, 블라드 유진 님?"

두 사람이 지금껏 설전을 벌인 이유는 유진이 어디에 있는 미궁을 공략하느냐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당사자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뒤늦게 그의 부재를 깨달은 전시영과 루시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서쪽 하늘 저 멀리 날아가는 유령 군마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냥 가 버렸어?"

"허…….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일이 잘못되면 이게 다 당신 때문이에요."

"뭐 어쩌라고?"

"어쩌긴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는 것만 알려 드리죠."

"흥! 하나도 안 무섭거든? 해 보시든지."

루시아는 블라드 유진을 따라가기 위해서 재빨리 방어구를 벗었다.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로 차에 탈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문득 뒤에서 차량이 급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우우웅!

"하하! 어디 명동까지 알아서 열심히 와 보라고!"

전시영이 잽싸게 자신의 차를 몰고 양수역을 빠져나간 것이다.

먼저 그를 따라가서 어떻게든 설득할 작정인 듯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루시아는 눈을 번득이며 갑옷을 가죽 주머니에 담았다.

"그런다고 내가 놓칠 줄 아십니까?"

타다다다닥!

그녀는 빠르게 도망가는 차량을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대략 1시간 뒤, 전시영의 차는 명동성당 주차장에 당도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윽고 큰 키의 여인이 주차장을 지나서 사제관으로 달려가는 게 아닌가.

이제 막 차에서 내린 전시영은 그런 루시아를 보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런 미친……. 그 거리를 달려서 쫓아와?"

그러나 그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유진이 한국을 떠나지 않도록 설득해야 했다.

그녀는 결연한 눈빛으로 루시아를 따라 사제관으로 들어갔다.

* * *

"더럽게 오래 걸리네."

"지루하면 구시렁거리지 말고 잠이나 자세요. 게다가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너한테 말한 거 아니거든?"

"그럼 좀 조용히 말하든지요. 다 들리잖습니까?"

"쳇!"

전시영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반짝이는 백금발 머리칼 뒤편의 창문으로 느릿하게 지나가는 구름이 보였다.

결국에 전시영은 블라드 유진과 함께 프랑스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를 설득할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유진과 한국 사이에 실낱같은 끈을 만들어 두기 위해서 그녀는 스페인 진공 작전에 참여하기로 했다.

물론 그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한데, 놀랍게도 앙숙이나 다름없었던 루시아는 전시영의 참전을 대번에 승낙해 버렸다.

스페인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상황이라, 자존심 따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던져 버린 것이다.

휘우우우웅!

이윽고 일행이 탄 비행기는 리용―셍 엑슈뻬히 공항에 착륙했다.

"리옹은 오랜만이네요."

아크웰은 감회가 새로운 표정으로 수하물을 챙겼다.

한국의 드라코 도무스를 공략한 이후로 아직 교황청에서는 다른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다.

남은 두 곳의 대규모 미궁을 처리하는 게 임무였지만, 어느 곳을 선택할지는 재량에 맡긴 것이다.

그런데 스페인의 대성체 미궁을 공략한다고 하자, 교황청에서는 오히려 유진의 결정을 반겼다.

아무래도 프랑스 전선은 교황청이 밀어주는 곳이다 보니 그런 모양이었다.

덕분에 그는 매우 수월하게 다음 목표를 정할 수 있었다.

"우선 스페인 헌터 협회로 가시지요. 모시겠습니다."

공항 밖으로 빠져나온 루시아가 뒤돌아서며 왼손을 펼치자,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그 뒤에는 여러 대의 차량이 보였다.

"저희 결사대 대원입니다."

정장 색상을 군청색으로 통일하긴 했으나, 그들의 개성을 가릴 수는 없었다.

연령대가 다양한 남녀를 모아 놓은 데다가 대원들은 경호원이 아니라 헌터였기 때문이었다.

남의 나라에서 활동하는 만큼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쓸 법도 하건만, 루시아는 거침없이 의전을 진행했다.

스페인이 블라드 유진에게 진심을 보일 방법이란 방법은 모조리 동원할 듯한 기세였다.

이 정도면 우쭐한 느낌이 들 만도 한데, 그는 아무런 감흥 없는 표정으로 결사대원 사이를 걸어갔다.

반면에 전시영과 아크웰의 얼굴은 살짝 상기된 상태였다.

덜컥!

"타시죠."

루시아는 유진이 탈 차 문을 직접 열어주고, 앞 좌석에 탑승했다.

이윽고 결사대원들을 태운 열 대의 검은 SUV는 공항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프랑스 전선은 보르도에서 툴루즈를 거쳐 몽펠리에까지 이어진 엄청난 길이었다.

일행의 목적지는 몽펠리에의 동부 전선, 리옹 공항에서 차로 대략 3시간 정도 걸리는 곳.

스페인 임시 정부와 헌터들로 이루어진 결사대는 바로 이곳, 동부 전선의 끝자락에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덜컥!

루시아는 몸소 반대편으로 뛰어가서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차에서 내리며 도로 오른쪽에 세워진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페인 임시 정부라는 석재 사인보드와 치외 법권이 적용되는 조차지라는 글귀가 함께 붙어 있었다.

리모델링을 했는지 건물은 꽤 깔끔했지만, 상당히 작았고 군데군데 오래된 티가 역력했다.

아무래도 임정의 자금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최소한의 규모로만 유지하는 모양이었다.

"누추합니다만, 안으로 드시지요."

루시아의 안내에 따라 유진은 스페인 임시 정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호위랍시고 따라온 헌터들은 곧장 건물의 오른쪽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마도 저기가 결사대의 숙소인 듯했다.

일행은 스페인 임정 1층의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이윽고 미중년의 백인 남성이 반대편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에스파냐 임시 정부의 대통령 하비에르 마틴 사파테로입니다. 그냥 하비라고 불러 주십시오."

스페인은 입헌 군주제, 의원내각제, 양원제, 다당제의 정치체제를 채택한 단일 국가였다.

하지만 미궁의 폭주로 인하여 마드리드가 한순간에 지워지며 왕실과 정치인 대부분이 몰살했다.

그러는 바람에 임시 정부는 민주 공화제를 채택하게 된 것이다.

"……블라드 유진."

유진은 상대가 내민 손을 가볍게 맞잡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하하! 과묵한 분이시군요. 괜찮습니다. 요즘은 허울뿐인 사교성보다 뛰어난 전투력을 지닌 헌터가 인정받는 세상이니까요."

하비에르는 쾌활한 목소리로 말하며 찻잎과 주전자를 주섬주섬 챙겼다.

그런 다음 그의 앞으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 한 잔을 대령했다.

어려운 시기에 임정의 대통령을 맡았지만, 위엄보다는 소탈한 성격이 도드라져 보이는 인물이었다.

탁!

"곧장 전선으로 들어가도 될 텐데, 굳이 여길 들르자고 한 이유를 모르겠네. 회유 작전도 적당히 해야 먹히는 거 모르나?"

시종일관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려는 스페인 임정의 행태에 불만을 표한 건 전시영이었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스페인의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러니 쓸데없이 시간을 끄는 듯한 모습에 볼멘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시작부터 독설을 얻어맞았지만, 하비에르 대통령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한국의 S급 헌터시군요. 그 명성은 익히 들은 바 있습니다. 스페인 진공 작전에 참여해 주셨으니, 우선 감사부터 드려야겠군요."

"뭐……. 별거 아닌데."

전시영은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살짝 휘저었다.

초면부터 날 선 모습을 보여 준 것이 조금 민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하비에르는 개의치 않고 쭉 말을 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진공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죠. 하지만 상황이 변했습니다."

"상황이 변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대통령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 루시아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하비에르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으로 커다란 사진을 내밀었다.

위성 사진을 확대한 거였는데, 희미하고 거대한 무언가가 미궁 밖으로 나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몇 장의 사진을 넘겨 보니, 최종 보스에 필적하는 몬스터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하비에르는 밝고 유쾌하던 표정을 순식간에 싹 지우고, 진중한 눈빛으로 사진을 가리켰다.

"마드리드에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규모…….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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